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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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4화
은천검제
제104화
남굉모의 첫 마디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분명 영약을 구하기 위해 빙궁에 갔으리라는 짐작이 전부였다.
언제였는지, 어떤 계기였는지는 전부 자른 채 남굉모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빙정이라는 게 있다. 빙궁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얼음의 정수지. 그걸 먹으면 공력이 세 갑자나 늘어난다니까 소소에게 도움 될 게 분명했다.”
한숨을 푹 내쉰 남굉모가 빈 술독을 보고는 입맛을 다신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자신이야 있었다. 파천신군이라 불릴 정도의 무공과 내공을 지녔으니까. 그런데 빙정을 구하는 과정은 수백 년을 넘게 버틴 얼음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는 일이라 내가 지닌 내공 따위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술기운 가득한 눈을 돌린 남굉모가 별채를 밝히는 등을 노려보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개천을 바라보던 양소소가 그러더니 지금의 남굉모 역시 과거의 추억을 들여다보는 눈길이었다.
“정신을 잃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나를 구해준 사람이 있다.”
탁자가 주저앉을 지경으로 무겁게 한숨을 내쉰 남굉모가 퍼뜩 시선을 돌렸다.
“술이 더 필요해.”
“술은 충분합니다. 말씀하시기 불편하면 그만두셔도 됩니다.”
울컥 분통이 터진 모양으로 노려보던 남굉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기껏 말하다 말고 뭐가 문제일까.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말하면 끝날 일을.
그러나 더 말렸다가는 뭔가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 진무린은 객잔으로 통하는 연통줄을 당겼다.
점소이가 달려와 주문을 받았고, 술독 세 단지가 다시 오는데 대략 일각 정도 시간이 흘렀다.
다시 술을 마셨는데 이때는 진무린도 남굉모를 흉내 내듯 단지째 들어 입에 부어 넣었다.
“크허!”
입가를 닦던 남굉모는 통쾌하게 술을 부어 넣는 진무린을 보며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눈치였다.
“나탑사라는 빙궁의 소공주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얼음과 눈으로 만든 구덩이에 있는데, 소공주가 나를 안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진무린을 본 모양이었다.
“뭔지 알고나 고개를 끄덕이는 게냐?”
“몸이 얼어붙은 선배를 나탑사라는 빙궁의 소공주가 안아서 몸을 녹여준 것 아닙니까?”
“에이!”
두 번째 단지를 들어 입에 기울였는데 이미 술이 과한 탓인지 남굉모는 흘리는 게 더 많았다.
“몸이 언 것을 녹이느라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단지를 내려놓는 순간에 남굉모가 뱉어낸 고백이었다.
그는 마치 그 모든 일이 진무린의 잘못이라는 투로 눈을 부라렸는데 잠시 뒤에 멋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탑사가 빙궁에 그 사실을 알리고 나와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선언한 게지. 오해하지 마라. 그날 다른 일은 없었다. 또 그때는 사별한 뒤라 다른 건 문제 되지 않았고.”
“그렇다면 독곡에 계신 분이 바로 그 빙궁의 소공주이십니까?”
입술을 쭉 내민 남굉모가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정말 죄송한 질문인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고, 방법이 독특한 탓에 평생을 함께하겠다며 빙궁마저 나선 분을 왜 거절하셨습니까?”
술을 한 단지 이상 마신 기운도 있었고, 진심으로 궁금하기도 해서 건넨 질문이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혼자 몸이라 걸릴 것도 없으셨다면서요. 생명의 은인이 빙궁을 나서겠다는데 그걸 왜 거절하셨습니까?”
“흠.”
이리 난처해하는 남굉모를 볼 줄은 몰랐다.
인물이 박한가?
아니면 성격이 워낙 독선적이고 고약했을까?
“소공주의 나이가 소소보다 한 살 어리다.”
하마터면 “예?”하는 소리를 낼 뻔했을 정도로 상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
“빙궁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만, 어찌 외손녀보다 어린 아이와 가정을 다시 꾸리겠냐.”
“그럼 당시에 몇 살이었습니까?”
“소공주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그렇다면 삼십 년쯤 전이겠군요.”
“그보다 한두 해 빠지지.”
진무린의 예상을 남굉모가 정정해 주었다.
듣고 보니 갑갑한 사연이었다.
“홀로 독곡에서 삼십 년을 견디셨다니 소공주도 참으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흥!”
“술이 더 필요하십니까?”
“됐다. 됐어.”
내공을 일으키면 몇 단지의 술기운쯤 당장에 털어내련만, 남굉모는 그럴 마음이 없는지 탁자에 팔을 길게 뻗은 채 앞으로 엎어졌다.
진무린은 그의 팔에 밀려 떨어지는 그릇을 붙잡아 한쪽에 내려놓고 앞에 놓인 잔에 술을 채웠다.
남굉모의 사연이 좀 기가 막혀 그렇지, 어찌 보면 형벌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파천신군, 양소소, 빙궁의 소공주가 보냈을 지난 삼십 년은 어떤 느낌의 세월이었을까.
어쩌면 파천신군은 영물에게 죽기를 바라며 숨어 지냈을 세월이고, 양소소는 영약을 구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삶을 마치고 싶었을지 모르며, 소공주 역시 어떤 식으로든 외롭고 지루한 기다림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양소소가 건네주는 영약을 입에 넣었고, 그녀가 내내 바느질을 멈추지 않은 채 만들어준 옷을 입었다.
어쩌면 영약을 그렇게 먹인 의도가 지겨운 삶을 정리하고 부친인 진용선의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일 수 있는데 말이다.
피 흘리며 살기 위해 애쓰는 무인들의 삶 한편에 이런 고통이 있다니.
진무린은 씁쓸하게 웃은 뒤에 술을 넘겼다.
**
화산은 원래 여제자를 받았고, 그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마선이절과 구정봉을 맞은 날 오후는 상황이 어려운 것을 감안해 이대 제자들의 벌을 감면해주었으나 다음 날 오전은 변함이 없었다.
표충량 역시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낙안봉을 향해 달릴 준비를 했는데 분위기는 전과 확연하게 달랐다.
“사숙. 경공을 펼치실 때 운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요.”
이대 제자 중 승선이 처음으로 우호적인 감정을 내비치며 다가온 것이 그랬다.
얼떨떨해하는 표충량에게 내공의 운용을 자세하게 설명한 승선은 심지어 보조를 맞추듯 함께 달리며 요령마저 전해주었다.
가뜩이나 진무린이 혈도를 만져주었고, 작으나마 공력의 일부를 받았으며, 등룡창천의 기운이 꽃봉오리 형태로 바뀔 때 그 영향을 받은 표충량이었다.
마선이절을 상대하는 진무린을 보며 뭔가 간질간질하던 표충량은 이때 크게 깨닫는 것이 있었다.
이는 마치 물이 가득 차올라 터지기 직전의 둑에 승선의 조언이 물길을 열어준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운기를 게을리한 적 없다.
몸은 이미 고수로 갈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계기가 필요한 그 순간에 시기적절한 승선의 조언을 듣자 표충량은 탈을 벗은 나비처럼 단박에 얻은 것이 있었다.
“사숙!”
어느 틈에 앞을 달려가 가장 먼저 낙안봉에 도착한 표충량을 승선이 놀라 불렀고, 뒤늦게 도착한 이대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낙안봉의 정상에서 표충량은 먼 하늘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진인.”
표충량이 누군가를 불렀는데 이대 제자들은 그가 청강 진인이라 확신했다.
어린 몸에 더할 수 없이 가득 담긴 그리움을 본 까닭이었다.
**
원예는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큰 기쁨이란 구절을 제대로 이해했다.
물을 뿌리면 다음 날 키가 쑥 커 있는 수수를 보는 농군의 심정이 이럴까.
하루를 가르치면 반드시 그 이상을 깨닫는 요정의 재능에 원예는 시간 가는 줄 몰랐고, 힘든 것을 잊었다.
기본자세만 해도 그렇다.
한번 가르쳤다.
당연하게 잊어버리거나 잘못된 동작이 나올 법도 하련만, 요정은 원예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조차 빗나가는 적이 없었다.
내공은 말할 것도 없어서 백면호리가 오래 수련시켰고, 진무린이 살펴주었으며, 이안공자가 몸에 좋은 약을 먹여놓은 효과를 제대로 보았다.
원래는 기본을 가르친 뒤에 귀혼곡으로 보내기로 했는데 지금의 원예는 아예 돌려보낼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요정을 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흐아.”
갑갑한 것은 백면호리였다.
그러나 딸자식이 일취월장한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나.
오늘도 그렇다.
새벽 수련이 끝낸 요정은 잠깐 아침을 먹으며 백면호리와 마주했을 뿐, 곧바로 수련을 위해 마당으로 움직였다.
“무리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오지 않을까?”
“사부님이 괜찮다고 하셨잖아.”
“그래? 그럼 점심 먹고는 잠깐 바깥 구경하는 거 어때? 머리에 꽂을 예쁜 장식이 많던데? 당과도 있고.”
“아빠 혼자 다녀와.”
“너 안 가면 아빠도 그냥 여기 있지, 뭐.”
요정의 반응이 서운하기는 했다.
그러나 말이다.
강호에 발을 디뎠다면,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는 것이 오래 사는 길이고, 안면을 넓히고 배경을 든든히 하는 것이 무탈하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 아니겠나.
원예를 사부로 두었으니 홍화루가 뒤를 지키는 것은 물론이요, 소수음공이라는 대단한 무공도 익혔다. 거기에 진무린이란 고수가 관심 주는 아이가 바로 백면호리의 딸 요정이었다.
“흐헤헤.”
마당에서 무공을 수련하는 요정을 보면 백면호리는 속없이 웃었다.
진무린이 누군가.
정도맹의 맹주와 친하고, 화산은 가족 같으며, 아미가 고개 숙이는 그런 무인 아니냔 말이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수련을 마친 밤에라도 딸자식의 재롱을 보는 것인데 그때는 또 운기를 한다고 돌아앉으니 그 점이 못내 서운할 뿐, 백면호리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나도 사부님이 계셨지.”
마당에서 수련하는 요정을 보며 백면호리는 과거의 사부를 떠올렸다.
아낌없이 주었고, 가슴 부위가 주저앉은 그 모진 고통을 이겨가며 숨을 붙였다가 백면호리를 보고 나서야 눈을 감았던 사부였다.
잊고 살았다, 그 은혜를.
백면호리는 민가의 담장 위로 펼쳐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사부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광시에서 누구에게 팔려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러니 오늘 요정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모두 다 넓고 큰 사부의 덕이리라.
참으로 오랜만에 백면호리는 사부와 함께 지내던 시절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냈다.
**
아침에 일어난 남굉모는 느닷없이 내공을 잃은 사람처럼 풀 죽은 모습이었다.
그는 아침으로 죽과 만두를 조금씩 먹었고, 이어 진무린이 지시한 대로 목욕마저 마쳤다.
머리와 수염을 정리한 남굉모가 어제 산 옷을 걸치자 지금까지 매달려 있던 남루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고집 세고 융통성 없어 보이는 것은 바뀌지 않았으나 어제와 비할 바 없이 깔끔하게 변한 것은 분명했다.
객잔에 셈을 치른 진무린은 만두와 술을 한 병 준비한 뒤에 남굉모에게 돌아왔다.
“출발하겠습니다.”
이때도 남굉모는 얌전히 진무린을 따라나섰다.
누가 봐도 독곡으로 향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행동이었다.
객잔을 나선 두 사람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새 옷을 입은 노인과 양소소가 정성껏 만들어준 옷을 입은 진무린이 함께 걷는 길이었다.
남굉모는 과거를 향해 걷고, 진무린은 미래를 위해 걷는 길이기도 했다.
빙궁의 소공주를 만나 무슨 말을 하려나.
어제는 그저 기가 막힌 일이었는데 막상 길을 나서자 삼십 년의 세월이 주는 무게가 가볍지 않아 걷는 내내 진무린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경공을 펼칠까 합니다.”
“조금만 더 걷자.”
진무린의 제안을 남굉모가 점잖게 거절했다.
일각쯤 걸은 뒤였다.
“너라면 어떨 것 같냐? 네가 빙궁의 소공주라면?”
“짐작조차 못 하겠습니다.”
“흐음.”
신음처럼 한숨을 내쉰 남굉모는 마침내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경공으로 가자.”
짧게 말을 건넨 그가 몸을 날렸고, 진무린 역시 발을 굴러 경공을 펼쳤다.
세찬 겨울바람을 헤치며 달리느라 내공의 소모가 좀 더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그 정도는 이미 넘어선 수준이었다.
산을 타고 오르고, 높은 절벽을 뛰어내리며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린 두 사람은 두 시진쯤 지난 뒤에 적당한 바위산에 내려앉았다.
잠시 휴식한 두 사람은 다시 두 시진을 더 달렸고, 진무린이 꺼낸 술과 만두로 간단하게 요기했다.
바로 달리기는 어려웠다.
먹은 것을 소화할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고, 전력을 다해 네 시진 가까이 달린 뒤라 소주천이라도 마치는 것이 좋았다.
남굉모가 가부좌로 앉는 것을 본 진무린은 소주천을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때였다.
“검기를 낼 때 말이다.”
남굉모가 처음으로 화산의 일을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