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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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8화
은천검제
제108화
점소이가 주문해놓은 술을 들고 온 탓에 잠시 틈이 있었다.
“딱딱하게 굴 것 없어. 긴장할 필요도 없고. 얼굴이나 보자고 온 거니까.”
하후도가 그저 무공이 강한 벽계의 인물이라면 궁도는 바늘 하나 찌를 틈 없이 촘촘한 느낌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술이나 채우고 하지.”
궁도는 탁자에 엎어놓았던 잔을 가져간 뒤에 자신이 주문했다는 양 술을 따랐다. 이어 그는 진무린의 잔에도 술을 채워주었다.
“처음 만나면 삼 배를 나누는 것이 강호의 예법 아닌가. 얻어 마시는 대신 석 잔의 술을 마실 때마다 질문을 하나씩 받아주지. 그래, 첫 번째는 뭔가?”
“벽계가 무공으로 강호인을 해치면 구주가 나선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궁 대협을 공격하면 어떻게 됩니까? 도주하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방어만 해야 합니까?”
“두 가지 질문이 아닌가?”
“한 가지입니다.”
“셈에 밝은 편이군. 들지.”
잔을 앞으로 내밀어 보인 궁도를 따라 진무린도 비슷하게 잔을 비웠다.
“크흐. 강호의 술은 향이 가벼워. 맛도 부족하고. 마치 사람들과 같지.”
두 개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궁도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나를 공격하면 그건 좀 상황이 복잡해. 아무튼, 답은 나의 출신을 아는 자네가 검을 뽑은 것이니 방어를 위해 무공을 사용하는 것쯤 용납되지. 자! 두 번째 질문은?”
여유 넘치는 표정과 태도로 궁도가 질문을 기다렸다.
“다른 세계에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굳이 이렇게 나서시는 이유가 뭡니까?”
“너무 포괄적인 질문 아닌가?”
“좁혀 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그게 그거구만, 말솜씨도 제법이야. 들지.”
두 번째 잔을 털어 넣은 궁도가 술병을 기울였다.
“우리가 원하는 거? 간단해. 구주의 위치.”
진무린의 시선을 확인한 궁도가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마지막 질문이 남았네.”
“마시고 해도 됩니까?”
“시간을 버는 법도 능숙하군. 하후도가 감당하기 어려웠겠어.”
잔을 드는 궁도를 보며 진무린 역시 주저하지 않은 채 마지막 잔을 털어 넣었다.
“벽계의 인원이 얼마나 됩니까?”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또한, 망설이는 눈치였다.
진무린의 다부진 시선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저었다.
“허를 찌르는 질문이어서 당황스럽기는 한데 약속은 약속이니 답을 주지. 대략 백 명쯤 된다고 보면 되네.”
“무공을 사용하는 인원을 여쭤본 것입니다.”
“그 인원이 모두 나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이지.”
거짓을 말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강호 전체를 긁어모아도 벽계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표정이 재미있구먼. 세 가지를 답했으니 첫 만남으로는 충분한 것 같고. 술이 남았으니 이건 내가 떠나기 전에 나누는 잔으로 하세.”
궁도가 잔을 채우며 거짓말처럼 작은 병의 술이 떨어졌다.
하필 그때 점소이가 요리를 가져오면서 또 작은 틈이 있었다.
진무린과 궁도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터라, 접시를 내려놓은 점소이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린 채 주방을 향해 급히 움직였다.
“은천문으로 돌아가. 가서 다섯 해를 봉문해. 그러면 자네와 은천문은 무사할 걸세.”
“제 검이 두려우십니까?”
“내가 어쩌다 날아든 벌 한 마리를 두려워할 사람으로 보이나?”
“검기를 날리는 벌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산행을 방해하는 벌 한 마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충고를 하기 위해서였으니 여기까지만 하지.”
남은 잔을 시원하게 털어 넣은 궁도가 조용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자네가 앞세우는 의와 협이 인간의 본성 앞에서 얼마나 값어치 없는가를 알게 된다면 봉문을 택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하게 될 걸세.”
말을 마친 궁도가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잘 마셨네.”
가벼운 인사를 던진 그는 유유자적하는 걸음으로 객잔을 나섰다.
**
궁도를 만난 다음 날, 경공을 발휘해 달린 진무린은 이틀 뒤에 화산을 앞에 두었다.
궁도를 만난 것은 진무린에게 일종의 충격이었다.
그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무공을 지닌 인원이 백 명이라면 마교와 사파를 포함한 강호 전체가 달려든다 해도 모조리 시체로 변할 수준이었다.
정말 놀라운 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이는 그의 눈빛이었다.
‘너무 몰랐어.’
화산을 바라보며 진무린은 하후도와 궁도, 그리고 엄소동을 떠올렸다.
다른 세계라 들었고, 구주라는 금제에 걸려 직접 나서지 못한다는 이유로 방심했다.
구주라는 성벽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강호는 단박에 벽계의 세상이 되리라.
‘결국, 홍화루에 가봐야 하나.’
구주의 줄기라는 원예에게서 내막을 들어보고 그 뒤에 은천문으로 돌아가 대책을 세우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마음을 정한 진무린은 화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백면호리는 일곱 날 만에 상등의 민가에 돌아왔다.
그는 오전에 도착했는데 요정이 소수음공의 초식을 연습하는 것을 보고는 소리 내지 않은 채 대문에 몸을 숨겼다.
괄목상대라 하던가.
자세를 낮추고 오른손을 뻗어내는 요정의 소매에서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나왔고, 몸을 돌리는 동작에서는 여유로움마저 느껴졌다.
고개만 빼꼼히 들이민 백면호리가 좋아죽는 표정으로 헤벌쭉 웃을 때였다.
누군가 등 뒤로 다가섰다.
홱 고개를 돌렸던 백면호리는 얼른 검지를 입에 가져갔다.
‘언제 오셨소? 그런데 무슨 일이오?’
‘수련 중이니까 일단 조용히 하고.’
백면호리의 눈짓을 알아들은 백섭광이 이해한다는 투로 웃고는 바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저! 저!”
수련을 방해하는 것이 아쉽고 안타깝지만, 어쩌랴.
백면호리는 서운한 얼굴로 백섭광을 뒤따랐다.
“다녀왔소.”
“고생하셨어요.”
“이까짓 게 무슨 고생이 되겠나.”
“아빠.”
“그래! 그래!”
원예가 노고를 위로하고 수련 중이라 염려했던 요정이 반갑게 맞아준 다음이었다.
“진 공자께서 화산에 계시다네요. 그곳에 다녀와 주실 수 있나요?”
곧바로 원예의 요청이 있었다.
“진 공자? 진 대협을 말씀하시나?”
“그래요. 정아의 성취가 어찌나 빠른지 벌써 내공의 운용을 익힐 단계에 이르렀는데 내가 도인을 해주기 어려워서 그래요. 초식을 낼 때 내공의 운용을 제대로 익힌다면 손의 색이 바뀔 테고, 그때부터 진정한 위력이 나올 거예요.”
말 좀 들어봐라.
얼핏 들어도 상승무공을 익힌다는 증거 아니겠나.
흐뭇한 원예의 요청에 백면호리가 요정을 살피고는 얼른 시선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가야지. 가만있자, 화산이라고 했지? 화산? 화산 가보셨나? 산이 아주 어마어마…….”
“가실 건가요?”
“간다니까.”
“그럼 얼른 서찰을 하나 쓸 테니 그동안 점심을 드시고 계세요. 마침 오전 수련이 끝났으니 정아와 함께 드시면 되겠네요.”
백면호리가 만족한 듯 웃었고, 칠 일 만에 아빠를 마주한 요정이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안겼다.
**
화산에 도착한 진무린은 은혼에게 인사하고 며칠 묵을 것을 청했다.
“장문인 자리를 요구하셔도 고민할 참인데 화산에 머무는 일을 말해 뭐하겠습니까? 원하시면 양인각을 내드리겠습니다.”
농담과 과장이 섞인 말로 진무린의 청을 받은 은혼은 주변을 살핀 뒤에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대협. 량아의 발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어 그는 그동안 느낀 표충량의 상태를 설명하고 혹 전한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장문인께서 제자로 들이셨는데 감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가 혈도를 넓혀놓았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공력을 전했습니다.”
“역시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진무린의 대답에 은혼이 반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문인께서 허락하신다면 머무는 동안, 며칠이라도 량아의 무공을 봐줄까 합니다.”
“진 대협. 다른 이는 모르나 본파에서도 고수를 배출하고자 하는 바람에 특별한 심법을 전해두었으니 그 점만 참고해주십시오.”
은혼의 말과 눈빛을 본 진무린은 그것이 자하심공임을 바로 알아들었다.
“장문인의 말씀을 명심해서 살피겠습니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진무린은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표충량과 함께 수련했다.
화산의 검을 진무린이 함부로 들여다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진무린은 검을 사용하는 기본과 내공의 운용에 관해서만 도움을 주었다.
불과 이틀 만이었다.
낙안봉에 오르는 표충량의 모습에 이대 제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고, 은혼 또한 제자의 발전에 크게 놀랐다.
진무린이 표충량을 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진 대협께서는 무관을 차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을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일대 제자와 이대 제자들을 전부 맡기고 싶은 심정입니다.”
“말씀은 감사하나 필시 제가 모르는 또 다른 기연을 얻은 듯합니다. 량아가 짐작 못 하는 것으로 봐서 진인께서 전하신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하늘이 화산에 내린 재능이리라 생각합니다.”
진무린의 말에 은혼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짐작은 얼추 맞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도 등룡창천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꽃봉오리 모양을 만들었고, 그 안에 표충량이 들어가 기연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당시에 운기에 몰입해 있느라 진무린조차 등룡창천의 기운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변한 것을 모르는 참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표충량의 몸이 진무린이 뿜어내는 기운에 반응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수련을 지켜보느라 등룡창천의 기운을 옅게 풀어내 살필 때면 놀라울 정도로 내공의 운용과 축기가 발전하곤 했다.
‘혹시 녹이지 못한 영약의 기운이 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건가.’
분명 진무린의 기운에 얻는 것이 있음을 짐작하였으나 정확한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이는 또한, 어설프게 표충량의 내공에 영향을 미쳤던 등룡창천의 기운이 진무린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 현상이어서 도저히 짐작으로 알아낼 일이 아니었다.
이대 제자인 승선의 작은 조언이 표충량을 깨웠고, 은혼이 알려준 내공심법으로 성취의 틀을 갖춘 상태에서 진무린을 만난 참이었다.
함께 수련하는 동안 진무린이 펼친 기운이 자연스럽게 표충량에게 스며드는 것을 누군들 알아챌 수 있겠나.
목검이었다.
쉐에엑! 쉐엑! 쉐에엑!
표충량은 벌써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힘이 실렸고, 태도가 근엄했으며, 동작에 화산의 날카로움과 화려함을 담았다.
화산의 초식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기본을 잡아주는 정도는 충분했다.
“량아야. 내미는 발에 들어가는 기운이 과하다. 보법은 중심을 이동하는 일이라 한쪽에 편중되어서는 득을 얻지 못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진 사숙.”
얼마 전 화산에서 엄청난 무위를 보였던 진무린이었다.
표충량의 변화도 보았다.
그런 이유로 일대 제자와 이대 제자들이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는 일이 하루라도 좋으니 진무린의 가르침을 받는 일이 되었다.
오전과 오후는 진무린이 살폈고,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은혼이 자하심공과 화산의 검을 가르쳤다.
그렇게 시간이 날 때마다 진무린은 운기에 집중해서 닷새째 되는 날 몸에 남았던 영약의 기운을 모두 녹여낼 수 있었다.
엿새째 되는 날, 표충량을 지켜보던 진무린은 옅게 웃은 뒤에 하늘을 항해 고개를 들었다.
‘보고 계십니까? 량아가 드디어 검의 길을 본 모양입니다.’
겨울 하늘 저 어딘가에서 인자하게 웃고 있을 청강을 향해 진무린은 표충량의 발전을 전했다.
같은 검법을 똑같이 펼치더라도 검의 길을 아는 자와 무턱대고 따라 하는 이의 차이는 삶과 죽음으로 갈라질 만큼 큰 것이었다.
예상보다 많은 것을 전했다.
영약의 기운도 모두 녹였다.
그러니 이제는 화산을 떠날 때였다.
하늘을 바라보는 진무린의 생각을 알았을까.
오전과 오후의 수련 시간에는 어지간해서 나타나는 법이 없던 은혼이 수련장에 들어섰다.
그의 표정이 편치 않았다.
“진 대협. 점창이 천하영웅대회를 개최한다며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장소와 시간이 정해졌습니까?”
덤덤한 진무린의 반응을 보며 은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석 달 뒤 감숙의 녹야평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상스러우리만치 조용하던 점창이 영웅대회를 개최한다니 다른 생각이 있지 않을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은혼의 말을 들은 진무린은 청강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알고 있던 일이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으리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은혼에게서 일자와 장소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 궁도의 얼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