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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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12화
은천검제
제112화
예상보다 워낙 빠른 도착인 데다, 그것도 동이 튼 직후였다.
진무린과 백면호리가 민가에 들어서자 마당 가운데 서 있던 요정이 놀라 고개를 돌렸고, 대청 앞에 앉아 있던 원예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자.”
그녀의 눈가에 미소가 매달리는가 싶었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는 그 짧은 순간에 원예는 감정을 완전히 숨긴 표정이었다.
홍화루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내는 모습 중 하나이리라 짐작한 진무린은 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눈인사를 건넨 진무린은 마당에 서 있는 요정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 대협. 요정이 인사드립니다.”
“그렇게 딱딱할 게 뭐 있어. 아저씨란 뜻으로 숙부라 부르면 편하지.”
“그래도 돼요?”
시선을 돌린 요정에게 원예와 백면호리가 차례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전 수련이냐?”
“예. 아침 전에 초식을 연습해요.”
진무린은 기특하다는 투로 요정을 바라보았다.
들어서면서 알았다.
확실히 요정은 내공의 운용을 익힐 단계였다. 또한, 이 시기에 잘못되면 훗날 원예와 같이 고비를 맞을 수도 있었다.
이리 발전하려면 재능도 필요하지만 가르치는 이의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주. 무리한 청을 흔쾌히 받아주어 고맙다.”
“공자께서 도인을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더는 발전이 없을 테니 그리 큰 도움은 아니에요.”
원예의 대꾸는 짐작했던 딱 그 수준이었다.
“정아의 수련을 지켜본 뒤에 내공의 운용을 살필까 하는데 괜찮나?”
“그렇게 서두를 일은 아니에요. 너무 무리하실 필요도 없고요.”
답을 건넨 원예가 백면호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저 정도로 지쳤는데 무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보였다.
“다음 수련은 언제지?”
“반 시진 정도 초식을 수련한 뒤에 아침을 들어요. 지금은 우선 초식을 살펴보시고 식사를 마친 뒤에 내공을 돌봐주시면 어떻겠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진무린의 답을 들은 원예는 노복을 불러 의자 두 개를 가져오게 했고, 두 사람분의 아침을 더 준비하라 일렀다.
“공자께서 보실 수 있게 초식을 펼쳐라.”
“예, 사부님.”
또랑또랑 답한 요정이 자세를 잡고, 소수음공의 초식을 차례로 펼쳤다.
독수리의 발톱처럼 손가락을 구부린 요정이 쭉 편 팔을 길게 휘두른 뒤에 방향을 틀며 훌쩍 한 걸음을 나설 때였다.
‘잘하는 거지? 괜찮은 수준 맞지?’
의견을 듣고 싶은 백면호리가 연신 눈치를 살피는 데도 진무린은 요정이 펼치는 동작에 집중했다.
표충량에 비해 아쉬운 점이 있었으나 진무린이 짐작했던 재능임은 틀림없었다.
다만, 표충량은 따로 일러주지 않아도 몸이 내공을 도인할 정도여서 강호 전체를 통틀어도 그만한 재능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라면 요정은 부족한 재능을 강단으로 메워 발전한 형태였다.
당장은 표충량과 요정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재능에 강단을 더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러나 서너 해가 흐르고 나면 표충량이 확실하게 앞설 것은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큼큼.”
진무린이 말없이 바라보자 백면호리는 궁금하고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루주. 정아의 초식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공자께서 그리해주신다면 정아에게 좋은 일이겠지요. 너는 어서 공자께 배운 것을 다시 한 번 보여드려라.”
“예, 사부님.”
요정은 직전에 보였던 초식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반복했다.
여전히 당찬 움직임이었다.
이때 진무린은 엷게 기운을 내 민가 주변을 살피는 한편, 그 안에서 요정의 운기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마침내 초식을 마친 요정이 숨을 고를 때였다.
“언제 저렇게 늘었누.”
백면호리의 혼잣말이 진무린을 불렀다.
“훌륭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발전이었고. 무엇보다 수련을 게을리 않은 것을 보아서 그것이 가장 기쁘다. 내공의 운용은 아침을 먹은 뒤에 살펴줄 테니 그리하자.”
“감사합니다.”
진무린의 칭찬이 자랑스러웠는지 요정은 밝은 표정으로 백면호리를 돌아보았다.
“너는 이만 들어가 아침을 먹고 부르면 오너라.”
“예, 사부님.”
원예의 지시를 받은 요정이 훌쩍 귀여운 아이로 변해 백면호리를 향해 달렸다.
“아빠!”
“그래. 아빠가 우리 정아를 위해 진 대협을 모셔왔잖아. 아침 먹고 내공의 운용까지 익히면 이제 고수가 되는 기틀을 마련하는 게지.”
부녀가 반가운 얼굴로 방으로 향하자 초상화에 담긴 여인처럼 의자에 앉았던 원예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자께서는 이쪽으로 오세요.”
몸을 돌린 그녀는 백면호리와 요정이 들어간 맞은편 방으로 진무린을 안내했다.
방에 들어선 진무린을 기다리는 것은 채소와 고기를 볶아놓은 요리 두 가지, 죽과 만두, 그리고 두부 요리였다.
“앉으세요, 공자.”
진무린이 둥근 탁자에 앉자 원예가 맞은 편에 자리했다.
“가까이 계셨었나요? 예상보다 워낙 일찍 도착하셔서 살짝 당황했어요.”
“화산이 가깝다고 하기는 어렵지.”
그 먼 거리를 이렇게나 빨리 달려왔다고?
그사이 또 발전한 건가요?
궁금한 눈빛이었으나 원예는 질문하지 않았다.
“드세요.”
식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원예가 진무린에게 식사를 권했다.
왜 요정을 가르치라 했는지, 어째서 이리 급하게 달려왔는지 물을 법도 하련만, 원예는 여전히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하게 죽을 떠 입에 넣었고,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접시에 요리를 옮겨 담았으며, 만두를 집어 들며 식사에 집중했다.
식사 도중에 원예가 알지 못할 눈빛을 짓곤 했는데 젓가락을 내려놓은 진무린이 시선을 들 때면 거짓말처럼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죽을 떠 넣은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안 보려고 해도 시선이 이미 가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원예는 평소처럼 냉정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자리인 만큼 반가운 기색쯤 보여주어도 좋으련만, 요정을 가르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듯 차가운 모습이 전부였다.
이각쯤 걸린 아침 식사는 그렇게 뭔가 모를 아쉬움과 서운함을 남긴 채 끝났다.
원예가 탁자에 올린 오른손의 검지를 두 번 두드리자 시비들이 들어와 그릇을 치웠고, 이어 차를 올려주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신 듯 보여요.”
“내 속이 보이나?”
“눈빛이 그랬어요.”
가볍게 웃은 진무린은 먼저 차를 마신 뒤에 시선을 들었다.
“이야기가 길어. 혈교가 이곳을 노리지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그건 아닌 듯싶어 다행이고.”
“혈교라고 하셨나요?”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 점이 염려돼서 최선을 다해 달려온 길이다. 백면호리가 간절하게 바라는 일이니 먼저 정아를 봐주기로 하고, 그 뒤에 시간을 부탁해.”
“소녀가 답을 안 할 수도 있어요.”
“루주가 내 수하도 아니고 당연히 거절할 수 있지. 가벼운 질문이 아니기도 하고.”
입술만으로 옅게 웃은 원예가 말을 이었다.
“천하영웅대회는 들으셨겠죠?”
진무린은 고개만 끄덕였다.
“정도맹 맹주께서 가신들만 데리고 맹을 나섰어요. 행선지, 기간, 모두 미정으로 남기고요. 심지어 비월단이 염탐하는 것을 발견하면 해당 단원과 단주의 목을 자르겠다는 경고도 하셨고요. 그건 알고 계세요?”
진무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산에 들어가기 전에 암연을 만났으나 이곳으로 오는 동안 접촉한 적은 없으신 거네요.”
“그게 그렇게 되나?”
진무린이 반문한 직후였다.
“바뀐 모습이 훨씬 좋아 보여요. 어느 분이 만들어주셨는지 몰라도 외포 역시 잘 어울리고요.”
진무린의 외포와 천에 감은 검을 살핀 원예가 시선을 들었을 때였다.
“어흐! 배부르다! 딱 적당하게 먹었더니 소화가 다 된 것 같네!”
무공 지도를 독촉하는 백면호리의 음성이 방으로 달려들었다.
“정아를 봐주고 시간을 부탁해.”
“지켜봐도 되겠죠?”
“사부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몸을 일으키는 진무린을 따라 원예가 움직여서 두 사람은 마당으로 나섰다.
**
새벽같이 깨어난 운진은 짓이겨진 검지와 중지를 감싸며 고통에 신음했다.
시커멓게 굳은 피가 흉측하게 찢어진 상처에 덩어리져 달렸는데, 손가락을 조금이라도 꿈틀할라치면 그 사이로 새빨간 피가 새어나오며 끔찍한 통증이 몰아쳤다.
겨우 일어난 운진은 먼저 눈빛을 확인해서 붉은 기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경계를 서는 제자를 불렀다.
“밖에 있느냐?”
제자를 부른 운진은 금창약을 찾았고, 이어 약을 바른 뒤에 상처를 꽁꽁 싸맸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제 그자의 술법이 워낙 괴이해 이리되었다. 어린 제자들이 놀라지 않도록 너는 이 일을 입에 올리지 마라.”
적당하게 말을 돌린 운진은 먼저 옷을 갈아입었고, 잠자리와 바닥에 번진 핏자국을 수습했다.
사위가 어슴푸레 밝아질 때 운진은 마흔 중반의 제자를 조용하게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오냐. 거기 앉아라.”
진무린이 모산을 방문했을 때의 일을 모두 지켜보았던 제자요, 운진이 자리를 비울 때 모산을 맡겼던 제자였다.
“내가 지난밤에 석 장의 부적을 뿌린 덕분에 그자는 당분간 본파를 노리지 못한다.”
이때 운진은 마치 등선하기 직전인 것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이었다.
“너는 이것을 받아 간직해라.”
운진은 소매에서 석 장의 부적과 기괴한 형상의 새가 고어를 떠받친 문양의 옥패를 제자 앞에 놓았다.
“문주?”
“부적은 지니고 있다가 혹여 본산이 위기를 맞으면 차례로 찢어라. 다만, 그 부적을 찢을 때 제자들은 반드시 어제 내가 앉았던 안쪽에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부적을 설명했음에도 제자는 답을 하지 못했다.
“너에게만 실토하마. 어제 술법이 과해 하마터면 제자들의 피를 구하는 흡혈귀가 될 뻔했다. 혹여라도 발작이 또 일어난다면 통제할 이가 없으니 지금은 내가 산을 내려가는 것이 최선이다.”
“진 대협이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비록 산을 내려가시더라도 돌아오시면 되실 일에 어찌 문주의 징표를 두고 가십니까?”
“혹여 내가 강호에 나가 발작을 일으키면 이는 무림공적에 해당하는 흉악한 죄다. 이 패는 그때를 대비한 것이니 너는 나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되거든 이 패를 보이고 진즉 파문했노라 말해 본파의 명맥을 유지해라.”
눈물을 흘리느라 답을 하지 못하는 제자를 향해 운진은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묘를 다스리지 못한 죄가 이리 크고 깊다. 나는 능력껏 진 대협을 찾아 몸을 다스릴 참이니 너는 내가 없는 동안, 본산을 잘 살피도록 해라.”
혹여라도 어린 제자들을 보게 될까 두려운 운진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몸을 일으켜 거처를 나섰다.
눈물을 비 오듯 쏟는 제자 한 명의 배웅이 전부였다.
왼편 어깨에는 불진을 걸쳤고, 목검을 허리에 건 운진이 막 동이 터오는 모산의 계단을 내려섰다.
한참을 걸어 내려온 운진은 과거 진무린을 처음 마주했던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돌려 햇살을 가득 품은 모산을 바라보았다.
양묘가 그렇고, 혈교는 말할 것 없어, 동남의 피를 마시고, 사람을 제물로 삼아 술법을 부린다.
마지막이라 버티던 운진마저 돌이키지 못할 길에 들어섰으니 강호에서 악한 술법을 없애는 것이 그나마 하늘이 주신 소임이리라.
무릎을 꿇은 운진은 모산을 향해 아홉 번의 고두배를 올렸다.
“하늘이 이 미욱한 사람에게 모산의 문주를 맡기신 뜻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제자는 이 길에서 혈교와 함께 사라져 다시는 술법을 핑계로 다른 이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고한 운진은 몸을 일으켰고, 강호를 향해 외롭게 걸었다.
**
진무린은 요정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섰다.
“내가 소수음공의 초식을 제대로 알지 못하나 하나는 알겠다. 이는 옥녀검법과 같아 움직임의 결에 따라 다른 모습이 나온다. 잠시 보아라.”
검을 마당의 옆에 세워놓은 진무린은 정아가 보는 앞에서 식사 전에 보았던 초식을 펼쳤다.
두 번 본 것을 바탕으로 펼치는 소수음공이었다.
허공을 가르는 소매에서 바람 소리가 요란했고, 구부린 손가락을 내려칠 때면 바닥에서 흙먼지가 올라왔는데 이때 진무린의 모습은 흡사 흉신악살처럼 흉악한 모습이었다.
커다랗게 양팔을 휘두른 진무린이 몸을 돌리며 자세를 바로 세웠다.
원예는 태연했으나 요정과 백면호리는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앞에 보았던 것을 기억하지?”
“예.”
겁에 질린 대답이었다.
그러나 무공이 성격에 맞는지 요정은 진무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시 보여줄 테니 이번에도 눈에 담아둬.”
요정에게 말을 건넨 진무린은 앞에 펼쳤던 동작을 재차 보였다.
똑같이 구부린 손가락을 내밀고, 길게 편 팔을 휘두르면 한순간, 찍고, 당기고, 할퀴고, 파고드는 동작이 연달아 펼쳐졌다.
그러나 지금 진무린의 모습은 앞과 전혀 달랐다.
직전의 모습이 흉신악살의 폭주라면, 지금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이 부드러운 봄바람을 당기고 밀쳐내 적을 제압하는 느낌이었다.
늘 냉정하던 원예가 감탄하는 얼굴로 지켜보았고, 백면호리는 ‘오!’ 하는 모양으로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몰랐다.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는 부드럽게 펄럭이는 깃발처럼 듣기 좋았으며, 요란하게 일어났던 흙먼지는 바닥에 깔려 넓게 밀려났다.
요정이 눈 한 번 끔벅이지 못한 상태에서 소수음공의 초식을 마친 진무린은 자세를 바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