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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01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49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1화

은천검제

제101화

 

바람을 탄 눈발이 양인각 앞을 휘몰아쳤다.

구철환과 부양곽은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챈 것처럼 밀려나는 와중에도 미친 사람들처럼 팔을 마구 휘저으며 눈발에 맞섰다.

놀라운 광경에 은혼이 장로들과 함께 물러났고, 일대 제자들도 몸을 빼내며 진무린과 마선이절을 살폈다.

화산에 정적이 감 돈 다음이었다.

앞섶이 누더기가 될 정도로 갈라진 구철환과 부양곽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사람 덕분에 목숨을 건진 구정봉이 얼이 빠진 눈으로 진무린과 바닥에 널브러진 수하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나마 마선이절이 막은 덕분에 서 있기는 하나 수하들의 숫자는 채 열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혹시 검기냐?”

피투성이로 널브러진 수하들에게서 고개를 든 구정봉이 놀란 음성으로 질문을 건넨 뒤였다.

“영약을 그리 처먹고, 내내 가르침을 들었는데도 검기를 펼쳐내기가 그리 힘드니 세상에 너만 한 둔재가 또 있을까 싶다.”

이럴 때는 좀 조용해도 좋으련만 얄밉게도 대꾸는 남굉모의 입에서 나왔다.

놀라운 광경에 싸움이 잠시 중단되었다.

마교의 수하들이 스물 넘게 쓰러진 참이었다. 

거기에 구정봉은 은혼과 세 사람의 장로를 어찌하지 못했고, 싸움을 뒤집어주리라 기대했던 두 사람, 구철환과 부양곽마저 진무린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흥!”

화산의 제자들이 쓰러진 장로와 매화검수 일대 제자를 빼내느라 잠시 분주한 틈을 타고 구정봉은 짧은 코웃음을 토해냈다.

“정도문파라는 것들의 비겁한 짓은 화산이라 해도 다르지 않구나! 차라리 나서서 권각을 낸다면 모를까, 비겁하게 지붕에 앉아 기운을 빌려준단 말이냐!”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아예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도를 집어넣기까지 했다.

“경고를 전하기 위해 들렀던 참이니 이쯤에서 돌아가겠다. 훗날 다시 마주할 때는 정정당당한 모습이길 바란다.”

어처구니없는 반전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응은 진무린이 아니라 화산의 몫이었다.

은혼은 먼저 널브러진 마교 수하들과 한쪽으로 옮겨놓은 화산의 제자들을 보았고, 이어 가슴이 갈라진 장로와 피에 젖은 일대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어떤 결단을 내릴까.

장로들과 제자들을 위해 구정봉을 보낼까, 아니면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이 싸움을 마무리 지을까.

은혼은 먼저 진무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부의 해한 원흉을 앞에 두고 물러서지 않을 참입니다.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진무린이 바라마지 않던 결단이었다. 다만, 입을 열어 답을 하면 화산이 아니라 진무린이 해결한 모양새가 된다.

‘장문인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제 검은 힘을 보탤 것입니다.’

진무린은 굳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하자는 수작이냐?

구정봉이 좌우로 고개를 돌린 직후였다.

“사부님을 해한 원흉을 어찌 이대로 돌려보낼까! 화산은 마땅히 너의 목을 베어 사부님의 원한을 갚겠다!”

은혼이 비분강개한 음성으로 구정봉을 꾸짖었다.

이때 그의 표정과 눈빛에는 각오가 가득해 듣는 이로 하여금 검자루를 움켜쥐게 하는 힘이 있었다.

“화산은 들어라! 저들이 간교한 수작으로 빠져나가려 한다만, 반드시 구정봉의 목을 잘라 등선하신 사부의 원한을 풀 것이며! 또한, 화산은 함부로 올라와 마음대로 돌아가는 곳이 아님을 온 강호에 알릴 것이다!”

은혼의 단호한 명이 떨어진 직후였다.

“장문인의 명을 받습니다!”

제자들이 일제히 답을 올렸다.

“장문인은 끝내 관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겠단 말이냐! 이대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만약 길을 막는다면 본교의 무서움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긴말 필요 없다! 네가 돌아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으니 목 위에 달린 머리를 두고 가라!”

사태를 짐작한 구정봉이 도를 다시 붙들었다.

그리고는 야비하게도 은혼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카아앙!

끝을 봐야 끝날 사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은혼과 구정봉, 둘 중 한 사람이 쓰러지지 않는다면 끝나기 어려운 싸움이고, 어차피 한 쪽은 살기를 바라기 어려운 터라 싸움은 더욱 치열했다.

은혼과 장로 셋은 구정봉과 우열을 가리기 어렵고,

“하! 하!”

목상진을 펼친 곳은 그나마 수적 우위를 타고 승기를 잡아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뜨거운 숨을 토해낸 구철환과 부양곽이 권과 구부린 손가락을 뻗으며 동시에 진무린에게 달려들었다.

직전에 득을 얻은 춘설난무로 마선이절을 쓰러트린다면 단박에 승기를 얻으련만, 

쉐에엑!

진무린이 검을 내면 반드시 두 사람의 권과 응조수가 연결 부위를 끊었고, 예상되는 다음 초식의 앞을 막았다.

선인의 경지다.

저 두 사람 역시 진무린처럼 상황을 뇌리로 담고, 기운이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흐르는지 분명하게 아는 눈치였다.

남굉모의 조언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나 대성은 아니었고, 경지를 얻은 것과 승패는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진무린은 재차 뼈저리게 실감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춘설난무에 두 번 당하지 않겠다는 투로 사력을 다해 검의 길을 막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은천문의 묵룡검법을 두 사람이 알지 못해 틈틈이 진무린이 승기를 얻는다는 점이었다.

우우우우웅!

갑갑함을 이기지 못한 검이 울었고, 마선이절 두 사람은 머리칼이 하늘로 솟을 만큼 기운을 뿜어냈다.

남은 것은 은천수호검이었다.

한 번 펼치면 두 사람을 곤경에 넣을 수 있고, 두 번 펼치면 둘 중 한 명을 벨 수 있다는 자신쯤 있었다.

그러나 남굉모와 같은 고수가 지켜보는 자리이고, 문주에게만 전해지는 검법을 이런 자리에서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연륜과 경험은 과연 무서웠다.

쉐에엑! 쉑!

진무린이 펼친 검과 검 사이를 주먹이 파고들었고, 피하기 무섭게 구부린 손가락이 급소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공방이 계속 이어질 때였다.

“참으로 답답하다!”

탄식 같은 남굉모의 음성이 양인각 앞에 울렸다.

“장문인을 구할 때는 나오던 검기가 느닷없이 사라졌으니 이는 마음가짐의 차이가 아니냐!”

“선배는 제발 그 빌어먹을 입을 닥치시오!”

다급하게 튀어나온 구철환의 거친 말에도 남굉모는 흔들림이 없었다.

“노괴의 권을 가르고 응조수를 잘라. 이미 사력을 다한 그들의 앞섶을 너덜거리도록 갈랐는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겁날까.”

말하는 바는 알았다.

그러나 기운을 내지 못하는 이유가 두려움 때문은 아니잖은가.

그저 느끼기에 검기를 내는 것은 아직 순간의 감각이 필요한 일이지, 진무린이 마음대로 조절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수련이 필요한 일이고, 그만큼의 시간도 필요했다.

이때 한쪽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마교의 수하들이 모조리 쓰러졌구나!”

곧바로 남굉모의 설명도 이어졌다.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런데 남굉모의 설명을 듣는 순간, 진무린의 어깨를 짓누르던 짐 하나를 내려놓은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지금이다!’

실패한다면 어려움이 있겠으나, 파천신군 남굉모가 함께 있으니 화산은 지켜지리라.

잊고 있었던 각오도 떠올랐다.

이런 자들이 언제고 튀어나올 수 있는 곳이 마교가 아니던가, 마선이절 따위에 밀리고 어찌 구정봉을 내놓으라 하겠나.

진무린은 이를 다시 악물며 등룡창천의 기운을 있는 힘껏 끌어올렸다.

부으으응!

기운이 변한 것을 느낀 구철환이 죽기를 각오한 독한 눈빛으로 권을 찔러넣었으나 진무린은 물러나지 않았다.

권이든, 응조수든, 맞서는 것은 모두 갈라주마!

쉐에에에엑! 쉐에에에에에엑!

눈부신 검광이 다시 양인각 앞을 뒤덮을 때, 구철환과 부양곽이 급하게 몸을 뒤로 날렸다.

구철환의 주먹에 어깨가 부러질 것쯤 각오했으나 그는 이미 몸을 빼기로 작정했던 모양이었다.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팔을 휘두르는 부양곽을 놔둔 채 구철환은 구정봉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산 아래로 몸을 날렸다.

검광이 스러진 다음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비틀거리던 부양곽이 짝짝이 눈을 뒤틀다가 마침내 털썩,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처음으로 선인의 경지를 이룬 무인과 나눈 대결이었다.

물론 남굉모 역시 이 수준이겠으나 생사를 걸고 다툰 대결이 아니니 그때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진무린은 구철환과 구정봉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아쉬운 것은 구철환이 도주할 정도로 아직 제대로 펼치지 못한 것이고, 다행인 점은 두 번이나 펼친 덕분에 반쯤 감을 잡았다는 사실이었다.

무언가 허탈한 결말이었다.

그러나 구정봉과 구철환이 도주하면서 화산의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장로 분들은 일대 제자들과 함께 치료를 선행하여 몸을 살피십시오.”

“장문의 명을 받소.”

은혼의 지시를 받은 장로들이 바삐 움직여 다친 이들을 옮겼고, 이대 제자들이 나서 바닥을 정리했다.

“진 대협. 오늘 주신 큰 도움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혼이 인사를 건넬 때쯤 남굉모가 지붕에서 내려왔다.

“화산의 은혼이 고인을 뵙습니다.”

“장문인이 이리 고개 숙이는 것은 법은 없네. 특별히 도움 준 것도 없으니 이만 몸을 세우게.”

은혼에게 답례한 남굉모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부양곽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놈 참. 평소에 한 짓을 생각하면 시체를 여섯 토막 내도 시원찮을 텐데 화산이 그런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 그 점이 아쉽다.”

혼잣말을 뱉어낸 남굉모는 이어 양인각의 구석에 몸을 숨긴 표충량을 찾았다.

“저 아이를 잠시 봐도 되겠나?”

“그리하십시오.”

은혼이 눈짓하자 표충량이 빠르게 다가왔다.

“인사드려라.”

“화산의 제자 표충량이 고인을 뵙습니다.”

기껏 보겠노라 말해놓고도 남굉모는 잠시 표충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혹시 기안통의 능력이 있지 않으냐?”

“제자는 아직 배움이 짧아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합니다.”

“한 번 본 것을 절대 잊지 않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냐?”

눈치를 살핀 표충량이 은혼의 끄덕임을 보고서야 “그렇습니다, 고인.”하고 입을 열었다.

“너는 이놈의 검을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맞느냐?”

“진 사숙의 검이라면 분명 보았습니다.”

“또한, 마교의 인물이 같은 검법을 구사하는 것도 전에 본 적이 있을 게다.”

“예, 고인.”

숨 쉴 틈 없이 오간 대화의 끝에서 진무린과 은혼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무린의 검법이야 오늘도 그렇고, 전에 은혼을 구해줄 때 보았다고 친다. 그런데 마교의 인물이 은천검법을 구사하는 것을 언제 보았을까.

진무린과 은혼의 반응을 살핀 남굉모가 눈가를 좁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 보았느냐?”

“청강 사조의 등에 업혀 있을 때 보았습니다.”

당시에 흉수들이 사용한 수법을 모두 기억한다고?

같은 능력을 지닌 진무린조차 놀랄 지경이었으니 은혼의 반응은 더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청강이라는 사조가 낸 검도 모두 기억하고 있겠구나?”

“그러합니다, 고인.”

답을 들은 남굉모가 진무린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표충량이 이대로 성장한다면 은천검법을 어떻게 다른 무기에 변형시키는지, 또 흉수를 상대할 때 청강이 어떤 검법을 사용했는지 모두 깨닫게 된다.

멀리 볼 것도 없다.

화산이 표충량을 붙들고 매달린다면 적어도 육 개월이나 일 년 안에 섬전검법에 대한 파훼법까지 알아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진 대협. 본파는 염려하시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은혼이 무거운 음성으로 다짐을 건넸으나 은천문의 검법이 유출된 것은 이미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진무린은 참담한 심정으로 은혼에게 답을 건넨 뒤였다.

“이제 일을 마쳤으니 너는 나와 함께 가자.”

남굉모가 독촉하고 나섰다.

“선배와 함께 잠시 찾을 분이 있습니다. 일을 마치는 대로 마교로 향할 생각이며 그 전에 반드시 화산에 들러 장문인께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진 대협.”

대꾸를 내놓은 은혼이 이번엔 남굉모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인께 큰 도움을 얻었는데 이리 가시면 서운합니다.”

“되었네. 과거의 인연이 떠올라 몇 마디 거든 것을 어찌 도움이라 하겠나. 그럼 일이 급해 이만 감세.”

은혼에게만은 예를 갖춘 남굉모가 독촉하듯 진무린을 노려보았다.

이왕 나서기로 한 마당이었다.

훌쩍 몸을 날린 진무린을 따라 남굉모가 발을 구르니 두 사람은 마치 새와 같은 모습으로 화산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화산을 벗어난 진무린은 곧장 양소소를 향해 달릴 생각이었다.

“잠시 멈춰라!”

그러나 남굉모는 오전에 진무린을 만났던 얼어붙은 개울 근처에서 우선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입니까?”

“소소가 어디 있는 줄 아느냐?”

“당연히 피음향이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곳에 계십니까?”

“피음향이라면 가봐야 소용없다.”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인지, 아무리 막무가내라고 해도 당최 짐작하기 어려운 대꾸여서 진무린은 잠자코 그의 설명을 기다렸다.

“소소가 그곳을 떠났다. 은천문에 암연이란 조직이 있지 않으냐? 그들에게 부탁해 소소의 위치를 알아달라고 해.”

“사유가 무엇입니까?”

“뭐라? 사유라니?”

“사고께서 그곳을 떠났고, 선배가 이동한 곳을 모르는 사유 말입니다.”

“네놈에게 그걸 일일이 말해야 한단 말이냐?”

“사고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무린의 말에 남굉모의 눈이 꿈틀했다.

그의 연륜과 경험, 무공을 꿰뚫는 눈이 대단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오전에 잠시 대결해 본 것으로 보아 그는 구철환, 부양곽보다는 확실히 윗길이나 홀로 진무린을 압도하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네놈에게 무공을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서운해서 떠났다. 이제 이유를 들었으니 암연을 부를 만하냐?”

“사고의 삶을 연장하는 데 필요한 영약을 네 가지나 제게 주신 이유도 그렇지만, 무공을 알려주지 않았다며 몸을 감추셨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차라리 진실을 알려주십시오.”

당당한 진무린의 요구에 남굉모는 뜻 모를 한숨을 먼저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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