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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76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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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76화

은천검제

제76화

 

연화봉에서 내려온 은혼은 그 길로 화산의 입구에 세 글자의 고어가 적힌 누런 깃발을 걸게 하였다.

“앞으로 사흘간 물과 곡기를 끊겠다. 이는 사부를 기리는 제자의 마음이니 너희는 나에게 음과 식을 권하지 마라.”

스승이 사망했다 하여도 도사들과 승려들은 소복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오른 소매 아래를 잘라내 사부를 잃은 아픔을 표현하고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상은 고요했다.

청강의 위패 앞에 놓인 청동화로에서 향의 연기만 수북하게 올라올 뿐, 무릎을 꿇은 은혼과 그를 지켜보는 네 명의 도사는 마치 조각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수련한 도사라 해도 사람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은혼의 무릎 앞 마루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이는 은혼이 청강을 그리며 흘린 눈물이라, 현재 그가 얼마나 비통한 심정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었다.

오전과 점심의 중간쯤이었다.

“장문인께 아룁니다. 암상이 물건을 회수하러 왔다 하는데 어찌하리까?”

굳은 듯 움직이지 않던 은혼의 고개가 그제야 위로 들렸다.

“어디 계시냐?”

“소등각에 모셨습니다.”

객을 맞는 객청으로 안내했다면 크게 결례되지 않는 대응이었다.

“내 그리 가겠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은혼은 복장을 바로 하고 위패를 향해 섰다.

“사부님. 지시하신 일을 처리할 참입니다. 제자가 최선을 다해 이행한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양인각을 나선 은혼은 그 길로 소등각을 향해 걸었다.

경공을 발휘한다면 바로 뚝 떨어질 길이나 대낮에 장문인이 그리 달려갈 정도로 다급한 일은 아니었다.

“량아는 어찌 있느냐?”

“내내 울기만 하더니 죽 반 그릇을 겨우 먹고 조금 전에 잠들었습니다.”

“영특한 아이이니만큼 등에 업혀 사부를 보낸 아픔도 선명할 것이다. 잘 살펴주도록 해라. 특히, 주변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제자가 있다면 내 엄벌하겠다.”

“조심히 살피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은혼은 계단을 돌아 너른 공간을 지났고, 이어서 객을 맞이하는 소등각에 들었다.

대청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몸을 일으켜 양손을 맞잡는데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화산을 책임진 은혼이라 하오.”

“위명을 오래전에 들었는데 오늘에서야 인사드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먼저 청강 진인께서 등선하신 것에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고맙소이다. 때문에 복장이 허술하니 양해 바라외다. 앉으시오.”

“어찌 장문인을 앞에 두고 일개 수하가 먼저 자리하겠습니까? 문주는 객을 편케 하여 주십시오.”

서로 권하기를 두어 차례 한 뒤에야 은혼이 먼저 앉았고, 이어서 객이 자리했다. 도사 한 명이 들어와 차를 내었는데 객 앞에 한 잔이 전부였다.

“깃발을 주셨기에 방문하였습니다. 수결이 없는 깃발이라 장 노대가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괜찮소. 내 짐작한 대로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입을 연 은혼은 청강의 전언과 표충량의 일에 관해 중년 남자에게 내용을 전했다.

“표충랑이란 진충무관의 제자가 본문의 진무린 대협을 만나는 일이라 들었습니다.”

“그렇소.”

“장소를 특정하시리까?”

“그렇지는 않소. 다만, 사부의 전언을 어린 제자가 외우는 터라 가능하면 조속히 만나고 싶을 따름이오.”

“본가의 사람이 다시 방문해 데려가도 되리까?”

오가는 대화에서 질문이 있었는데 은혼은 잠시 답을 내지 않은 채 뜸을 들였다.

“진 대협은 어디 계시오?”

“현재 호북의 상등, 흑사련 지부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언제 길을 나설지,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은천문에서 온 분이 우리 제자를 데리고 간다면 필시 상등으로 향하겠구려.”

“이후에 어떻게 변경될지 몰라도 당장은 그렇습니다.”

은혼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반드시 진무린에게 직접 전하라 하였다. 이는 다른 이의 손을 거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은천문의 입장에서야 번거로울 수 있겠으나 내가 제자와 함께 진 대협을 직접 찾아 나서리다.”

은혼의 뜻을 들은 객은 놀라는 눈치였다.

청강의 일로 문상객이 줄을 설 상황에서 직계제자이며 화산의 수장이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이 지닌 무게가 가볍지 않은 까닭이었다.

“우선 상등으로 향하시면 혹여 변화가 있을 때 내용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경공을 발휘해도 되겠소?”

“장문인께서는 편안히 거동하소서.”

어떻게 움직여도 암연이 알아서 연락하겠다는 뜻이니 어쩌면 언짢을 답이었다. 그러나 은혼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 알고 출발하리다.”

“뜻을 전하겠습니다. 혹여 전할 다른 말씀은 없으십니까?”

“진 대협에게 내가 찾아뵙는다는 말씀을 전해주실 수는 있소?”

“상등으로 바로 전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대화가 끝났다.

어차피 살가운 관계도 아니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등각을 나섰다.

 

**

 

날이 밝기 직전에 운진은 아미 일행을 곽가와 풍령관의 수하가 구금되어 있던 장소로 이동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눅눅한 창고에 들이는 모습이 좋을 것은 없었다.

“오늘 중으로 정도맹과 구대문파의 장로, 아미의 제자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언짢을 광경인데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함께 있던 명허와 수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진무린의 판단이 옳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술사가 있을 때는 그 기운으로 햇볕을 견디나 지금은 부적으로 죽은 몸을 지탱할 뿐이오. 강시술을 시행했더라도 술사가 없다면 이들은 견디지 못하오.”

진무린과 명허, 수인자를 돌아본 운진이 진중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이들은 이미 죽은 자이나 술법의 기운을 얻어 버티는 것이라오. 강시술이 있더라도 몸이 썩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자칫하면 급격하게 부패가 진행되어 지켜보기 어려울 것이오.”

술법을 논하는데 당장 운진만 한 인물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판단이 그렇다는데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워서 진무린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

이마에 부적을 붙인 아미의 일행이 운진을 따라 눅눅한 창고로 들어가는 광경을 보며 진무린과 명허, 수인자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강호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죽은 뒤의 모습을 지키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침을 죽으로 넘긴 진무린은 운진과 함께 방에 들어 운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주천을 마친 진무린이 호흡을 고를 때는 이미 점심나절이었다.

‘조만간 정도맹에서 도착하겠구나.’

진무린이 오후를 짐작할 때 밖에서 암연의 기운이 담을 넘어 흑사련 호북 지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명상에 잠긴 운진을 방해할세라, 진무린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자 정도맹의 무인이 바로 달려왔다.

“잠시 밖에 다녀올 텐데 문주께서 명상 중이시니 공연히 소란스럽게 하지 마시오.”

정도맹의 무인에게 당부한 진무린은 그 길로 흑사련 호북 지부를 나섰다.

다른 이의 눈에 띄는 곳이었다.

기운을 뿜어낸 진무린은 걸음을 옮겨 소능산으로 향했다.

다시 올 거라 기대하지 못했던 곳이다.

오르는 길은 변함없는데 막상 올라보니 오래된 사당은 절반쯤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진무린이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암연이 분명한 마흔 초반의 남자가 다가와 포권으로 예를 표했다.

“무슨 일입니까?”

“진 대협.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진무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암연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앞에 세웠다.

무슨 일이지?

혹시 은천문으로 돌아간 사매에게 일이 생겼나?

날카롭게 변한 진무린의 눈을 보며 중년의 남자는 바로 입을 열었다.

“어제저녁에 청강 진인께서 흉수의 습격을 받아 절명하셨습니다.”

진무린은 잠시 멍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청강 진인께서 흉수의 습격을 받아 절명하셨습니다.”

“정도맹에 계실 진인이 어떻게 흉수의 습격을 받을 수 있습니까?”

진무린의 질문에 남자는 청강이 문서량으로 향했음과 후의 일을 빠르게 전해주었다.

“흉수는요?”

“암연이 조사한 바로는 풍령관이라 짐작합니다.”

“그리 짐작하는 이유도 알려 주십시오.”

“먼저 폭렬공을 사용했고, 이어 본문의 무공을 펼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뿌드득 악무는 진무린을 향해 남자는 곧바로 화산의 장문인 은혼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출발했다고 봐야겠습니다?”

“필시 그럴 것입니다.”

“호북 지부에 들러 사정을 설명하고 곧바로 출발하겠소. 화산과 이곳을 관통하는 길로 갈 테니 가능하다면 은혼 장문인께 내가 가고 있음을 알려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남자가 물러간 뒤에도 진무린은 잠시 더 멍한 얼굴로 상등을 지켜보았다.

할아비와 손자의 연을 맺자던 청강과 이곳 상등에서 불편하게 헤어졌다.

매화검수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싶어 하는 그의 바람을 모르지 않는다. 다시 보면 그 점에 관해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마음에 두지 말라고 말이다.

지금껏 모르던 혈육의 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주었던 이가 바로 청강이 아니던가.

상등을 향해 선 진무린의 몸에서 서서히 묵빛 기운이 뻗쳐 나와 넘실넘실 주변을 뒤덮었다.

검은 것도 아니요, 회색도 아니며, 진한 먹을 갈아놓은 것처럼 또렷한 먹빛이니 이는 지금까지의 기운과 또 달랐다.

“풍령관?”

진무린은 상등을 향해 가볍게 웃었다.

“마교?”

그런 뒤에 또 한 번 입가에 독한 미소를 그려냈다.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참을 길 없어서 진무린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으아아아-!”

진무린의 고함을 따라 묵빛 기운이 회오리처럼 허공으로 치솟았다.

반쯤 새로운 모습을 갖췄던 사당이 억울한 모습으로 주저앉았고, 상등의 모든 기와가 들썩였으며, 산짐승과 새, 말과 개의 비명이 연달아 울려 나왔다.

 

**

 

장삼도는 삼도방에서 무려 이십 리 길을 함께 걷고도 화호검 곽동문과 무심창 고섭량, 무정검 금남조가 만류하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강호는 참으로 넓은 데다,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삶인 탓에 이제 헤어지면 언제 볼지 모르고, 누군가는 흙바닥에 피를 흘렸다는 비보가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이었다.

“장 형님.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

“내 조금만 더 함께하겠네.”

“여기까지도 과한 배웅이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오.”

배웅하는 장삼도나 떠나는 세 사람 모두 그 짧은 사이에 정이 담뿍 들어서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진 대협이 아니었다면 이리 좋은 장 아우와 악연을 맺을 뻔했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내려앉는군.”

나이로 따져 화호검이 가장 위요, 그다음이 장삼도, 다시 고섭량과 금남조의 순이었다.

“장 형님. 조만간 사천에 꼭 들르시구려. 이 아우가 사천의 절경을 두루 보여드리고 혈육 같은 친우, 아우들을 꼭 소개해 드리고 싶소.”

“허허! 사천을 방문한 이후에 우리 장 아우의 이름이 강호에 쩌렁쩌렁 울리겠구나!”

화호검이 짐짓 유쾌한 기색으로 말을 건넸으나 장삼도의 얼굴과 눈빛에는 아쉬운 감정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발전하시오, 형님.”

“잘 있게, 아우.”

창을 늠름하게 세운 무심창과 검을 든 화호검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자 장삼도도 더 따라나서기는 곤란했다.

“조심해서 가시오. 조심히 가게.”

마침내 장삼도가 물러서자 사천의 세 사람은 아쉬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수하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마쳐 뒤를 따랐고, 이 각쯤 흘러 일행의 모습이 길 너머로 가려지자 장삼도는 걸음을 돌렸다.

하루에도 서너 차례 비무를 함께하며 부족한 점을 논의했던 세 사람이 떠났다.

터덜터덜 삼도방을 향해 걸으며 장삼도는 그리운 감정을 숨에 담아 토해냈다.

지금껏 살아오며 어디 이런 적 있던가.

그날, 진무린의 배려가 없었다면 장설군의 치료는 말할 것 없고, 자칫 삼도방은 하남의 무관 역사에 한 줄을 남기는 것으로 성세가 무너졌을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진 대협.”

장삼도는 진심으로 진무린의 발전과 강건을 소원했다.

 

**

 

마교의 제자요, 풍령관 구양강의 아들인 구정봉은 손안에서 작은 돌을 놀리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매서운 눈매에 코끝이 휘었고, 입술이 얇아 한눈에 보기에도 잔인한 성품에 표독스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더는 풍령관이 나서기 어려우니 화산의 장문인과 아이를 처리토록 해라.]

 

손안에 들었던 종이를 재차 확인하고 불에 태운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폭렬공에 섬전검법마저 공을 들인 세 놈이 화산의 늙은이에게 그리 허무하게 죽다니.”

객잔에 묵은 그는 널따란 대청에서 몸을 일으켜 별채의 정원을 향해 섰다.

“쌍적.”

구정봉이 별채의 정원을 향해 불렀고,

휘익. 휙.

별채의 지붕에서 무복 차림의 두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검은 무복에 머리를 뒤로 동여맸는데 코 아래 하관을 딱딱한 가죽으로 감싸서 누가 누군지 두 사람을 바로 구별하기는 어려웠다.

“화산의 장문인이 어린아이와 나온 모양이다. 너희 둘이 가서 아이를 죽이되, 심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잔인한 상상을 하는 모양으로 구정봉은 눈을 반짝였다.

“나무에 목을 건다거나 아니면 사지를 갈라서 머리 주변에 둥그렇게 놓는다거나.”

도를 품은 채 서 있는 쌍적은 답이 없었다.

“가라.”

휘익! 휙!

구정봉의 지시가 떨어지자 두 사람이 빠르게 사라졌다.

“진무린이란 놈 하나를 상대로 이토록 복잡하게 일을 꾸밀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놈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훨씬 편할 텐데 참으로 어렵게 풀어가시는군.”

관심이 식었다는 투로 고개를 저은 구정봉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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