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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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77화
은천검제
제77화
분노를 겨우 누른 진무린은 흑사련 호북 지부로 향했다. 그리고는 청강의 비보를 알려주었다.
“청강 진인께서 등선하시다니…….”
명허와 수인자, 두 사람이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다.
진무린은 굳이 화산의 장문인 은혼이 표충량이라는 아이들 데리고 이곳 상등으로 출발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자칫 말이 돌 것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일이 그리 돼서 반드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은 내가 있고, 또 소림과 무당의 제자분들이 있으니 염려하실 것 없소. 부디 무탈하게 돌아오시오.”
진무린의 표정을 살핀 운진이 다독이듯 답을 건넸고,
“무슨 일이 있어도 본 것을 똑바로 전할 것이며, 모산의 문주와 안에 계신 아미의 어른들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명허가 든든하게 각오를 전했다.
“바로 오겠다.”
“진 사숙께서는 몸을 살피십시오.”
명허와 수인자의 당부를 들은 진무린은 곧장 몸을 날렸다.
한 마리 새가 저런 모습이런가.
지붕 위로 튀어 오른 진무린이 단숨에 모습을 감추자 명허와 수인자는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그러시오?”
“진 사숙의 기운에 놀라 그렇습니다. 고함에 담긴 내공이야 견딜 만했으나 조금 전 마주한 사숙의 기운은 감히 빈승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명허는 존경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진무린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빈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부께 듣기로 하늘이 재능을 내리는데 백 년, 거기에 기연이 더해져 선인의 경지를 넘어서는 데는 최소 삼백 년의 세월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였습니다. 진 사숙이 바로 그 경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 뒤에 수인자가 들었던 평가를 덧붙였다.
“진 사숙의 슬픔이 헤아릴 수 없이 클 텐데 그 점이 걱정이오. 청강 진인께 의지하는 바가 한눈에도 보일 지경이었으니.”
명허와 수인자 모두 엄청난 무위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진무린의 태도에 감탄했고, 청강의 비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그의 심정을 염려했다.
**
점심을 지난 시간에 은혼은 제자들을 불러 조문객을 영접하라 일렀다.
“멀리 계신 분들은 사흘이 넘어야 당도하실 테니 그 근처에 돌아오겠다. 이는 사부께서 남기신 유언을 이행하는 일이니 조문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분들을 맞이하는데 결례가 없도록 하라.”
“장문인의 명을 받습니다.”
원로 몇이 만류하였으나 비통하게 죽은 청강의 유언을 받든다는 말에 모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지시를 마친 은혼은 표충량을 불렀다.
죽 반 그릇을 먹은 뒤에 반 시진을 자고 난 표충량은 아직 슬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였는데 은혼은 그 올곧은 마음이 기특했다.
“너는 나와 함께 산을 내려가자.”
“예, 장문인.”
그 한마디를 건넨 은혼은 늘 지니던 한 자루 검을 들고 표충량과 단출하게 화산을 벗어났다.
“어찌 눈치를 살피느냐?”
“제자가 부족하여 경공을 발휘하지 못하시는가 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니니 너는 염려하지 마라.”
이때 은혼은 소매가 멀쩡한 도사복을 입었는데 청강의 제자답게 검소하여 소매에 새겨진 매화 문양이 아니라면 어쩌다 보이는 도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섬전검법에 당한 청강은 어린 표충량에게 굳이 진무린을 찾아 말을 전하라 했다.
‘은천문을 적으로 삼지 마라. 그리고 진 대협과 의논해라.’
이는 강호를 혼란에 빠트릴 이간계를 조심하라는 뜻이니, 청강은 어린아이를 통해 은혼을 깨우치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화산에 연락하라 했으니 이는 은혼의 판단을 믿음이었다.
전하라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표충량을 슬쩍 보았던 은혼은 궁금함을 조용하게 삼켰다.
직접 전하라는 데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어서 이는 진무린에게 주는 청강의 전언일 것이 분명했다.
오후의 늦은 시간이었다.
물과 곡기를 끊은 은혼은 몰라도 어린 표충량이 저녁마저 거른 채 멀리 움직이기는 어려웠다.
**
아미의 장문인 현절 사태가 다섯 제자와 호북의 흑사련 지부에 들어선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마차를 이용했을 텐데도 중간부터는 경공을 발휘했는지 들어선 이들의 표정에 무리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림의 제자 명허가 아미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무당의 수인자가 아미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인사를 받은 현절은 대꾸도 없이 얼음이 쏟아질 것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운진을 대했다.
“진 대협과 함께 도움을 주신 모산의 운진 문주이십니다.”
“운진이라 하오.”
“흥. 모산이 최근 이름을 드높이더니 문주란 분이 아미의 일에 끼어들 줄은 몰랐소.”
포권을 취하는 운진을 향해 현절은 냉소 가득한 대꾸를 건넸다.
확실히 모산은 구대문파에 비하기에 손색이 있었고, 아미의 현절은 문파 어른들과 제자들의 비보에 감정이 격해진 상태여서 어쩌면 당연할지 모를 격한 반응이었다.
“어른들은 어디 계시냐?”
“안쪽에 모셔두었습니다.”
계시는 것이 아니라 모셔두었다?
명허의 답에 날카롭게 시선을 뿌렸던 현절이 대청 안쪽의 방을 바라볼 때였다.
“장문인. 이쪽입니다.”
명허가 각오한 듯 창고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무슨 짓이냐?”
“이곳에서 말하기 곤란한 사정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과 귀를 경계하란 의미처럼 명허는 우선 움직일 것을 권했다.
이를 뿌드득 갈았으나 아미의 권위가 걸린 일이라, 현절은 독한 눈매로 명허의 뒤를 따랐다.
창고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문을 연 직후까지, 이를 꽉 깨물고 있던 현절은 부적을 이마에 붙인 채 쭉 서 있는 조연명과 조성명을 보고는 독이 오른 살쾡이처럼 눈을 파랗게 빛냈다.
“너희가 본파의 어른들을 이리 욕보이고도 살기를 바랐더냐!”
쨍하는 그녀의 고함이 터진 직후였다.
그녀의 몸에서 내공이 뿜어져 나와 몸을 감은 가사와 장삼을 펄럭였다.
차라리 맞아서 피를 토하면 토했지, 현절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이 명허와 수인자의 처지였다.
“어찌 말을 않느냐!”
쩌렁 고함을 지른 현절이 주먹을 쥐고서 명허와 수인자를 노려볼 때였다.
“장문인께서는 제 말씀을 먼저 들어주시오.”
나직한 음성으로 운진이 끼어들었다.
“그대는 관여하지 마시오!”
“헛되이 시간을 끌면 이곳에서 기다리신 분들의 혼이 흩어진다오. 그리되면 진정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 테니 먼저 말씀을 들어보고 그 후에 추궁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를 악물어 볼을 씰룩인 현절이 운진을 노려볼 때였다.
“여기 계신 분들은 법력이 높아 쉬 혼을 빼앗기지 않았소. 보통의 경우라면 이미 혼백이 흩어져 서 있지도 못했을 텐데 어찌 된 연유인지 지독하기 그지없는 술사의 강시술에도 굳건히 견디셨으니 이는 장문인을 기다리신 것이 아닌가 하오.”
“아미타불…….”
운진의 말이 이어지자 현절은 내공을 누그러트린 뒤에 불호를 외웠다.
누구보다 현장을 잘 아는 명허와 수인자는 시선을 마주한 뒤에 고개를 떨궜다.
운진의 지금 설명은 진무린에게 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러니 이는 운진의 임기응변이리라.
나서서 거짓이라 말하기 어렵고, 지켜보자니 어른을 속이는 듯해서 명허와 수인자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금껏 기다리신 것도 참으로 대단한 법력이나 한계가 있소. 이분들이 이리 기다리신 것에는 후인에게 전할 말씀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뜻을 이루신다면 아마도 편히 입적하실 게요.”
참담한 심정을 얼굴에 담은 현절이 시선을 돌린 직후였다.
다른 말이 없었는데도 운진은 가슴 앞에 손을 올리고 나직하게 진언을 외웠다.
운진이 걸음을 옮겨 조연명의 이마에 붙은 부적을 떼어내는 순간이었다.
번쩍하고 조연명이 눈을 떴다.
“사부님!”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낯빛의 조연명을 현절이 비통한 음성으로 불렀다.
“나는 지금까지 구천에서 너를 기다렸다.”
“사부님! 부족한 소질을 벌해주십시오!”
현절의 두 눈에서 삽시간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불가의 제자요, 강호의 일원이 죽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
이게 진짜일까, 아니면 운진의 술법이 대단한 건가.
명허와 수인자가 놀라 고개를 들 정도로 조연명은 평소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내 이렇게라도 너를 기다린 것은 흉수를 찾아 이 원한을 갚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농간에 빠지지 말라는 당부를 전하기 위해서니라.”
“어리석은 소질에게 길을 알려주십시오, 사부님.”
“흉수를 찾는 일은 진무린 대협이 알고 있느니라. 너희는 이후 그의 말에 따라 흉수를 찾되, 강호를 이간질하려는 무리에 현혹되어 어리석은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명허가 운진을 보았을 정도로 지금 조연명의 말에는 의도가 가득했다.
“또한, 이런 모습이 외부로 알려지면 본파의 치욕이 될 일이니 나는 이제 입적하겠다. 너희는 내가 되살아난 일을 입에 담지 말 것이며, 다만 억울함을 너에게 알리기 위해 돌아왔던 것으로 해라.”
눈물이 흥건한 현절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쨍하고 조연명의 고함이 터졌다.
죽은 자의 하얀 낯빛, 피를 머금은 듯 붉은 눈가,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눈, 그리고 파랗게 변한 입술이 참으로 기괴했는데 현절은 그 모습이 또 그리 아픈 모양이었다.
“장문인이라고 그리 나오는 게냐!”
“소질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사부님을 이리 보내야 하는 것이 아파 그렇습니다.”
그토록 차갑던 현절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예, 사부님.”
울음을 삼킨 현절이 조연명에게 다가갈 때 명허와 수인자는 참으로 놀란 눈으로 운진을 보았다.
이게 진실인지, 운진의 술법인지 가늠이 가지 않은 탓이었다.
“내 염주를 건네주마. 억울한 죽음에도 이리 버틴 나의 뜻을 지켜달라는 당부로 받아다오.”
“사부-님!”
오열하는 현절에게 목에 걸었던 염주를 건네준 조연명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한계에 달했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서둘러 마쳐주시오. 더 지나면 이분들은 진정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어서 영원히 구천을 떠돌 수밖에 없다오.”
“사부님! 사부님! 어찌 이 미욱한 소질만 두고 가십니까!”
울부짖던 현절이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운진을 보았다.
“노도는 감히 짐작도 못 할 법력을 지니셨던 분들이오. 장문인을 기다리는 일념으로 버티셨으니 이만 보내주셔야 한다오. 보시오. 이제는 말씀도 못 하실 정도로 힘겨우신 상태요.”
몇 번이나 울음을 삼킨 현절이 조연명을 향해 커다랗게 절을 하고는 두 번의 고두배를 마쳤다.
“그럼 이제 보내드리리다.”
운진은 가슴에 손을 얹고는 주문을 급히 외웠고, 이후에 시선을 돌렸다.
“장문인께서는 어른을 수습하시오.”
현절이 몸을 일으켜 조연명의 옆으로 움직이자, 운진이 짧은 주문을 외웠다.
“사부님!”
무너지는 조연명을 받아든 현절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고, 이어 조성명과 제자들을 수습하는 동안, 비통함은 계속되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오?”
“오래 버티신 분들이오. 법력이 대단하시니 지금 염불을 올리되 가능하면 서둘러 화장을 드시게 하는 것이 좋소.”
명허와 수인자가 보기에 참으로 기가 막힌 장면이었다.
그토록 날카롭던 현절이 운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가 지시한 대로 이행하는 모습이 말이다.
벽에 기대앉은 자세로 놓인 조연명과 조성명, 제자들을 위해 현절은 곧바로 염불을 외웠고, 운진은 정도맹의 무인들에게 관을 준비하라 일렀다.
가장 염려했던 일이 너무도 쉽게 풀리고 있었다.
**
객잔에 들른 은혼은 객잔주의 극진한 배려 속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내일은 경공을 발휘할 참인데 너의 기가 허하면 힘이 배로 든다. 그러니 너는 저녁을 충분히 먹고 푹 자도록 해라.”
은혼이 말한 경지를 표충량은 알지 못한다.
어쩌랴. 시키는 대로 먹었고 은혼이 수혈을 만져준 덕분에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표충량을 침상에 뉘인 은혼은 다리에 검을 올려놓은 자세로 앉아 운기하며 밤을 지새웠다.
물과 곡기를 끊은 탓에 육신은 힘겨움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사부를 비통하게 잃은 은혼에게는 부족한 제자가 받을 당연한 벌과 같은 느낌이어서 오히려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운 은혼은 새벽녘에 표충량을 깨웠고, 함께 손과 얼굴을 닦았으며, 어린 제자에게 죽과 만두 한 개를 먹인 뒤에 객잔을 나섰다.
주인이 서둘러 건네준 만두를 허리에 넣은 표충량과 함께 걷는 길이었다.
마음 같으면 훌쩍 경공을 발휘하련만, 아직 보는 눈이 있어 쉬 달리기는 어려웠다.
잠시 걷던 은혼은 주변을 서너 차례 둘러보았다.
눈빛이 매섭게 변했는데 어린 표충량은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화산에 비해 편안해 보이는 산에 오른 뒤였다.
“이곳이 좋겠구나.”
산과 산이 이어져 움푹 들어간 곳에 있는 편평한 공간이었다. 주변을 산이 둘러싼 덕분에 다른 이의 시선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호흡을 고른 은혼은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감히 누가 화산을 욕보이려 하느냐!”
그가 나직하게 뱉은 꾸중이 내공을 타고 산을 돌아 멀리 퍼진 직후였다.
휘릭! 휘익!
똑같은 복장의 쌍적이 숲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앞에 내려섰다.
검은 복색에 눈 아래를 딱딱한 가죽으로 가린 두 사람을 보고도 은혼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먼저 느긋한 태도로 표충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부께서 너를 아끼시더니 원시천존께서도 너를 귀히 여기시는 모양이다. 고난은 사람을 그만큼 강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러니 너는 이런 순간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더욱 굳건해지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예, 장문인.”
고개를 끄덕여준 은혼이 손을 내밀자 표충량이 뜻을 알아듣고 공손하게 두 손을 앞으로 내었다.
휘익!
허공에 떠올랐던 표충량이 붙여놓은 것처럼 은혼의 등에 업혔는데 청강을 떠올려서인지 그 작은 몸에 떨림이 있었다.
스응.
검을 낸 은혼이 삼선검법의 기수식을 취한 뒤에 대라신공을 운용하자 등에 업힌 표충량은 그제야 떨림을 멈췄다.
“오너라. 내 사부의 원을 풀고, 화산을 가벼이 여긴 벌을 내리리라.”
은혼의 다짐이 어찌나 굳건했던지 어린 표충량이 그 음성에 깨우치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