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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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3화
은천검제
제103화
암연을 많이 상대하지는 않았지만, 나타난 중년 남자 역시 처음 마주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강호 곳곳에 연락망을 심어놓으려면 암연을 구성하는 인원이 적지 않을 텐데 어떻게 비밀을 유지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의문을 뒤로한 진무린은 암연의 기운을 확인한 뒤에 궁금한 점을 꺼내 들었다.
“제가 찾아뵈었던 사고께서 피음향을 떠나셨습니다. 현재 위치를 알고 싶습니다.”
질문을 건넨 직후였다.
“연고께서는 독곡에 계십니다.”
“연고라니요?”
“암연에서 그분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최소 며칠은 걸리겠지 했던 답이 바로 나왔다.
확실히 문주 임운령과 암연은 양소소를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독곡의 위치를 알고 싶습니다.”
“피음향에서 귀주 방향으로 가시다 보면 다섯 개의 봉우리가 둘러싼 계곡이 있는데 그곳이 독곡입니다. 거대한 항아리 모양이라 바로 알아보실 테고, 연고께서는 그중 두 번째 봉우리에 계십니다.”
남굉모의 독촉에서 벗어날 정보를 전해 준 중년 남자는 이어 궁금했던 소식을 진무린에게 전해주었다.
“전 사부께서 폐관수련에 드셨습니다. 유출된 본문의 무공을 대신할 검법을 고민하시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먼저 들은 것은 은천문의 사정이었다.
은천검법과 섬전검법이 유출되었다.
다행히 묵룡검법은 유출된 흔적이 없으나 반대로 은천문 내에서도 익힌 이가 몇 되지 않을 만큼 어려운 탓에 은천검법과 섬전검법을 대신할 검법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할 사람은 사부 전도위 밖에 없었다.
“부맹주와 약연, 자경을 뇌옥에 넣은 맹주께서 황가장의 가신들을 불렀습니다. 맹주가 구대문파를 배척하고 정도맹을 독차지하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진무린이 떠올린 황종관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말이 나왔다면 그동안 사사건건 권위를 내세우며 정도맹을 좌지우지하려던 이들의 불평이리라.
그렇게 은천문과 강호의 정세에 관해 들은 다음이었다.
“진 대협. 진청검왕이라는 별호를 들어보셨습니까? 진 씨 성을 지닌 젊은 검왕이라는 뜻입니다.”
중년 남자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당연히 처음 듣는 별호였다. 그러나 설명을 듣자 짐작하는 바가 있어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풍령관 일 이후 강호에 급격하게 퍼지는 별호입니다. 화산과 아미가 입단속을 하고, 암연이 최선을 다해 소문을 잠재우고 있으나 현재 강호에서 가장 자주 입에 오르는 별호가 진청검왕입니다.”
지금껏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나마 소문이 더디게 난 것이지만, 그래도 유명세를 피하고 싶었던 진무린은 답답한 얼굴로 쓴 입맛을 다실 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진청검왕에 관한 설명이 지금 진 대협의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진무린의 시선을 받은 중년 남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검을 등에 묶어 소지하는데 눈빛은 호랑이와 같아 마주 보기 어렵고, 눈썹이 올라가 머리에 닿으며, 체격이 팔 척을 넘어선다는 게 일반적인 진청검왕에 대한 묘사입니다.”
들은 대로 떠올리면 아예 괴물의 형상이라, 진무린은 기가 막힌 웃음을 짧게 토해냈다.
“암연이 수고해주신 덕분이겠군요.”
“노대의 지시에 따를 뿐, 수하인 저는 그런 부분까지는 짐작하지 못합니다.”
대강 듣고 싶었던 내용을 모두 들었다.
“혹 본문에 전할 말이 있으십니까?”
“화산에서 마선이절과 구정봉을 맞았던 일을 알려주시고, 사고를 뵐 때까지 파천신군 남굉모 선배와 함께 지낼 것이라 말씀드려 주십시오. 이후에 화산에 잠시 들를까 생각 중입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진 대협.”
인사를 전한 중년 남자가 먼저 몸을 돌려 장사의 반대편으로 걸었다.
사방에 어둠이 깔리는 시간이었다.
겨울의 밤은 서둘러 찾아와 짧은 순간에 자리 잡는다.
진무린이 몸을 돌려 다점으로 향할 때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반점과 객잔들이 등불을 내걸고 있었다.
일이 쉽게 풀렸다.
먼저 저녁을 먹고, 밤이나 혹은 내일 아침에 독곡으로 향하면 남굉모와 양소소의 일이 반쯤 마무리되겠다.
모처럼 홀가분한 심정으로 다점을 향해 움직이면서도 혹여 괴팍한 남굉모가 사고를 일으킨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진무린의 걸음을 재촉했다.
“다녀왔습니다.”
다행히 남굉모는 다점 안에 그대로 있었다.
그의 눈이 꿈틀하는 것으로 봐서 꽤 인내를 발휘한 눈치였다.
진무린은 더할 수 없이 고마워하는 노파에게 셈을 치른 뒤에 남굉모와 함께 다점을 나섰다.
“사고께서 계신 곳을 알았습니다.”
“벌써?”
장사의 길을 걸으며 진무린이 소식을 전했고, 남굉모가 반가운 얼굴로 반문했다.
“피음향에서 귀주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독곡이라는 곳에 계신답니다.”
진무린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걸음을 멈춘 남굉모가 뜨거운 숨을 푹 내쉬었다.
“에이, 고약한 놈.”
그는 먼저 이해하기 어려운 거친 말을 쏟아냈다.
“어쩌면 성질머리가 그리 못됐을까.”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흠! 독곡이라면 네가 가서 그 아이를 데려오는 게 좋겠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심지어 지금껏 그 어떤 일에도 거칠 것 없었던 남굉모가 무언가 켕기는 표정으로 고개마저 저었다.
“선배를 보지 않겠다며 피음향마저 떠나셨다는 사고께서 후배가 매달린다고 마음을 바꾸시겠습니까?”
“그래서 나더러 독곡에 함께 가자고?”
진무린은 남굉모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필시 독곡에 누군가 껄끄러운 사람이 있는 눈치였다.
도대체 누가 있어 수백 년을 묵은 영물까지 상대했다던 파천신군을 저토록 움츠리게 할까.
“후배에게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래야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닙니까?”
“혼자 다녀오면 되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확실히 남굉모는 괴팍했고, 반응을 예상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가볼 테니 어디 계실지 알려주십시오.”
“너를 어떻게 믿고 혼자 보내?”
함께 가기는 싫고, 진무린 홀로 가는 건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고.
말도 안 되는 반응에 진무린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는데 남굉모는 입술만 비틀 뿐 난처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어차피 저녁입니다. 식사도 할 겸, 근처 객잔에 들러 충분히 고민하고, 독곡에는 내일 일찍 출발하는 게 어떠십니까?”
“술만 있다면 어디든 괜찮다.”
진무린의 제안을 남굉모가 순순히 받아들였다.
**
하후도를 대신해 움직이는 궁도는 눈매가 중후하고 행동이 침착해서 관직에 있는 이가 아닌가 싶은 느낌을 주었다.
강호에 나선 그가 처음 찾은 곳은 사시사철 만년설을 머리에 올린 대리산이었고, 그곳에 자리한 점창파였다.
대리국 귀족의 후예들이 세웠다는 말이 있어서 그럴까.
사천에 위치한 점창파는 자존심이 강하고, 다른 이들을 쉬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점창이 그들의 원로이자 부맹주인 소강명이 뇌옥에 갇혔음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은 것은 궁도가 방문하여 내놓은 제안 탓이었다.
점창파의 장문인 섭가평은 세 가닥으로 기른 짧은 수염을 매만지며 앞에 앉은 궁도의 제안을 되새겼다.
“결심이 서셨소?”
“장로들과 의견을 조율했습니다. 결과를 말씀드리기 전에 분명하게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장문인께서는 편히 말씀해주시오.”
하후도가 가볍고 내세우기 좋아한다면 궁도는 말 한마디에도 신뢰를 담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장로들은 찬반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장문인이 결정하게 되어 있으니 이 자리에서 정할까 합니다.”
서두를 길게 뺀 섭가평이 입맛을 다신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소림과 무당이 진실로 동조하겠습니까?”
“그 점은 이미 말씀드린 바요. 그 두 곳은 어쩔 수 없이 부맹주의 구금에 동의한 터라 점창과 공동에 미안한 마음을 품은 참이오. 장문인께서 결정을 내려주시는 대로 내가 두 곳을 찾아뵙고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겠소.”
“만약 소림이나 무당이 반대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때는 없던 일로 하면 됩니다. 또한, 내가 드린 선물과 전표는 성의를 표한 것이니 어떤 경우에도 반환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오.”
시원하게 답을 낸 궁도가 넉넉한 미소를 그렸다.
말이 좋아 선물과 전표이지, 궁도가 건넨 것은 실로 대단해서 점창의 다섯 해 생활을 모두 해결할 수준이었다.
“나서기 께름칙하다면 이쯤에서 멈추셔도 되오.”
“흐음.”
섭가평은 다시 한 번 세 가닥 수염을 쓸어내렸다.
궁도는 정도맹으로 향하려는 섭가평을 붙들었고, 천하영웅대회를 개최하라 제안했다.
평화가 길었고, 그 끝에서 분란이 끊이지 않으니 영웅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시기적절했다. 마침 각지의 고수들과 피 끓는 신진들이 이름을 떨칠 기회를 노리는 상황이었다.
공고만 내면 정도맹과 구대문파가 유지하던 질서를 갑갑해 하던 이들이 대거 참가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천하영웅대회를 개최한 뒤에 그곳에 모인 군웅들을 아울러 할 일이 있는가?
마교를 치겠다든가, 아니면 흑사련을 상대한다든가 하는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궁도가 제안한 것은 강호무림맹의 창설이었다.
소림과 무당이 동조한다면 구대문파는 기존의 정도맹과 신설되는 강호무림맹으로 갈라지게 된다.
입맛을 다신 섭가평은 내내 가슴에 두었던 질문 두 가지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무림맹을 창립하는 일이 회주께는 어떤 의미입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소? 강호에는 두 곳의 숨은 세력이 있으니 그중 한 곳이 구주라는 이들이고, 다른 곳이 이번에 부맹주를 구금시킨 은천문이라는 곳이오.”
알던 내용인데도 은천문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섭가평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은천문은 간교하게도 화산을 중심으로 소림, 무당과 발을 넓혀놓아 그 외에 구대문파에 속한 곳을 멸시하는 집단이오. 그러다가 이번 일을 통해 그 의지를 내놓은 것이지요.”
“신임 회주의 말씀을 들으니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솔직히 강호일통은 이전의 하후도 회주께서 하셨던 말씀이오. 반대로 내가 보기에도 은천문은 흑사련과 마교를 상대로 강호의 근심을 덜어냈으니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합니까?”
섭가평의 질문을 들은 궁도는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의 군웅들은 단순하지요. 은천문은 만인의 근심을 제거하는 모습으로 시선을 얻었으니 이대로 두면 장차 강호는 그들의 몫이 될 게요.”
궁도의 이어진 설명에도 섭가평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라진 하후도와 뇌옥에 갇힌 소강명 사이에 무언가 말하지 않은 내막이 있는 것은 눈치챘다.
그러던 와중에 느닷없이 궁도란 자가 나타나 천하영웅대회를 개최하고, 강호무림맹을 만들자고 제안하니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치기 어려웠다.
“강호일통의 야욕을 저지하려면 은천문을 직접 상대하면 될 일이 아닙니까?”
“바로 그 점이 문제요. 앞에서 말했듯이 은천문이 군웅들의 시선을 당겼고, 진청검왕이라는 인물까지 만든 마당에 내가 나서 저들이 강호일통의 야욕을 품었다고 외친다면 누가 믿겠소?”
“회주께서 진청검왕을 쓰러트리셔도 될 일이 아닙니까?”
“지금 그리하면 아마 정도맹과 구대문파가 나를 공적이라 하지 않겠소? 멋모르는 강호 군웅들 또한 영웅을 쓰러트린 악한으로 나를 몰아댈 테니 얻는 것은 없고 손해만 남는 일이 되지요.”
섭가평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궁도의 답변은 막힘이 없었다.
“영웅대회를 통해 강호무림맹이 결성되면 장문인께서 앞장서 저들의 야욕을 밝혀 주시오. 그렇게 한다면 군웅들이 은천문을 바라보는 시각이 분명 바뀔게요.”
결국, 섭가평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를 더 여쭙겠소. 전임 회주는 어찌 되셨소?”
“흐음.”
이번 질문에서 처음으로 궁도가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부맹주와 손을 잡고 사리사욕을 채운 것으로 드러나 그 벌을 받았소. 오늘 드린 야명주는 그가 소강명 부맹주와 빼돌린 것 중 되찾은 일부라오.”
섭가평은 수염을 쓰는 척 얼굴을 가리고는 이를 깨물었다.
점창의 장로인 소강명은 언제부터인가 감추는 것이 있었다. 그런 모습이 의심스럽더니 결국 소속된 문파를 속이고 개인의 치부에 열중했던 모양이었다.
“암중세력은 두 곳이오. 하나는 은천문, 다른 하나는 구주. 은천문은 구대문파가 감당할 만하지만, 구주는 어렵소. 조직 자체가 흩어져 있고 개개인의 무공이 고강한 탓이오. 우리의 상대는 구주요. 그들이 드러나면 이 몸이 앞장서겠소.”
섭가평은 잠시 시선을 돌려 생각에 잠겼다.
은천문과 구주, 지금 눈앞에 있는 궁도라는 인물,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피하기에는 이미 너무 깊게 발을 들여놓은 탓도 있었고, 소림과 무당이 궁도와 연결되었다는 말이 주는 무게도 있었다.
“공동이 보조를 맞출 테고, 소림과 무당이 목소리를 함께한다면 천하영웅대회는 성황을 이룰 것이오. 아무리 부맹주가 치부했다 하더라도 그를 벌하는 것은 점창이어야 하지 않겠소?”
궁도가 전한 마지막 말을 들은 섭가평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신임 회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섭가평이 뜻을 밝히자, 궁도가 넉넉한 미소로 화답했다.
**
진무린은 객잔의 작은 별채를 얻었고, 그곳에 남굉모와 함께 들었다.
제법 넉넉하게 저녁을 준비했는데 남굉모는 세 단지의 술을 비우도록 요리에 손조차 대지 않았다.
“크허.”
세 번째 단지를 비운 남굉모가 통쾌한 소리를 내뱉으며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무슨 일일까?
도대체 어떤 사연이기에 그것을 털어놓는데 세 단지의 술이 필요할까?
궁금했으나 진무린은 묵묵하게 술잔을 비우며 남굉모의 앞자리를 지켰다.
달이 높다랗게 떠서 벽에 걸어놓은 등마저 얼어붙은 것처럼 보이는 깊은 밤이었다.
“빙궁에 갔을 때였다.”
술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인 듯 눈이 벌겋게 변한 남굉모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