은천검제 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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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79화
은천검제
제79화
청강을 떠올렸던 진무린은 잠시 고민한 끝에 마음을 굳혔다.
“지금부터 단전에 내공의 기초를 닦아줄 것이며, 운기를 통해 길을 열어줄 참이다. 혈도를 닦는 일은 참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있으나 진인께서 남기신 정수를 받는 일이니 올곧게 견뎌주길 바란다.”
눈을 껌벅이는 표충량은 진무린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나중에 알게 될 일이다. 너는 진인께 구 배를 올려 감사함을 전하고 가부좌로 앉아라.”
“예, 대협.”
정확한 뜻은 모르나 어렴풋이 짐작하는 눈치였다.
먼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은 표충량이 고두배로 아홉 번의 절을 올린 뒤에 가부좌로 앉았다.
진무린은 표충량의 뒤에 같은 자세로 앉았다.
이어 묵룡심법의 내공을 일으켜 기운을 정갈히 했고, 등룡창천의 초식을 이용해 기운을 풀어냈다.
“호흡을 길게 끌고 잡념을 버리며, 훗날 수련할 수 있도록 내가 인도해주는 길을 기억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대협.”
나직하게 조언을 건넨 진무린은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 표충량의 등에 손을 얹었다.
진무린은 청강의 전언을 모두 기억한다.
이는 내공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니 입문자, 고수, 그리고 생사현관 타통 이후의 세 가지 단계에서 각각 어떻게 수련하느냐를 설명한 것이었다.
표충량의 단전에 공력의 일부를 담아준 진무린은 천천히 기운을 이끌어 혈도를 따라 움직였다.
표충량은 기특하게도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전에 청강이 일부 가르침을 주었는지 혈도 또한 탁하지 않았고, 심지어 요정처럼 타고난 자질도 지녔다.
우선은 내공을 전한다.
청강이 남긴 말은 또한 검법에도 적용될 수 있어서 훗날 지켜보다가 검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표충량의 몸을 타고 한 바퀴를 돈 내공이 다시 단전에 들어간 뒤였다.
진무린이 손을 쓰지 않았음에도 표충량의 단전에서 내공이 일어나 방금 지났던 혈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이 정도 재능이었던가.
진무린은 굳이 개입하지 않은 채 표충량의 몸을 살폈다.
그 순간이었다.
진무린의 뇌리에 운진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화산의 청강 진인은 내공이 극에 달했는데 도를 쌓는다 하십니다. 그 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허허. 그런 높은 경지를 빈도가 감히 어찌 알겠소? 다만, 청강 진인이라는 분은 내공과 외부의 기운을 조절하지 않을까 짐작만 한다오.”
퍼뜩 떠오른 대화였다.
“바람이 북에서 동으로 불 때면 매화는 설산에서 꽃을 피워 향을 남서로 피우는구나. 햇살은 봄과 다르지 않으나 땅은 한기를 피워내니 매화는 홀로 향기롭다.”
그리고 그때부터 청강이 남긴 말이 그의 넉넉한 음성으로 진무린의 귀에 생생하게 들렸다.
‘세 가지 단전을 깨우는 것 또한 일러주셨구나! 하단전과 중단전이 내공의 경지라면 상단전은 바로 도력의 경지인데 사람이 구별하는 것이지, 원래 기운은 다를 바 없다!’
이때부터 진무린은 무아의 경지에 들었다.
한낮으로 향하는 햇살이 비추는 높은 곳에 앉아 표충량은 새로 익힌 운기에 전념했고, 진무린은 청강의 가르침으로 상단전을 일깨우니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진무린에게서 피어난 묵빛 기운이 꽃의 형상을 그려 주변을 맴돌았는데 이때 세상에서 보기 드문 또 다른 기연이 이루어졌다.
진무린의 손을 통해 기를 함께 나누던 표충량의 몸 또한 묵빛 기운이 만든 꽃봉오리에 묻힌 일이었다.
생사현관을 타통했다거나 느닷없이 선인의 경지를 이룬 것은 아니나 표충량은 혈도가 맑아져 내공이 원활하게 흐르는 득을 얻었다.
한 시진이 훌쩍 지나서 진무린이 호흡을 가다듬자 꽃봉오리가 한 가닥 연기처럼 코로 빨려 들어갔고, 그 직후에 운기가 끝났다.
표충량의 상태를 점검한 진무린은 막힘없이 흐르는 내공에 의아한 심정이었으나 이는 또한 어린아이의 타고난 자질이라 여겼다.
먼저 일어난 진무린은 복장을 정갈히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청강을 향해 아홉 번의 고두배를 올렸다.
‘전해주신 정수를 아이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얻었습니다. 진인의 가르침을 헛되이 쓰지 않을 것이며, 량아를 끝까지 돌보겠습니다.’
진무린이 절을 마쳤을 때 표충량이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이전과는 확연하게 맑아진 눈이었고, 기운 넘치는 얼굴이었다.
**
삼도방의 장설군은 아침이 다르고 오후가 다르게 호전되더니 마침내 장삼도가 보는 앞에서 침상을 벗어났다.
“오오!”
아들이 살아난 장삼도의 감격은 말할 것 없었다.
그뿐이랴.
무공을 잃을지 모른다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장설군은 단전에 기감을 느낀다 하지 않는가.
“장하다! 대견하다!”
장삼도가 등을 쓸어주며 한바탕 기쁨이 지난 뒤였다.
“이제 일어났으니 소주천을 해볼까 합니다.”
장설군이 내내 벼르던 일을 다시 꺼내 들었다.
“네가 이리 쓰러진 것이 성급함과 조급함 탓이었다. 모든 일에는 과정과 노력이 필요한 법, 어찌 경거망동하여 어렵게 얻은 삶을 망치려 하느냐.”
“가볍게 소주천을 하여 무공을 잃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그를 통해 기력을 회복하겠다는 바람입니다. 누워 있는 내내 다짐했던 일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흠.”
잠시 고민한 장삼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천이라면 운기 중에 멈춘다고 딱히 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삼도방의 심법이라야 이리 줍고, 저리 얻어 만든 것이니 흔한 만큼 부작용도 적었다.
“괜찮겠냐?”
“조심, 또 조심하다가 그만두라는 말씀이 들리면 바로 중단하겠습니다.”
“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
한번 해보자는 도전의식이라면 장삼도도 아들 장설군에게 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장삼도는 연공실 바닥에 두꺼운 천을 깔게 하였다. 그런 뒤에 노복들을 모두 물리고 장설군의 뒤에 앉았다.
“너는 절대 무리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장설군이 반가운 기색으로 가부좌에 양손을 얹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장삼도는 그의 뒤에서 내공을 일으켰다.
그는 가슴 앞에서 양손을 휘젓듯 움직여 기운을 풀어내고는 장설군의 목덜미 아래와 허리 위에 얹었다.
“감정을 먼저 가다듬어라.”
장설군을 향한 장삼도의 나직한 조언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장설군은 다시 운기하는 현실에 기쁜 나머지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장설군이 몇 번이나 호흡을 고른 뒤에 천천히 단전의 기운을 일으켰다.
코로 들어온 호흡이 뒤통수, 목과 명치를 따라 단전에 이르면 천천히 기운을 일으켜 머리로 향한다.
‘이런……!’
그러나 호흡을 고르던 장설군은 곧바로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갇혀 있던 둑이 일시에 터진 듯 단전에서 강한 기운이 올라와 호흡보다 빠르게 몸을 돌았기 때문이었다.
장설군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감정을 가라앉히래도!”
뒤에 도와주던 장삼도는 나직하게 꾸지람을 내었다.
그러나 그 꾸지람이 끝나기 무섭게 장설군의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눈을 뜨고 상체를 급히 기울인 장삼도의 눈에 열이 올라 붉게 물든 장설군의 얼굴이 바로 들어왔다.
무엇보다 지금의 열기는 이제껏 장삼도가 알던 삼도방의 기운과 확연히 달랐다.
“견디기 어렵다면 기운을 몸 전체로 돌려라.”
급히 말을 건넨 장삼도가 장설군의 목덜미와 허리 위에 다시 손을 붙였다.
삼도방에 대주천이 있다 한들, 구파일방이 보기에는 웃음이 나올 수준인데, 그들 나름으로는 열심히 수련한 심법이었다.
장삼도의 말을 들은 장설군은 단전에서 거침없이 뿜어지는 기운을 평소에 배운 대로 등 뒤로 끌었다.
그때 그의 몸 안에서 놀라운 일이 또다시 펼쳐졌다.
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놀라고 당황한 것은 장설군만이 아니었다.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손을 움츠린 장삼도도 마찬가지였다.
‘기운이! 이 아이의 몸에서 일어난 기운이 나를 밀쳐냈어!’
강한 기운에 밀려난 장삼도가 놀라고 당황한 눈으로 장설군을 살폈다.
백향초의 기운이 움직이는 것을 알지 못했고, 안다고 해도 삼도방의 심법이 높은 수준이 아니어서 장삼도는 어쩌지 하는 얼굴로 지켜볼 뿐, 손을 쓰지는 못했다.
**
진무린은 표충량을 안고 오래 기다렸던 은혼의 앞에 내려섰다.
그는 화산의 장문인이요, 청강의 직계제자였다.
“진 대협.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단박에 표충량의 변화를 알아보았으나 경지가 부족해 진무린이 바뀐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우선 앉으십시오.”
몸을 일으킨 은혼에게 자리를 권한 진무린은 맞은편에 앉았다.
“진인께서 남기신 것이 있어 아이에게 길만 전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문인께 청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표충량을 가볍게 보았던 은혼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 아이를 제자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은혼은 먼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의 의중이 그러시리라 짐작했습니다.”
내내 진무린과 표충량을 기다리던 참이니 궁금한 것이 많으리라. 표충량의 눈빛과 얼굴색이 아까와는 확연하게 다른 이유도 알고 싶으리라.
그런데도 그는 청강이 전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표충량을 왜 제자로 들이라는 것인지 묻지 않은 채 진무린의 뜻을 받아들였다.
“량아는 들어라.”
“제자 표충량이 장문인의 말씀을 받습니다.”
나무에 앉은 은혼이 도사복 자락을 넉넉하게 늘어트린 채 입을 열었고, 지켜보던 표충량이 얼른 일어나 앙증맞은 양손을 마주 잡았다.
“너는 사부께서 남긴 전인으로 본파와 인연이 깊고, 돌아갈 곳 또한 마땅치 않다. 여기 계신 진 대협의 권유 이전에 나 또한 그리 생각하였으니 앞으로 내 제자가 되어 화산의 일원이 되겠느냐?”
화산의 장문인이 어린아이에게 제자가 되겠냐고 묻는다.
화산과 은혼의 제자가 되고 싶어 목을 기다랗게 빼고 바라던 이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일이었다.
총명하다고 하나 아이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시선을 돌린 표충량에게 진무린은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 표충량이 사부님을 뵙습니다.”
무릎을 꿇은 아이가 이마에 흙과 잔돌이 박히도록 깊게 아홉 번의 절을 올렸다.
이로써 표충량은 장문인 은혼의 제자가 되었으니 명허, 수인자와 같은 항렬이 되었다.
“사부께서 너를 배려하신 데는 분명 사유가 있을 터, 너는 이제부터 화산의 제자로 죽고 살아야 함을 명심해라.”
“예에.”
“이리 오너라.”
은혼이 손을 내밀어 부르고는 다가온 표충량의 조막만 한 양손을 붙들었다.
“그동안 본파는 무수한 역경을 이겨냈더니라. 그 힘은 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너와 같은 제자들의 노력이 있었음이다. 알겠느냐?”
“예, 장문인.”
“나를 뭐라 불렀느냐?”
“예, 사부님.”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를 장면이었다.
이제 화산으로 돌아가면 표충량은 느닷없이 높아진 항렬에 시기와 질투를 받을 테고, 또 고된 수련을 감당해야 한다.
“너는 나의 제자로 어딜 가든, 화산이라는 이름이 뒤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행동에 주의하고, 명예를 목숨만큼 소중히 하며, 누구에게도 해가 될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너는 잠시 저곳에서 기다려라.”
표충량을 달랜 은혼이 아이에게 한쪽을 가리켰다.
“진 대협. 흉수가 폭렬공을 사용한 것과 진득한 마기를 뿜어낸 것으로 보아 분명 마교의 일원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사부의 비통한 죽음에 마교가 개입되어 있음을 증명한다고 봅니다.”
단단한 표정으로 입을 연 그는 더 가릴 것 없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본파는 매화검수를 다수 잃었으나 이백여 명의 본산 제자와 오백여 명의 속가제자가 있으며, 은거하신 고수 또한 적지 않습니다.”
“마교를 상대하실 생각입니까?”
“진 대협이 나서신다면 뒤를 따를 것이고, 아니라면 독자적으로 움직일 참입니다. 다만, 나서실 생각이라면 힘을 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 여쭤보았습니다.”
강한 의지를 내보이는 은혼을 말리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계획했던 일이니 가릴 것이 무엇이 있겠나.
진무린은 단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교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진 대협. 그럼 이 몸은 이만 본산으로 돌아가 사부님의 마지막 자리를 지켜드릴까 합니다.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진무린의 답을 들은 은혼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예, 사부님.”
은혼이 지시하자 표충량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본산으로 돌아갈 참이다. 진 대협께 인사 올려라.”
표충량이 진무린을 향해 돌아선 다음이었다.
“너는 앞으로 나를 사숙이라 불러라. 사부께서 청강 진인과 막역하시고, 나와 장문인이 동렬이니 강호의 예법에 크게 해되지 않을 일이다.”
“제자가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청강 진인께서 당부하셨고, 이제는 장문인의 제자가 되었으니 너를 어찌 외인 대하듯 하겠느냐. 그러니 이제부터는 사숙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소질 표충량이 진무린 사숙께 인사드립니다.”
잠시 주춤했던 표충량이 무릎을 꿇고 앉아 천지신명께 삼 배, 진무린에게 이 배, 도합 다섯 번의 고두배를 올렸다.
소질이란 표현을 떠올리느라 잠시 주춤하긴 했으나 은천문에서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영특한 아이였다.
“진 대협.”
“살펴가십시오.”
포권으로 인사를 나눈 은혼이 표충량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짧은 만남이 아쉬웠다. 그러나 은혼의 처지를 이해하여 출발을 만류하지 못했다.
핏자국이 가득한 도사복에 한 자루 검을 든 은혼이 새로 받아들인 제자와 걸어가는 뒷모습에 아쉬움과 사부의 마지막 당부를 이루었다는 후련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