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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13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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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13화

은천검제

제113화

 

뒷짐을 진 진무린은 아직 감동이 가시지 않은 요정을 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같은 초식이다. 너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싶으냐?”

“지금 본 모습이요.”

“그렇다면 무공을 펼치는데 강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라. 소수음공은 부드러운 초식에 내공을 녹여내야 하는데, 강맹하게 초식을 펼친다면 결국 흉신악살의 모습을 면치 못한다.”

얼결에 요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예의 눈빛이 엄하게 바뀌었고, 백면호리가 어쩌나 하며 눈치를 살폈는데 진무린은 그런 요정을 꾸짖지 않았다.

“내공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초식에 담는 것이다. 그럼 함께해볼까?”

진무린은 요정의 곁으로 움직여 같은 방향을 향해 선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린과 요정이 함께 펼치는 소수음공의 초식이었다.

힘이 가득하던 요정이 진무린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는데 어색한 구석이 있으나 그렇다고 못 봐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때는 진무린이 힘을 조절하여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고, 흙먼지가 피어나는 일도 없었다.

백면호리가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진무린과 요정이 몸을 세웠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중심이 제대로 잡혔고, 원리를 몸이 아는구나.”

요정에 대한 칭찬에 백면호리가 뿌듯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뻔뻔한 저 모습 뒤에 딸을 제대로 키우고 싶은 아비의 마음이 담긴 터라 그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살펴본 바로 도인을 깨닫기에는 충분하다. 배운 대로 내공을 이끌면 부족한 순간에 내가 도와주마.”

“예.”

함께 동작을 펼치는 동안, 요정의 내공이 움직이는 것을 재차 확인했던 진무린은 숨을 고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로 함께 펼치는 소수음공이었다.

동작이 계속 이어지다가 팔을 길게 펴 교대로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진무린은 공력의 일부를 넘겨 요정의 내공을 도인했다.

놀라운 광경이 그 직후에 펼쳐졌다.

요정의 가녀린 팔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얼핏 피어났고, 이어 그 작은 손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백면호리가 양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고, 원예가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어 요정이 구부린 손을 아래로 찍을 때였다.

파악!

확실하게 깃발 펄럭이는 소리가 울리더니 누군가 입으로 분 것처럼 흙먼지가 옅게 일어났다.

동작은 이어졌다.

선녀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여아가 있다면 지금 요정의 모습이리라.

지금 열한 살 요정의 동작은 깜찍했으나 위엄을 담았고, 부드러우나 거칠 것이 없었다.

진무린은 좀 더 넉넉하게 공력을 전해주었다.

하얀색을 띠는가 싶었던 요정의 작은 손이 분을 바른 것처럼 새하얗게 변했고, 천신을 따르는 것처럼 진무린의 곁에서 휘두르는 팔에서는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분명하게 울려 나왔다.

휘릭! 휘리릭!

마침내 팔을 교차하는 것으로 소수음공의 초식을 마친 진무린과 요정이 몸을 세웠을 때, 백면호리는 울컥 올라온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

 

정도맹을 나선 황종관은 곧장 가장 가까운 산을 찾아 들어섰고, 인적이 드문 것이 아니라 아예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을 이용해 걸었다.

가뜩이나 힘든 길을 택한 황종관은 심지어 밤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의도는 분명했다.

비월단은 고사하고 암연조차 함부로 다가서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침을 맞아 해가 완연하게 떠오르고서야 황종관은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서 반나절을 쉬겠다.”

그가 말하기 무섭게 스무 명인 황가의 가신들이 바삐 움직였다.

네 명은 적당한 곳에 서서 경계했고, 남은 인원은 식사를 준비했으며, 그중 또 한 명은 황종관을 위해 차와 술을 먼저 내놓았다.

“함께 출발한 길이다. 음식도 술도 함께 마셔야지.”

어깨를 짓누르던 맹주의 직을 벗어던진 황종관은 아예 호걸로 돌아왔고, 그를 둘러싼 가신들 또한 정도맹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활달하게 움직였다.

불을 피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 준비가 끝났다.

술을 병째 들이마시고, 고기를 입에 물어가며 아침부터 거한 식사를 마친 황종관은 산비탈의 공간에 짐승의 가죽을 깔고는 세상 편한 자세로 그곳에 누웠다.

밤새 함께 걸어왔던 가신들이었다.

그런데도 네 명이 허리에 도를 걸고는 황종관의 앞을 지켰다.

“피곤하지 않냐?”

“괜찮습니다, 맹주.”

“밖에서는 그냥 가주라 불러라.”

“예, 가주.”

시원한 대답에 황종관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나야 본때를 보일 생각이다만, 기껏 달려와서 죽을 길에 나섰으니 그것이 너희에게는 미안하다.”

“가주를 모시는 것만으로도 소신들은 행복합니다.”

“미친놈. 도를 익히라 지시했더니 말주변만 늘었구나.”

말을 마친 황종관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고, 가신들이 허물없이 함께 웃었다.

도를 사용하는 황가 특유의 분위기가 그런 터라 웃음은 요란했고,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

 

요정을 방에 앉힌 진무린은 대주천을 지켜본 뒤에야 밖으로 나섰다.

“진 대협.”

가장 먼저 진무린의 앞에 나선 사람은 백면호리였다.

그는 전에 없이 공손한 태도로 양손을 맞잡은 뒤에 고개를 깊게 숙였다.

요정이 안쪽에서 운기하는 참이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게 상체를 기울인 진무린은 백면호리의 귀에 고개를 가져갔다.

“안 어울리는 거 알지? 적당히 해.”

“사람이 진지하게 고마움을 표시하면 좀!”

발끈한 백면호리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가 진무린을 보며 기가 찬 표정으로 웃었다. 딸의 발전을 지켜본 아비의 흐뭇한 웃음이리라.

“이제 백면호리 같네. 나는 루주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텐데 운기가 끝나려면 한 시진 정도 걸려. 그동안에 잠깐이라도 자 두지?”

“그럴까?”

강호의 삶에서 상승무공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군가 나서 공력을 전해주고, 내공을 도인해주는 것이 얼마나 희박한 일인지를 익히 아는 백면호리는 더 할 수 없이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루주의 말로는 무공을 지도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었는데 그건 어찌 된 건가? 말을 못했지만, 내내 그걸 걱정하고 있었지.”

“그걸 이제야 말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 봐 그랬지.”

계면쩍게 웃는 백면호리가 궁금한 눈으로 답을 기다렸다.

표정을 봐서는 요정의 재능이 워낙 뛰어나 그렇다는 따위의 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풍령관에서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돼. 문주에게서 직접 받았으니 가능하지.”

“그런가?”

가볍게 웃어준 진무린은 몸을 돌려 아침을 먹었던 방으로 향했다.

“루주.”

부르는 것과 동시에 안쪽에서 시비가 문을 열었고, 탁자에 있던 원예가 몸을 일으켰다.

진무린이 맞은편에 앉자 찻잔을 놓아준 시비들이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듣고 싶은 내용이 있다고 하셨지요?”

“객잔에 있을 때 궁도라는 사람이 찾아왔었다. 벽계에 있는 사람으로 하후도를 대신한다고 하던데.”

질문을 받은 진무린은 곧바로 석 잔의 술을 나누며 주고받은 대화와 마지막 잔을 나눈 뒤에 들었던 경고를 원예에게 들려주었다.

“하후도란 자가 소능산에서 내게 손을 쓰고도 당당하더니, 풍령관에서는 또 그것을 감추기 위해 물러났었다.”

원예는 양손을 다리에 올려놓은 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진무린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호에서 무공을 사용하면 안 된다던 벽계가 이쯤 되면 아예 강호일통의 야욕을 드러낸 것과 같지. 벽계와 구주의 관계된 깊은 이야기와 왜 그들이 삼보를 만들었는지, 루주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해주었으면 싶다.”

“공자께선 벽계의 인물만 만나셨나요?”

“무슨 의미지?”

“벽계가 지닌 금제와 삼보에 얽힌 이야기를 궁도라는 분이 직접 했을 리는 없어요. 그렇다면 공자께서는 분명 구주의 인물도 만나셨다는 의미죠.”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다.”

“은천문에도 함구하셨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루주에게 듣는 이야기를 포함해 본문에 돌아가 모든 일을 털어놓고 의논할 참이었고.”

“굳이 은천문에 내용을 알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더는 감춰서 될 일도 아니고, 본문을 봉문하라는 경고까지 한 마당이니까 의논하는 게 옳지.”

진무린은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천하영웅대회, 혈교의 등장, 구정봉의 건재까지, 이전에 풍령관에 달려가기 전까지의 일이 반복되는 모양새다. 남은 것이 있다면 흑사련 같은 세력과 마등쯤 되는 인물이 나타나 강호를 피로 물들이는 일일 테고.”

원예는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태도는 변함없고, 표정도 달라진 것은 없으나 그녀의 눈을 보며 진무린은 알 수 있었다.

“불편하면 억지로 말할 이유는 없어.”

“벽계는 강호의 무공으로 감당할 곳이 아니에요. 도대체 공자의 무공이 얼마나 발전하셨기에 벽계와 구주를 알아보시는지 소녀는 그것을 먼저 알고 싶어요.”

“하후도를 상대로 보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드러내기 싫은 검법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면 반 시진 안에 쓰러트릴 수준이라고 보면 적당할 거다.”

진무린의 설명을 들은 원예가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발전하신 것은 짐작했는데 벽계의 인물을 감당할 정도인 줄은 정말이지 생각조차 못 했네요.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말씀드리기 위험해요.”

“위험?”

“네. 위험해요.”

진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공을 물어봤으니 진무린의 경지를 익히 짐작할 원예였다. 그런 진무린이 경계하는 데도 누군가의 귀를 의심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어디가 안전한 곳이지?”

“귀혼곡이요.”

“다른 곳은 전혀 안 되는 건가?”

“은천문이라면 가능하겠네요.”

출입자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그 이후에도 진법으로 가려진 곳이 아니라면 무조건 위험하다는 의미였다.

“벽계의 인물이 그토록 강호에 많이 있나?”

원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더는 질문해도 답을 주지 않겠다는 표시처럼 보였다.

글로 주고받는 것도 안 되는 건가?

진무린이 기운으로 주변을 감쌀 수도 있는데?

감정 하나둘은 눈으로 주고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벽계와 구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하지. 먼저 모산에 들러야 하고, 이어 본문으로 향할 생각이니까.”

“출발은 언제로 생각하세요?”

“오늘 오후에 정아를 한 번 더 살펴주고 바로.”

답을 들은 원예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강호에서 귀가 달린 무인치고 마교의 교주 정동추가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다는 소문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혹자는 교주 자리를 노린 수하들이 독을 먹인 탓이라고 하고, 마천강기를 익힌 부작용으로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게 죽기 직전이라는 정동추가 뒷짐을 지고 태산을 느긋하게 돌아보았다.

굳이 내보이지 않아도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는 것은 물론이요, 범처럼 치켜 올라간 눈 끝은 고리처럼 휘었고, 코와 입술, 턱선까지 위엄이 줄기줄기 서려 있었다.

독에 당하거나 주화입마에 빠지기는커녕, 지금 그의 모습은 절대자의 풍모, 그 자체였다.

하얗게 얼어붙은 태산을 돌아보던 정동추의 뒤로 젊은 무인이 진중하게 서 있었다.

정동추와 비슷한 체격에 다부진 인상을 지녔는데 우직함은 보이나 영특하지는 않은 눈빛이었다.

“지금 강호에서 단일 세력으로 가장 강력한 집단을 꼽으라면 본교와 은천문이다. 사투를 벌이면 양패구상쯤 되겠지.”

“은천검법과 섬전검법이 본교의 원로와 장로들에게 퍼졌습니다. 그렇다면 본교가 월등히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답을 들은 정동추가 한심하다는 투로 뒤를 돌아보았다.

“멍청한 놈. 검법이 어디 형과 식만 알면 바로 내 것이 되더냐. 손에 익고 눈에 담으려면 적어도 한 해는 필요할 게다. 대제자라는 놈의 생각이 그리 짧으니 셋째가 너를 만만하게 보고 이 난리를 피우는 게 아니냐.”

“송구합니다, 교주.”

섬도곤이 급히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서야 정동추는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그래. 그 잘난 내 셋째 제자라는 놈은 뭘 하고 있느냐?”

“그날 이후로 객잔에서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구철환은?”

“남굉모 일행을 뒤따르는 중입니다.”

“에이, 천하에 쓸모없는 것들. 뒤에서 모사를 꾸미려면 철저하기라도 하든가. 마선이절과 흑랑대를 동원하고도 고작 화산에서 목숨을 구걸해 도망쳤다니 낯이 화끈거려서 살 수가 있나.”

정동추가 답답한 속을 털어놓은 직후였다.

“제자가 가서 놈의 척추를 뽑아올까 합니다.”

섬도곤이 각오를 냈고, 그 말에 정동추가 가볍게 웃었다.

“말만 들어도 속이 시원하다만, 너는 계속 몸을 감추는 게 좋아. 이참에 구정봉에게 마음이 기운 늙은것들을 모조리 정리하지 않으면 뒤가 지저분해진다.”

바람이 거세진 것을 돌아보느라 정동추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문제는 진무린이라는 아이가 워낙 뛰어나다는 것이다.”

“제자를 보내주시면 양쪽 모두의 목을 척추째 뽑아 가져오겠습니다.”

섬도곤이 다부진 각오가 재차 나온 직후였다.

정동추가 고개를 돌렸는데 그의 눈꼬리가 섬뜩할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저 교주께서 마음 쓰시는 것이 안타까워 말씀드렸습니다.”

“흐음.”

쓴 입맛을 다신 정동추가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무린이란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호북 상등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놈을 불러라.”

“예, 교주.”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정동추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섬도곤이 얌전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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