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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09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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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9화

은천검제

제109화

 

오후 수련을 마친 진무린은 저녁을 먹기 전 표충량과 함께 낙안봉에 올랐다.

아직 이대 제자들이 오려면 여유가 있었다.

짧은 겨울 해가 산에 걸치며 뿌려대는 주황빛이 화산과 주변을 물들이는 시간이었다.

“내일 출발할 생각이다.”

고개를 돌린 표충량의 얼굴에 서운한 감정이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진무린은 그런 표충량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당겼다.

“수련은 어렵다. 알아주는 이들도 드물지. 너의 노력은 외면한 채 화산에 있었으니 당연한 성취라고 할 테고, 또 장문인과 내가 돌봐준 덕이라고 비하할 수도 있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는 표충량을 향해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네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소질에게 말씀이십니까?”

표충량을 향해 진무린은 넉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 너를 안배하셨던지 청강 진인을 일찍 뵈었고, 이후 장문인과 나를 차례로 만나 오늘에 이르렀지. 그런 이유로 한 가지만 당부할까 한다.”

“소질은 진 사숙의 말씀을 명심할 것입니다.”

일몰의 장엄한 빛에 물든 표충량이 앳된 음성으로 답한 뒤에 귀를 쫑긋 세웠다.

“수련이 힘겨울수록 무공은 자연 성취를 얻는다.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그래서 훗날 너를 업어 지킨 청강 진인과 장문인처럼 너 역시 어려운 이를 도와라. 그것이 하늘이 주신 재능을 가장 이롭게 쓰는 일이다.”

“소질은 반드시 사부님과 진 사숙 같은 무인이 될 것입니다.”

표충량이 답을 마쳤을 때였다.

저 아래에서 이대 제자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내려갈 때인가 보다. 얼마나 발전했는지 지켜볼 테니 앞서 봐.”

“예, 진 사숙.”

진무린이 바라보는 앞에서 표충량은 아래로 훅 몸을 던졌다.

세 길 아래의 바위를 밟으며 솟구친 표충량은 이어 한 장을 앞으로 내달리는 놀라운 경공을 보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도사복이 아직 어색하고, 경공을 펼치는 모습에 어색한 구석이 남았으나 참으로 눈을 씻고 돌아볼 발전이었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진무린은 표충량을 향해 곧장 날았다.

노을이 물든 낙안봉의 중간에서 이대 제자들이 걸음을 멈춘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집중했다.

바위를 껑충껑충 뛰어가는 표충량은 날갯짓을 배우는 초고리의 모습이요, 그 뒤를 높고 느긋하게 떠올라 있는 진무린은 그를 지켜보는 우두머리 매의 형상이니 한편으로는 부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

 

황종관은 궁지에 몰린 느낌이었다.

명색이 정도맹의 맹주인데 점창이 툭 하고 보낸 초청장을 받고서야 천하영웅대회가 개최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야말로 유명무실이란 말이 그의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초청장을 받은 황종관은 가장 먼저 비월단의 단주 윤고상을 불렀다.

“내가 이 초청장을 받아들 때까지 개최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조직을 보강하는 데 집중하느라 그렇게 됐습니다.”

“소림과 무당이 동조했다면 최소한 그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뻔뻔한 대답을 늘어놓는 윤고상의 입을 짓이겨놓고 싶은 감정을 누르느라 황종관은 잠시 숨을 골랐다.

“내가 본가의 가신들을 불러들였다고 이러는 건가?”

“꼭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군?”

황종관의 질문을 받은 윤고상은 아예 각오한 표정이었다.

“맹주께서 구대문파를 배척하신 이후 정도맹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점창과 공동은 파견했던 제자들을 불러들였고, 소림과 무당도 장로분들께서 자리를 비우고 계십니다.”

책상에 앉은 황종관을 향해 윤고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정도맹을 위해 애쓴 분들에 대한 예우가 없다면 어찌 맹주를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점창과 공동은 물론이고, 소림과 무당도 그 점을 지적한다고 봅니다.”

“그런 이유로 정도맹의 정보조직인 비월단이 제대로 활동하지 않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심기를 거스르면 단주인 저와 단원들 역시 뇌옥에 갇힐 텐데 어찌 구대문파를 들여다볼 수 있겠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황종관을 향해 윤고상이 말을 이었다.

“점창과 공동은 아직 정도맹의 원로자리를 보장받고 있습니다. 거기에 소림과 무당이 동조했습니다. 이런 때 소림과 무당을 살피던 대원이 발각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픈 곳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 두 곳을 당신이 감당할 수 있겠냐는 비난과도 같은 질문에 황종관은 답을 하지 못했다.

“소림과 무당이 나서고, 점창과 공동이 동의하면 뇌옥에 갇혀야 합니다. 그때 다른 문파를 설득하거나 혹은 구대문파에 맞서 저희를 지켜줄 수 있으십니까?”

“부맹주와 약연 장로의 일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나?” 

“그분들을 벌하시더라도 뇌옥에 넣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쓰디쓴 숨을 내쉰 황종관은 확실히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았으니 이만 나가 봐.”

군례와 비슷하게 오른팔을 가슴에 댔던 윤고상이 후련하다는 태도로 집무실을 나섰다.

“후-.”

황종관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럴 때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이 가장 아팠다.

청강은 등선했고, 진무린은 상등에서 불편한 얼굴로 헤어졌다.

소림과 무당이 얼굴을 돌릴 줄은 몰랐다.

뇌옥에 가두는 것에 동의해놓고 뒤에서 점창과 공동의 요구에 동조할 줄은 정말이지 짐작조차 못 했다.

“때가 되었나?”

황종관은 이 모든 일이 정도맹을 대놓고 무시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천하영웅대회의 개최는 반드시 정도맹의 황종관과 먼저 의논했어야 할 일이지, 이렇게 대뜸 초청장을 보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황종관은 무겁게 내려앉은 표정으로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

 

화산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이었다.

잠시 쉬며 운기를 준비하는 진무린을 화산의 이대 제자 한 명이 찾았다.

“무슨 일이지?”

“소등각에 진 사숙조를 찾아온 분이 계십니다.”

“나를?”

“상등에서 왔다고 하면 아실 거라 하였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나 진무린은 그가 필시 홍화루에서 보낸 사람이리라 짐작했다.

“가보자.”

진무린은 이대 제자를 따라 소등각을 향해 걸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화산은 엄숙했고, 아직 잠이 들지 않은 전각 사이를 매서운 겨울바람이 쓸고 다녔다.

소등각에 당도한 진무린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몸을 일으킨 이는 염소수염을 한 중년 남자였다.

“진 대협!”

익숙한 기운과 단숨에 주변을 경계하는 시선까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눈앞의 중년 남자는 백면호리가 분명했다.

이대 제자를 물린 진무린은 백면호리와 마주 앉았다.

“무슨 일인데 화산까지 찾아와?”

“그보다 뭔가? 화산에서 뭘 얻은 게 있나?”

“말투를 하나로 하지.”

“나야 뭐 원래 좀 뒤죽박죽이잖나. 그런데 진짜 뭔데? 사람이 달라졌어요! 확! 완전히!”

“용건은?”

“아! 그게 말이지!”

백면호리는 침을 튀겨가며 요정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떠들었고, 이어 원예의 청을 전했다.

어차피 귀혼곡으로 갈 계획이었으니 공교롭기는 하나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루주가 직접 청을 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가 보네?”

“말해 뭐해! 루주가, 아니 정아의 사부가 혀를 내두르는 수준이라니까. 어떻게, 지금 출발해?”

“급한 마음은 알겠는데 내일 아침에 장문인에게 인사는 하고 가는 것이 도리지. 정 기다리기 지루하면 먼저 출발해.”

“에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같이 가. 그리고 이런 때 아니면 내가 언제 화산에서 묵어보겠냐고. 햐! 살다 보니 백면호리…….”

별호를 입에 올렸던 백면호리가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진 대협을 만난 이후로 일은 참 많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딸자식 상승무공 익혀, 화산에서 대우받으며 하룻밤 지내, 이 정도면 뭐. 아! 참.”

너스레를 떨던 백면호리가 얼른 표정을 바꿨다.

“이곳에 오는 길에 뭔가 끈적한 게 따라붙는 것 같았거든. 전에도 이런 적이 한번 있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좀 다르더라고. 거 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고 저 위에서 뭔가가 바람을 타고 싸악 돌면서 나를 노려보는 느낌?”

“소림이나 무당은 아니고?”

“그 정도를 못 알아차리면 내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있겠나.”

백면호리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분명 누군가가 따라붙었다고 보는 게 현명했다.

마교, 혈교, 벽계, 점창과 공동, 떠오르는 상대는 많았다.

“일단 이곳에서 쉬어. 아침에 장문인과 인사 나누고 출발할 테니까.”

“그러자고.”

대강 이야기를 마친 진무린은 소등각을 나서 거처로 삼는 방으로 돌아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천하영웅대회의 말을 들을 때도 그렇더니 백면호리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에도 이상하게 궁도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경을 너무 써서 그런가?’

만만치 않은 느낌 때문인지도 몰랐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낸 진무린은 가부좌로 앉아 운기에 집중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영약을 네 가지나 먹었는데도 딱히 내공이 증진되는 효과는 없었다. 다만, 몸 안에 담긴 내공이 더욱 정순해졌으며, 상단전에 기운을 전하는 일이 중단전을 통하는 것만큼이나 능숙해진 것은 분명했다.

최근 운기 중에 진무린이 느끼는 감각은 마치 양묘가 만들었던 세계에 들어서는 것과 같았다.

진무린만의 세계였다.

갇힐 일 없고, 운기에서 깨어나면 바로 현실로 돌아설 수 있으니 참으로 든든하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묵빛 기운이 진무린을 감싸면 이런 느낌이지 싶었다.

그 속에서 진무린은 은천검법, 섬전검법, 묵룡검법을 수련했고, 마지막으로 은천수호검을 익혔다.

검을 꺼내지 않아도 몸을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심지어 검기를 내는 수련도 가능했다.

화산의 모든 이가 의아할 정도로 천에 감은 검을 꺼내지 않았는데, 실제로 진무린은 매일 밤 이렇게 혼자만의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어두운 공간, 무아지경의 세계에서 이상하리만치 진무린은 작은 존재였다.

겸손하라는 교훈일까, 아니면 아직 수련이 부족해 진무린만의 세상을 차지할 능력을 얻지 못한 탓일까.

궁금했으나 진무린은 욕심내지 않았다.

자연의 경지를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은 이런 수련이 가능한 것에 감사하며 매달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방에 홀로 앉아 운기하는 동안, 몸에서 피어난 묵빛 기운이 커다란 꽃봉오리의 형태로 변해 진무린을 감쌌는데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독곡을 나선 양소소는 남굉모, 나탑사와 함께 사천의 구채구를 찾았다.

삼십 년의 세월을 한 곳에서 견딘 나탑사는 황룡의 녹색 장관과 오채지의 풍광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런 절경을 남굉모와 함께 돌아보는 것에 더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떠세요?”

“뭘 말이냐?”

“좋으시죠?”

양소소의 질문에 남굉모 또한 멋쩍게 웃어서 세 사람은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세 사람이 경관을 감상하며 잠시 시간을 보낼 때였다.

번득하고 남굉모의 눈이 왼편을 향해 움직였다.

눈치를 먼저 알아챈 사람은 양소소였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남굉모가 노려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꽤 날카로운 기운이네요?”

“구철환이 온 모양이다.”

“마선 구철환 말씀이세요?”

양소소의 질문에 남굉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세요, 가가?”

“일은. 늙은 마인 하나가 죽고 싶어 자리를 찾는 모양인데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그래도 빙궁의 소공주였고, 죽기 직전의 남굉모를 구했던 무공이 있는 터라 마인이라는 말을 듣고도 나탑사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어쩌시겠어요?”

“어쩌긴. 화산에서 부양곽을 잃어 허전한 마음을 달래러 온 것이라면 이대로 헤어지는 게고, 길을 막아선다면 소원대로 죽여주면 될 일이지.”

남굉모의 후련한 답에 양소소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가가께서 나서실 일이 뭐가 있어요? 누구든 길을 막는 이가 있다면 소녀가 빙공으로 얼린 뒤에 저 아래에 던져버리면 되지요.”

“이렇게 든든할 수가 있나.”

“외조모의 빙공을 제대로 견식할 수 있어 좋은데 갑자기 마선이 불쌍하게 느껴지니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네요.”

넉넉하게 오간 농담이었다.

그러나 웃음을 담은 남굉모의 얼굴 안에서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양소소의 눈빛 또한 비슷했다.

“그 아이는 무탈하겠죠?”

“은천문의 아이라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게다. 네가 먹인 영약이 상단전에 효험이 특별하니 지금쯤 마선 정도는 얼마든지 상대할 테고, 무엇보다…….”

남굉모가 말끝을 흐리는 바람에 양소소와 나탑사가 궁금한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그래. 이왕 하던 말이니 마저 하마. 내가 보기에 녀석은 아비인 낙일검보다 월등한 자질을 지녔고, 근성은 물론이요, 오의를 깨닫는 명석함 또한 남달랐다.”

흐뭇한 표정을 짓는 양소소를 향해 남굉모가 기가 막힌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어릴 적에도 혹시 내가 준 영약을 먹였었냐?”

“조금요. 아주 조금.”

“어쩐지.”

졌다는 투로 숨을 내쉰 남굉모가 멀리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자. 모처럼 좋은 풍경을 보았더니 향 좋은 술이 그립다.”

그의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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