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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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5화
은천검제
제105화
남굉모는 마치 저 앞에 서 있는 산을 향해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처럼 먼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인의 경지를 얻으면 주변의 사물을 피부로 느낀다. 검기는 그곳에 너의 기운을 전하는 것으로, 그 통로를 검으로 활용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덤덤한 어투로 남굉모는 말을 이었다.
“먼저 간 네 아비와 청강은 어렴풋이 알았으나 사물을 완벽하게 피부로 느끼지 못했을 게다. 펼친 기가 부족했으니 그렇겠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기를 펼치고, 그 위에 재차 기를 뿌리는 것은 상단전을 완벽하게 깨우쳐야 가능한 일인데 나는 후자가 부족하다.”
솔직한 고백이었다.
“상단전을 완벽하게 깨달으면 주먹을 통해서도 기를 전할 수 있고, 도와 창을 통해서도 전할 수 있는데 단순히 내공을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감지한 사물 위에 새로운 기를 전하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적당하다.”
하필 그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 그나마 단정하게 꾸민 남굉모의 머리칼과 수염을 휩쓸었다.
잠시 말을 중단했던 남굉모는 바람이 한 꺼풀 약해진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내공을 얻는다면 오히려 쉬울 게다. 하나는 사물을 읽고, 다른 한 가지는 그곳으로 달려가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누가 있어 하나의 단전에 두 가지 내공을 익힐 수 있다더냐.”
남굉모의 설명을 듣는 순간, 진무린은 소수음공을 얻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랬구나!’
몸에 다른 내공이 들어와 그것을 녹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단전을 깨달았는데 남굉모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 과정이 등룡창천과 상단전을 깨우는 기틀이 되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멀리 보아라. 네 몸에 두 가지 내공이 없다면 기를 뿜어내는 두 가지 통로가 있음을 깨달아라. 하단전에서는 내공을 일으키고, 중단전은 사물을 읽으며, 상단전이 그곳에 기를 뿌린다.”
“아!”
짐작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남굉모가 자상하게 풀어주는 설명을 듣자 진무린은 볼과 목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짜릿한 깨달음을 얻었다.
어두웠던 앞이 단숨에 밝아지는 기쁨이었고, 완벽하게 손에 쥔 것과 같은 확신이었다.
“바람이 북에서 동으로 불 때면 매화는 설산에서 꽃을 피워 향을 남서로 피우는구나.”
이때 진무린은 청강이 남긴 전언을 천천히 읊었다.
짐작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힐끔 시선을 돌렸던 남굉모는 옅게 웃은 뒤에 먼 곳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햇살은 봄과 다르지 않으나 땅은 한기를 피워내니 매화는 홀로 향기롭다.”
이럴 수가 있을까.
이미 얻었다고 생각했던 청강의 전언이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게 다가왔고, 그동안 갑갑했던 부분을 확연하게 펼쳐주었다.
이런 뜻인 줄 몰랐다.
돌이켜 보면 이미 길이 눈앞에 있었는데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이 앞을 가린 꼴과 다르지 않았다.
어느 틈에 입을 다문 진무린이 눈을 감고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그때 알려줄 것을. 그랬다면 다들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텐데.”
아쉬운 탄식을 뱉어낸 남굉모가 눈을 감고는 운기에 들었다.
**
구정봉을 붙잡고 화산을 빠져나온 구철환은 원래 묵었던 객잔의 별채에 도착했다.
원체 강호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마교의 소유인 데다 주변에 수하들이 깔려 있어서 더는 뒤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였다.
멀쩡하게 도망친 것 같은데 실제로 구철환은 오른쪽 어깨와 팔, 그리고 등에 상처가 있었고, 구정봉은 또 왼편 앞쪽과 팔에 검상을 입었다.
두 사람은 도착하기 무섭게 먼저 상처를 치료했고, 잠시 뒤에 마주 앉았다.
말은 없었다.
새파랗게 어린 진무린에게 도주했다는 사실에 구철환은 분노와 치욕을 이기지 못한 얼굴이었고, 구정봉은 또 계획이 틀어진 것이 못내 답답하다는 태도였다.
“성과가 있었다면 모를까, 말도 안 하고 독단적으로 찾아가 애꿎은 일절과 수하들을 잃었으니 조만간 본교에서 추궁이 있을 게다. 생각이 없지는 않을 텐데 어쩔 참이냐.”
침묵을 깨고 구철환이 건넨 질문이었다.
“양부께서 도와주시면 살길이 있고, 그렇지 않다면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대답이 바로 나왔는데 구철환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번에 화산에 가서 살아온 것은 양부와 저, 두 사람뿐입니다. 그러니 양부께서 결단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방법이 있다면 말해봐라.”
구철환의 매서운 눈매 앞에서 구정봉은 결코 주눅 들지 않은 눈치였다.
“성과가 있었다면 단박에 본교 교도들의 칭송을 받았을 일입니다. 그 때문에 양부께서도 함께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너답지 않게 왜 그리 말을 돌리지? 그러지 말고 시원하게 원하는 바를 내놓아 봐.”
“부양곽 숙부께서 독단적으로 달려간 터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달려간 것이라 말할까 합니다.”
거칠게 바뀐 구철환의 눈매가 달려들었는데 구정봉은 전혀 밀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무리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셋째 제자인 제가 교주의 마천강기를 받기는 요원한 일입니다. 공을 세워야 하는데 이번 계획은 틀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자복하고 목숨을 구걸할까요, 아니면 돌아가신 분에 기대서라도 다음 기회를 노릴까요?”
“흐음.”
“잠력대법과 폭렬공을 넘긴 일로 풍령관이 놈에게 전멸되었습니다.”
“그것이 더 큰 문제 아니냐. 본교의 무공을 외부에 유출했다고 추궁하면 변명할 말도 없어.”
구철환의 염려에 구정봉의 대꾸는 가벼운 웃음이었다.
“그 덕분에 화산의 검이라는 청강을 잡았습니다. 비록 이어지는 공은 없으나 풍령관을 앞세워 화산을 무너트릴 계획이라 설명하면 적당히 넘어갈 일입니다.”
“그 외에도 폭렬공의 흔적이 사방에 널려있다. 그 점은 어찌 설명할 참이냐?”
“흑사련의 마등은 강호를 혼란에 빠트리고 구대 문파를 숨죽이게 했으니 충분히 값어치를 했다고 봅니다. 풍령관도 그렇고, 잘 진행되는 일을 진무린이란 놈이 뒤트는 터라, 부 숙부께서 나서셨다고 말씀드리면 적당히 넘어갈 것입니다.”
구정봉의 대꾸는 막힘이 없었다.
잠시 그를 노려보던 구철환은 마음이 결정이 섰는지 나직한 한숨을 먼저 털어놓았다.
“또한, 화산이 공공연하게 본교를 벌하겠노라 떠드는 것에 분개하셔서 본교의 무서움을 보이시기 위해 달려간 것으로 잘 말씀드리면 충분히 이해받을 정도는 됩니다.”
입맛을 다신 구철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만, 소교주와 첫째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교주가 와병 중이라 소교주에게 붙은 장로들도 적지 않고.”
“그 때문에 앞에서 진무린이란 놈에게 연달아 장로와 갈마천 명도를 보낸 것입니다.”
“진무린을 잡으면 그들을 보낸 너의 공이 되고, 지금처럼 실패하면 소교주의 세력을 제거한다?”
“그렇습니다.”
새삼 놀랐다는 투로 구정봉을 노려보던 구철환이 상체를 세웠다.
“알았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으마.”
“뒤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구정봉이 원하는 방향으로 의논이 끝났다.
“그건 그렇고. 놈이 예사롭지 않던데 전에도 이 정도였더냐? 그랬다면 마교삼절이나 갈마천은 아예 적수가 아니었을 텐데?”
“결단코 이전에는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못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살려두어선 안 되는 놈이구나.”
각오를 독하게 세웠는지 구철환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놈을 쓰러트리려면 마천강기가 아니고는 어려운데 교주께서 저리 꽉 쥐고 놓지 않으니 갑갑하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현실을 깨닫게 해야지.”
“어떻게 말입니까?”
이번엔 구정봉이 궁금한 얼굴로 구철환의 답을 기다렸다.
“놈이 본교에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지금처럼 와병 중인 교주가 모든 것을 꼭 쥐고 놓지 않으면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지. 그리고 너는 지금처럼 행동하면 된다.”
마지막 말을 이해 못한 구정봉이 고개를 갸웃한 뒤였다.
“화산에서 박빙이었는데 숫자가 부족했다고 말해라. 그런 뒤에 놈이 본교를 찾아오면 소교주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앞세우고. 공을 세울 좋은 기회라고 부추기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 게다.”
구철환과 구정봉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회주란 자는 연락이 없느냐?”
“그렇지 않아도 수일 내로 방문한다 하였습니다.”
“조심해야 하느니. 그런 자일수록 배에 검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부의 말씀을 깊게 새기겠습니다.”
대화가 모두 끝났다.
“몸을 살펴.”
한마디 말을 남긴 구철환이 방을 나서자 구정봉은 뻐근한 어깨를 풀어내는 것처럼 팔을 천천히 돌렸다.
“얼른 교주가 되어야 늙은것들의 잔소리를 안 듣고 살 텐데.”
지금까지 그나마 공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구정봉의 혼잣말이 방 안을 맴돌았다.
**
운기는 생각보다 길어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간이었다.
긴 운기에 놀란 진무린이 고개를 돌렸는데 남굉모는 마치 우화등선하려는 신선처럼 흰머리와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꼿꼿한 자세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을 너무 허비했습니다.”
“됐다. 삼십 년을 헛되이 보낸 뒤인데 반나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그래, 얻은 것이 있느냐?”
“막연했던 것들을 확연하게 그리게 되었습니다.”
“흠흐흐. 나쁘지 않구나.”
“가르침을 주신 덕분입니다.”
“쓸데없는 짓 말고 앉아.”
인사를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진무린을 남굉모는 거부하기 어려운 태도로 주저앉혔다.
“결국, 이럴 운명이었던 게다. 소소가 네놈의 아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마지막에 가르침을 달라고 매달린 모든 것이 어쩌면 오늘 이 순간의 깨달음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지.”
“빙궁의 소공주는 어찌 이해하십니까?”
당돌한 질문이라 그랬을까.
남굉모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독곡에 소공주가 없었다면 내가 지난 시간을 후회했을 것 같으냐? 지금도 네놈이 미워서 견디지 못하는 괴팍한 늙은이겠지.”
혹시 삶에 대한 미련을 버렸나.
나이가 적지 않은 남굉모의 변화에 진무린이 내심 걱정을 떠올렸을 때였다.
“근처의 객잔에 들러 저녁을 먹자. 그 뒤에 열심히 달리면 내일 오후에는 도착하겠다.”
종일 변변하게 먹은 것이 없는 남굉모가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
낙안봉에서 내려온 표충량은 그 길로 사부인 은혼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고, 궁금한 점을 물었다.
갈라질 정도로 메마른 땅에 물이 스며드는 것이 이럴까.
표충량의 질문이 깊이가 있음을 확인한 은혼은 점심을 거른 채 마주 앉아 내공의 운용에 관해 설명했고, 간단하게 요기한 후에 목검을 들려 기본을 가르쳤다.
어설프다. 아직 아쉽다.
그러나 표충량의 자세는 마치 전전대의 고수가 어린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아련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부응.
앞에서 뒤로 목검을 크게 돌린 표충량이 오른발을 구부릴 때 은혼은 비명을 토할 뻔했다.
‘사부님!’
청강의 모습이었다.
처참한 모습으로 등선한 사부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싶어 은혼은 왈칵 눈물이 올라왔고, 제자에게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오히려 무섭게 눈매를 치켜떴다.
붕! 부응!
등에 매달려 보았다더니 그 영향일까.
초식 하나마다 청강의 모습이 담겼는데 그 너머로 또 위엄마저 서려 있어서 지켜보는 은혼은 울렁이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무던히도 애를 썼다.
마침내 초식이 모두 끝났다.
“모두 기억하느냐?”
“예, 사부님.”
은혼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내는 데 내공이 따르지 않는다면 모두 헛일이다. 기운을 일으키고 회수하는 데 집중해서 수련해라. 암향표를 발휘하여 낙안봉에 오를 때 익숙하다면 검을 내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을 것이다.”
덤덤한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말을 잘 듣고 있던 표충량이 그만 입을 삐죽이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이놈! 고작 이런 수련이 힘겹다고 운단 말이냐!”
“아닙니다, 사부님.”
“그럼 어찌 그런 못난 모습을 보여!”
“제자는, 이렇게 검을 들고 있자니 등선하신 사조가 너무 그립고 뵙고 싶습니다.”
고개를 떨군 표충량의 볼에 주먹만 한 눈물이 흘러 턱을 타고 떨어졌다.
기껏 발전을 보이더니 원래 모습은 저런 아이였던가 보다.
아프게 웃은 은혼은 조용하게 다가가 표충량의 머리를 다독였고, 조심스럽게 당겼다.
“나 역시 사부님이 몹시 그립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시면 실망하실까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하는구나.”
“사부니-임.”
“이번이 마지막이다. 내일부터 육합신검법부터 선녀검, 탈명연환삼선검까지의 열세 가지 검법을 익혀야 하니 다시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마라.”
사부인 청강을 잊지 않는 어린 제자가 고마워서, 그런 아이를 다독이고 있자니 더욱 사부가 그리워서 은혼은 말을 그치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구름을 헤집고 길게 뻗은 햇살이 새로운 재능이 태어난 화산을 축하하는 것처럼 양인각과 낙안봉을 밝게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