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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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10화
은천검제
제110화
아침을 맞은 진무린은 가장 먼저 은혼을 찾았고, 이어 소등각에 온 손님을 설명했다.
“장문인. 어제 저를 찾아온 이가 사실은 강호에서 가장 보기 힘든 인물 중 하나로 백면호리라 합니다.”
별호는 있으나 실체를 본 사람이 드물다는 이가 바로 백면호리 아니던가. 게다가 그는 도적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원체 진중하던 은혼이 놀란 얼굴을 돌리는 것으로 내용을 재차 확인했다.
“화산에 그가 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누를 끼칠 수 있으니 굳이 소개하지 않고 출발할까 합니다.”
“진 대협께서 만나는 분입니다. 굳이 피할 필요야 있겠습니까. 공식적인 방문이 아닌 것으로 처리하면 큰 무리는 없으리라 여깁니다.”
진무린의 체면을 고려한 은혼은 끝내 소등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주. 백면호리입니다.”
“진 대협 덕분에 이 사람이 안목을 크게 넓힙니다. 반갑소. 화산의 장문인 은혼이오.”
“나야말로 화산의 장문인을 뵈었으니 이제라도 좀 더 바르게 살도록 노력하겠소.”
은혼은 진무린에게 성의를 보여 반갑고, 백면호리는 화산의 장문인을 알게 된 것을 기뻐하는 터라 두 사람 모두 만족한 인사였다.
“진 대협. 이곳에 준비할 테니 아침을 함께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문주께서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두나 사파의 우두머리도 아닌 데다 이후로 좀 더 바르게 사신다는 분이 아닙니까?”
“백면호리만 괜찮다면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화산의 장문인과 함께하는 식사를 거절할 사람이 있나? 나야 진심으로 영광이지.”
말끝에 끼어든 백면호리 덕분에 짧은 웃음이 있었고, 세 사람은 그렇게 함께 식사했다.
“마교를 찾아가는 일은 언제쯤으로 계획하십니까?”
“천하영웅대회가 석 달 뒤로 잡혔으니 그 전에 찾아볼까 합니다. 강시술과 잠력대법, 폭렬공을 유출한 것은 물론이고, 풍령관과 동조하여 청강 진인을 해한 죄를 분명하게 물을 것입니다.”
“화산은 진 대협과 함께할 수 있도록 힘을 기르는 데 최선을 다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부드럽고 낮은 음성이었는데 백면호리가 함부로 끼어들기 어려울 정도로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단단했다.
아침을 마친 진무린은 은혼과 함께 움직여 표충량을 찾았다. 이때 기다렸다는 것처럼 문혼과 장로들이 모두 나와 진무린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별것 아닌 모습이나 화산이 얼마나 진무린을 존중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사부 은혼과 사숙들, 그리고 화산의 원로들이 쭉 선 자리였다. 그런 탓에 표충량은 아쉬움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하고도 진무린에게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지 못했다.
“멀지 않은 날에 다시 오마.”
“강건하십시오, 진 사숙.”
많은 것을 담은 짧은 인사를 마친 진무린은 배웅 나온 이들에게 차례로 작별을 고한 뒤에 마침내 소등각을 향해 움직였다.
시간 끌 것 없었다.
기다리던 백면호리와 함께 움직인 진무린은 소등각의 앞쪽 절벽을 향해 걸어가 곧바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백면호리 또한 경공으로는 뒤지기 싫어하는 인물이라 주저하지 않고 아래로 떨어져 내리니 소등각을 지키던 화산의 제자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공을 발휘해 달리는 길이었다.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악착같이 달렸는데도 백면호리는 단 한 순간도 진무린을 앞서지는 못했다.
한 시진쯤 달린 뒤였다.
적당한 곳에 내린 진무린이 고개를 돌렸을 때 경공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는 백면호리의 눈가가 무리한 탓에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뭐야?”
“뭘 말하는 건지 알아야 답을 하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숨겨 놓았던 영약을 줄줄이 먹은 것도 아닐 테고, 못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경공이며, 기도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어? 뭐야?”
날카로운 백면호리의 질문이었다.
그에게 굳이 양소소의 일을 말할 것은 아닌 듯싶어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좋지 않아? 내가 얻은 게 많으면 정아에게 줄 것도 많은 건데?”
“그게 그렇게 되…지! 그렇지! 흐캬캬!”
잠시 쉬며 숨을 돌리던 진무린이 날카로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 봐. 내가 말한 뭔가 있지? 그렇지?”
진무린은 대꾸하지 않은 채 등룡창천의 기운을 넓게 펼쳤다.
걸리는 것은 없었다.
마치 어부가 던진 투망을 피해 재빠르게 움직인 물고기처럼 진무린이 펼친 기운은 결정적인 뭔가를 잡아내지 못했다.
마선 구철환이 따라붙었다 해도 이렇게 빨리 빠져나가지는 못한다.
“걸리는 게 없어?”
눈치 하나는 자연의 경지를 넘어선 백면호리의 질문이었다.
“확실히 수상하긴 한데?”
“그렇지?”
진무린의 대꾸에 백면호리가 모처럼 심각한 얼굴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일단 경공을 펼치면서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보자.”
“그러지.”
진무린이 발을 굴러 경공을 펼쳤고, 백면호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누가 뭐래도 경공에서 뒤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
모산의 문주 운진은 낮에는 도덕경과 도가의 서적을 읽고, 밤이면 가부좌로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는 명상을 통해 도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려 매달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깨달음은 다가오지 않고, 원하지 않는 도력만 늘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이 또한 과정이리라.
도를 통한다는 것은 하늘과 세상의 원리를 인간이 얻는 것이니 그것이 어찌 한순간에 이뤄지길 바라고, 순탄하기를 고대하랴.
문주가 깨달아야 제자들을 가르치리라는 사명감도 있었다.
모산을 새롭게 일으키는 것은 술법과 부적이 아니라 도를 제대로 깨달아 전하는 것이라 확신한 운진은 그 어떤 현상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명상에 몰두했다.
그토록 치열하게 도를 구하는 운진에게도 떨치지 못한 세속적인 욕망이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진무린을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도덕경을 덮는 순간에, 그리고 짧은 하루해가 넘어가 어둠이 깔릴 때면 운진은 하늘을 향해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진무린을 떠올렸다.
‘잘 지내시오?’
술법을 부려서라도 그의 모습을 한 번쯤 보았으면 싶었다.
피의 술법을 행하고도 무탈하게 이리 도를 구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모산이 이나마 견디게 된 것 모두 진무린의 덕이 아니던가.
양묘의 일을 그리 마무리 지어주지 않았다면 오늘 모산은 당시 진무린의 말마따나 강호에서 사라지고 남았다.
“문주. 차를 가져왔습니다.”
진무린을 떠올리던 운진의 생각을 어린 도사가 깨웠다.
“들어오너라.”
“예, 문주.”
오전을 마치고 점심 전에 즐기는 차였다.
헐거운 듯 약간 큰 도사복, 틀어 올려 묶었으나 아직 익지 않아 어색한 머리, 그리고 여물지 않은 목과 볼, 차를 놓아주는 어린 도사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얘야.”
“예, 문주.”
그러나 운진이 불러 고개를 든 어린 도사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술법이구나!’
께름칙해서 불렀다.
어린 도사의 몸에서 풍기는 묘한 기운이 걸려 불렀고, 이어 도력을 펼쳐보았더니 눈이 붉게 물들었다.
만약 운진의 도력이 부족했거나, 어린 도사가 차를 놓아주기 위해 가까이 오지 않았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한 술법이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아니다. 고마워서 불렀느니. 어디 도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볼까?”
기특해서 그렇다는 투로 손을 뻗은 운진은 어린 도사의 손을 잡았다.
그 직후였다.
“이런!”
눈이 하얗게 뒤집히며 쓰러지는 어린 도사를 운진이 얼른 안았다.
운진은 왼팔에 아이를 안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뻗어 어린 도사의 이마에 가져갔다.
“삼마삼바라 훔 아라나 호움.”
그가 주문을 외자 검지와 중지에서 밝은 빛이 쏟아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어린 도사는 잠시 뒤에 깨어났다.
“문주님?”
“허허. 먹는 것이 부실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쓰러질 정도라니 오늘은 오후에 다 같이 토끼라도 잡아야 할까나.”
“예에?”
“뭘 그리 놀라는고? 어지러울지 모르니 천천히 일어나려무나.”
넉넉하게 웃어준 운진은 어린 도사를 달래 내보내고는 곧바로 가부좌로 앉았다.
술법을 부리지 않으려 애썼다.
부러 쌓이는 도력을 외면했었다.
그러나 어린 도사들에게 술법이 물들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주문을 떠올려 도력을 펼치던 운진의 눈 끝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무랍과 같은 술법이니 이는 혈교의 소행이다.’
눈을 번쩍 뜬 운진은 탁자 깊이 넣어두었던 부적을 꺼낸 뒤에 급히 밖으로 나갔다.
빠르게 주문을 외운 그는 검지와 중지에 끼운 부적을 허공에 뿌렸는데 그 직후에 모산에 스며들던 술법의 기운이 사라졌다.
“진 대협, 무탈하신 게요?”
혼잣말을 뱉은 운진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
진무린은 반점에 들러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고, 잠시 쉰 뒤에 다시 경공을 펼쳤다.
바람처럼 달려가는 길이었다.
한계를 넘어서는 듯 죽을힘을 다해 곁을 따르던 백면호리가 붉게 물든 얼굴을 돌리며 시선을 주었다.
‘느껴지는 것 없어?’
진무린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하게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백면호리의 표현 그대로 마치 하늘에 높이 떠오른 매가 빙빙 돌며 지켜보는 듯한 껄끄러운 느낌만은 분명히 있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역시 벽계의 인물 궁도요, 다음으로 의심 가는 것은 마선 구철환이고, 마지막은…….
“백면호리!”
경공을 펼치던 진무린은 급하게 아래로 내려간 뒤에 산의 중간에 내려섰다.
“아후, 죽겠다. 무슨 일이야? 왜?”
“잠시 운기를 할 생각이니까 정상에 올라가서 경계를 서 줘. 대략 이각쯤 걸릴 테고, 끝나는 대로 부를게.”
“그러지.”
내내 찜찜했던 탓인지 백면호리는 시원한 답과 함께 몸을 솟구쳐 정상으로 향했다.
전에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다.
언젠가 귀혼곡을 향하던 참에 양묘가 술법으로 지켜보았을 때였다.
당시를 떠올린 진무린은 바로 산에 붙다시피 앉아 기운을 펼쳐냈다.
아까와는 달리 섬세하고, 세밀한 기운이었고, 넓게 펼치는 것이 아니라 백면호리가 서 있는 정상을 경계로 덫을 놓는 것처럼 풀어내 혹시 다가오는 기운은 없는지를 느끼는 방식이었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그야말로 무섭게 달렸다.
벽계의 궁도가 따라붙었다 해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기운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마선 구철환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찜찜한 기운은 무인이 아니라고 봐야 했다.
귀혼곡에 있던 양묘가 탈출했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짚이는 곳은 아직 건재할 혈교이리라.
이각을 기다린다.
그래도 잡히지 않는다면, 상등에 도착해 방법을 찾겠다.
운기와 동시에 피어난 묵빛 기운이 거대한 봉오리로 변해 진무린을 감쌌다.
일각쯤 지났다.
그리고 이각이 다 되어 갈 때쯤이었다.
번쩍 눈을 뜬 진무린이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허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술법이었다.
과거 양묘의 기운을 느꼈던 경험이 있어 확신할 수 있다.
백면호리에게 끈적하게 달라붙었고, 오는 내내 진무린이 느꼈던 기운은 분명 술법이라 할 만했다.
몸을 일으킨 진무린은 고개를 들어 내공을 가볍게 일으켰다.
“백면호리.”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부른 것처럼 나직한 음성이었는데 잠시 뒤에 백면호리가 뚝 떨어지는 것처럼 진무린의 곁에 내려섰다.
“뭐야?”
“술법 같다.”
“뭐라? 술법? 그럼 모산이 또? 아니지. 문주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혈교?”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 거냐는 의미로 백면호리가 지켜보고 있었는데 진무린은 당장 답을 내지는 못했다.
누구보다 이를 갈고 있을 점창과 공동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하영웅대회를 개최하고, 궁도가 나타났으며, 이어 술법의 기운이 다시 등장했다.
하후도가 했던 이전 음모의 재탕인 느낌인데 규모가 좀 더 커졌고, 더욱 은밀해졌다는 점이 이전과 달랐다.
“방법이 없어?”
백면호리의 재촉에도 진무린은 여전히 침묵했다.
술법을 상대하려면 누구보다 운진의 도움이 필요했다.
상등으로 향할 것이냐, 모산의 문주에게 가서 내용을 전하고 도움을 청할 것이냐.
숨을 길게 내쉰 진무린은 분명하게 마음을 굳혔다.
“최대한 서둘러서 우선 상등으로 간다. 내가 알아서 보조를 맞출 테니까 능력껏 달려.”
“이렇게 대책 없이 끌고 갔다가 괜히 정아만 다치게 하는 거 아냐?”
“만약 우리 둘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혈교가 루주와 정아를 노리면?”
백면호리의 고개가 불쑥 위로 솟았다.
“뭐 하고 있어? 얼른 달리자고!”
그런 뒤에 그는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 빠르게 상등이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미친 듯이 경공을 펼치는 백면호리의 심정을 진무린은 알 것 같았다.
청강이 흉수의 손에 등선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심정이 고스란히 떠오른 까닭이었다.
‘궁도. 사람을 정말 잘못 건드렸어.’
어지간하면 따라가기만 할 텐데 진무린은 백면호리의 반걸음 앞으로 내달렸다.
‘서둘러. 백면호리.’
의미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백면호리가 훌쩍 진무린의 앞으로 튀어나갔는데 직전까지 붉었던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