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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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11화
은천검제
제111화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다 같은지 기혈이 엉켜 낯빛이 하얗게 변하고도 백면호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언제 술법의 기운이 달려들지 몰라 조심하던 참이라 경공을 펼치는 도중에도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피를 토하기 직전에 다다른 백면호리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경계하던 기운을 돌린 진무린은 공력의 일부를 백면호리에게 전해주었다.
언덕을 뛰어 내려가는 길이었다.
머리칼과 세 갈래 수염이 바람에 세차게 휘날리는 백면호리가 놀란 눈으로 진무린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감동과 놀라움, 그리고 고마움이 가득한 직후였다.
“히익!”
백면호리가 비명을 질렀고, 그 순간, 진무린은 곧바로 팔을 뻗었다. 삽시간에 백면호리의 뒷덜미를 붙든 진무린은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피해 몸을 높게 솟구쳤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한눈을 팔았던 백면호리는 바위에 부딪혀 납작하게 찌부러질 뻔했다.
“정신 차려!”
“놀라서 그랬어! 이거 진 대협이 주는 공력이지!”
말은 필요 없었다.
탄력을 받은 백면호리가 더욱 무섭게 내달렸고, 진무린은 묵묵하게 그의 곁을 함께 달렸다.
“진 대협!”
달리는 도중에 백면호리가 진무린을 불렀다.
아까의 상황에 놀랐는지 지금은 아예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부른 참이었다.
“정아만 지켜줘! 조금 전 나를 살폈던 것처럼! 내 평생 진 대협의 수하 노릇을 하래도 다 할 테니까!”
진무린의 침묵이 의아했는지 백면호리가 결국 힐끔 시선을 주었다가 얼른 앞으로 향했다.
“수하 따위 필요 없어. 그렇지만, 죄 없는 아이가 억울하게 당하는 일을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
몸을 높게 솟구친 두 사람은 정상 근처의 바위를 밟고는 절벽 아래로 함께 뛰어내렸다.
“좋겠다! 무공이 높아서!”
얼핏 들으면 빈정대는 소리 같았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부러움이었다.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지 못한 아쉬움도 가득했다.
**
오랜 시간 고민했던 황종관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조용하게 강호의 정세를 파악하고 돌아올 참이다. 기한과 장소는 미정이고, 황가의 가신들과 따로 움직일 테니 호위 무인들을 포함한 어떤 자도 따라오지 마라.”
부관에게 지시를 내린 황종관은 이어 비월단의 단주 윤고상을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잠시 맹을 비울 생각인데 출발 전에 한 가지 지시할 것이 있어 불렀네.”
맹을 비운다는 말에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윤고상은 그에 관한 질문을 내지 않았다.
“소림과 무당을 지켜보는 일이 두려워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했었지? 내가 맹을 나선 이후로 비월단의 그 누구라도 내 행적을 살피는 기척이 보이면 먼저 그자의 목을 벨 것이고.”
구대문파에 대항할 세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무인으로 놓고 본다면 황종관은 절대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었다.
“단주인 자네가 몰랐다는 핑계나 다른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마주쳤다는 변명 따위 안 통한다는 것을 알아두게. 자네가 알았든, 몰랐든 나는 자네의 목도 자를 생각이니 비월단은 이 시간부터 행동을 조심하게.”
말을 전한 황종관은 몸을 일으켜 한쪽에 올려두었던 도를 잡았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런데 왼팔을 뻗어 도를 잡은 황종관이 매서운 눈빛으로 윤고상을 돌아보았다. 도를 쓰는 사람답게 황종관은 그동안 눌러두었던 거친 기운을 뿜어냈고, 표정 또한 거칠 것이 없었다.
“대답이 없는 것은 내가 너의 목을 못 자를 거라 생각해서냐?”
“그런 것이 아니라 뜻밖의 말씀에 당황해서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말투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눈빛은 당장 목을 자르고 남았다.
“윤고상 단주.”
“예, 맹주.”
“내가 맹주를 맡은 것은 강호의 평화에 일조하겠다는 협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도를 꺼내 든다면 나 또한 무인이고, 상대가 누구라도 양보할 마음 없다. 그러니 내가 한 말을 명심해서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
“알겠습니다.”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한지 윤고상은 고개마저 숙이며 황종관의 경고를 받았다.
“다시 말한다. 단원이 나를 살피는 일을 몰랐다는 변명 따위 생각도 하지 마라. 다른 곳을 조사하는데 우연히 내가 그곳에 나타났다는 핑계도 잊어라. 실제로 그랬다고 해도 그 대원과 너는 목을 잃는다.”
윤고상은 대답조차 못 한 채 마른침만 삼켰다.
목을 자를 것을 봐준다는 투였다.
윤고상을 보며 옅게 웃은 황종관이 책상을 비켜 집무실을 나섰다.
**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 진무린은 백면호리를 불러 산의 중간쯤에 내려섰다.
경공은 내공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 백면호리가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거칠게 피어났다.
“심법이 있지?”
진무린의 질문에 백면호리가 시선만 주었다.
“반 시진 가량 운기해. 그 뒤에 다시 달린다.”
“그러지.”
주변을 둘러본 백면호리가 적당한 장소에 앉아 운기를 시작했고, 진무린은 그의 곁에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술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염탐이라 생각되지만, 그렇더라도 저들이 움직인다는 증거로는 충분했다.
남은 것은 언제, 어느 곳에서 시작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진무린은 시간에 비해 높게 올라온 달을 보며 운진을 떠올렸다. 술법을 사용하는 모산 역시 혈교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까닭이었다.
‘상등에 들렸다가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것과 별개로 운진과 모산의 안위가 염려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밤이 되며 운진은 거처를 나와 모산을 오르내리는 계단의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는 동서남북의 사방에 커다란 깃발과 등을 세웠고, 가부좌로 앉은 앞쪽에 향을 피웠는데 제자들을 모두 그의 뒤에 앉혔다.
추운 날이었다.
아무리 모산의 삶에 적응했다고 해도 밤이 되며 덮치는 추위와 바람은 뼈가 시릴 정도여서 나이 어린 도사들은 몸을 덜덜 떨었다.
“사라나 다라 마바하 훔.”
주문을 외운 운진이 부적 한 장을 집어 하늘로 던진 직후였다.
그토록 제자들의 몸뚱이를 파고들던 바람이 일순간에 사라졌고, 봄날의 오후인 듯 따뜻한 기운이 주변을 감쌌다.
운진의 수염과 도사복, 깃발과 등은 바람에 거칠게 움직이는데 뒤에 앉은 제자들은 봄날을 즐기는 것처럼 평온하니 실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너희의 고초를 이해해 술법을 펼쳤으나 이는 작은 눈속임일 뿐, 어찌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느냐. 술법은 도를 구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이지, 그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되느니.”
운진이 나직한 말로 제자들을 일깨웠다.
양묘로 인해 처참하게 수자들을 잃었던 모산이었다.
혈교의 술법이 의심된다며 운진이 급히 만든 자리임을 깨달은 나이 있는 도사들이 자세를 바로잡았고, 그중 한 명이 나직하게 도덕경을 읊었다.
반 시진쯤 지났을까.
거칠게 나부끼는 깃발과 흔들리는 등불 안에 앉아 있던 운진이 양팔을 높게 들었다.
또다시 놀라운 광경이 이어졌다.
그의 주변에 켜놓은 네 개의 등이 둥실 떠올랐고, 뒤늦게 떠오른 깃발이 그 사이에서 펄럭였다.
그 직후였다.
“나를 불러내다니 모산의 재주가 제법이로구나!”
운진이 마주한 방향에서 산 만큼이나 거대한 얼굴이 피어나 감탄을 터트렸다.
검은 안대로 왼쪽 눈을 가린 남자의 얼굴이었다.
쭈글쭈글 주름이 가득한 그는 머리를 풀어헤쳐서 산발이었고, 오른쪽 눈은 붉었으며, 턱에 닿을 정도로 귓불이 길었다.
“그대가 문주 운진이냐?”
“그렇소.”
“그대의 능력이 아까워 한 가지를 제안하마. 앞으로 삼백 일 동안 모산은 외부출입을 하지 마라. 그 약속을 지킨다면 모산은 무사하리라.”
넉넉한 제안이었는데 운진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대가 산을 비우면 나는 그대의 제자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그대가 자칫 오판한다면 강호에서 모산은 그 명맥을 잃은 것이요, 자취를 감출 것이다. 명심해라. 산을 나서는 순간, 그대의 제자들은 모두 죽는다.”
말을 마친 노인은 오른쪽의 붉은 눈을 들어 운진의 뒤에 있는 제자들을 천천히 살폈다.
“흠흐흐흐흐. 흠흐하하하.”
그가 기괴한 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하아-앗!”
천둥 같은 고함과 함께 운진이 부적을 세차게 뿌렸다.
화륵! 화륵! 화르륵!
세 장의 부적은 곧바로 불길로 변해 화살처럼 날았는데 그 직후에 노인의 얼굴이 훅 사라졌다.
툭툭, 소리를 내며 등불과 깃발이 땅으로 떨어졌고, 운진의 뒤에 있던 제자들에게 추위와 바람이 거세게 달려들었다.
“문주!”
휘청하는 모습을 본 제자가 달려들어 부축했을 때, 운진은 어쩐 일인지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어린 제자들을 방으로 보내되, 네 명이 경계 서는 일을 멈추지 마라. 급하다. 나를 빨리 부축해 거처로 옮겨라.”
운진의 지시였다.
그를 부축해 거처로 향한 제자들이 급히 자리를 살핀 뒤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아이들은?”
“모두 방으로 들였습니다. 경계도 소홀하지 않으니 문주께서는 염려를 놓으시고 몸을 살피십시오.”
나이 있는 제자의 말에 운진은 고개를 반대로 돌린 채 나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문주의 명이다.
그를 부축했던 제자 셋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거처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간 직후였다.
“크흑!”
비명을 토해낸 운진은 도사복의 앞섶을 움켜쥐며 상체를 일으켰다.
“끄윽. 피……. 피를…….”
그가 어린 제자들이 있는 거처를 노려보았는데 놀랍게도 직전에 나타났던 노인처럼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내가 질 것 같으냐.”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입에 문 운진이 독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나온 직후에 운진은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진 대협. 노도는 지지 않았소.”
잠꼬대처럼 겨우 흘려낸 혼잣말이었다.
그의 왼손 검지와 중지에서 새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는데 쓰러진 운진은 이제야 편안한 얼굴이었다.
**
잠시 쉬었던 진무린은 백면호리와 밤을 새워 달렸다.
고작 반 시진씩 두 번 쉰 것이 다여서 백면호리는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정도로 지친 모습이었는데 해가 뜨기 직전에 두 사람은 소능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수없이 경공을 펼치고, 온갖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이 정도로 빨리 달려본 적은 처음이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내뱉은 백면호리가 지친 기색으로 홍화루와 민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안심해도 되는 거 맞지?”
진무린은 고개만 끄덕였다.
누군가 침입했거나 일을 벌였다면 소능산에서 바라보는 홍화루와 민가가 이토록 평화로울 수는 없었다.
“진 대협.”
진무린은 나직하게 부르는 백면호리를 돌아보았다.
“나야 내 딸이니까 죽기 살기로 달린다지만, 진 대협은 왜 이럴까 하고 달려오는 동안 내내 생각했었거든. 정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이라면 내가 이렇게 달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볼이 홀쭉해졌을 만큼 지친 백면호리가 상등에게 말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지?”
말끝에서 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백면호리가 시선을 주었다.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럼 이유도 없이 이렇게 달렸다고?”
진무린은 옅게 웃은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이라서 이러는 거라고 하자. 뭐가 잘못이고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아는 사람. 누군가 악행을 저지르는데 내 한 몸 지킬 수 있다고 그냥 지켜볼까? 아니면 나서서 막을까?”
“에이.”
이유를 알기 어려운 짜증을 토해낸 백면호리가 민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공이 강하니까 할 수 있는 대답이지. 나 같이 무공이 없는 사람은 그저 도주할 수밖에 더 있어?”
“그렇게 해.”
홱 고개를 돌린 백면호리를 향해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살기 위해 피하는 거라면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 뭔가를 더 얻으려는 욕심으로 악한 인간 편에 서지 마. 그럼 나 같은 인간을 만나게 돼.”
백면호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을 때였다.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며 상등의 모습이 후련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사부님께 들었다. 왜 도적이 됐는지. 이후로 한 번이라도 더 도적질을 하면 정말 발목을 잃게 될 거다.”
“왜 말이 그렇게 흘러.”
“정아가 소수음공을 제대로 익히면 그걸 악행에 사용할지, 정의로운 일에 사용할지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정아를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
진무린의 눈빛과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본 백면호리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능력을 지니면 반드시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온다. 악행을 택하면 나 같은 사람을 만날 테고, 선행을 택하면 악인을 상대해야겠지. 그런 선택이 두렵다면 아까 말했던 대로 다른 곳으로 가. 가서 조용히 살아.”
진무린의 조언에 대한 백면호리의 첫 번째 반응은 무거운 한숨이었다.
“숨어 지낼 수도 있잖아.”
“소수음공 정도 되는 무공을 익히면 세상이 그냥 두지 않아. 능력을 얻는 것은 그런 거야. 경공을 얻은 백면호리가 숨어 지내지 못한 것처럼.”
환하게 밝은 상등을 바라보며 백면호리는 대꾸가 없었다.
“이제 가보자.”
“그러지.”
잠시 뒤에 진무린이 몸을 날렸고, 백면호리가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