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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00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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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0화

은천검제

제100화

 

불행하게 은혼은 아직 지붕에 올라앉은 구경꾼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였다.

“파천신군 남굉모 선배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을 받은 진무린이 답을 주었다. 

인사를 하려 해도 당장 결전이 눈앞에 있는 데다 이미 지붕에 올라간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도움을 주셨으나 감사의 말씀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어수선한 상황이 정리되면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나는 신경 쓸 것 없네. 장문인은 급한 불을 끄는 일에 집중하게.”

그래도 화산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전에 없이 예의를 차린 남굉모의 대꾸가 있었다.

“다행히 고인께서 도움을 주셨다. 이대 제자들은 문선각이 아니라 잠시 비켜나서 앞으로 펼쳐질 대결을 눈에 담도록 해라.”

짧게 지시를 내린 은혼이 검을 꺼내 들었다.

“세 분 장로는 나를 도와 구정봉을 상대하고, 사제와 다른 장로께서는 일대 제자가 진을 형성하면 그 안에서 저들의 수하를 상대해 주시오. 일대 제자들은 목상진을 펼쳐 장로와 매화검수를 보호하라!”

“장문의 명을 받았소!”

“장문인의 명을 받습니다!”

장로들이 움직여 세 명은 은혼의 뒤를 받쳤고, 문혼과 남은 장로들은 매화검수와 함께 일대 제자들 앞으로 향했다.

당황스러운 순간을 이겨낸 화산은 전통과 연륜에 걸맞은 행동으로 구정봉 일행을 마주했다.

피할 수 없는 대결이었다.

진무린은 감았던 천을 펼쳐 오랜만에 검을 뽑아 들었다.

며칠 되지 않았는데 새삼스러운 감각이 손에서 맴돌았고, 검을 통해 내뿜는 기운이 새롭게 느껴졌다.

불안한 것은 아직 녹이지 못한 영약의 기운인데 그렇다고 마선이절에게 양해를 구할 것도 아니어서 조심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진 대협. 화산이 감당해야 할 어려움인데 가장 어려운 상대를 부탁드려 송구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흥! 진무린이란 자만 내놓는다면 지금이라도 화산은 탈이 없을 것이오!”

은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정봉이 진무린을 노려보았다.

“원하는 것이 나 한 사람이란 뜻이냐?”

“그렇다! 네가 홀로 나선다면 화산은 경고를 전한 것으로 끝내겠노라 이미 말했던 참이다.”

진무린은 이제야 구정봉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대략 감을 잡았다.

“오냐! 그렇지 않아도 너를 찾아 마교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당장 앞으로 나서!”

이럴 때 진무린은 오히려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걸리는 것이 있으니 바로 화산의 입장과 체면이었다.

“진 대협. 저들의 요구를 수락한다면 화산이 어찌 낯을 들고 강호를 활보하겠습니까? 본파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조건입니다.”

은혼에게 죽음과 화산의 명예,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일 테고, 진무린에게 죽음과 은천문의 명예 중 하나를 고르라 해도 역시 선택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장문인의 뜻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답을 한 진무린은 내공을 끌어올려 등룡창천의 기운을 검과 상단전을 통해 펼쳤다.

우우우우웅.

검이 나직하게 우는 순간에 구철환은 인상을 찌푸렸고, 부양곽은 확인처럼 구정봉을 살폈다.

“지루하다! 얼른얼른 끝내고 갈 길 가자!”

지붕에 앉아 지켜보던 남굉모의 독촉이 재차 떨어질 때 화산의 일대 제자들은 목상진을 펼쳐 수하들을 둘러쌌고, 그 안에서 장로들과 매화검수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양의추월도법을 준비했다.

기다리기 지루했을까.

“오너라.”

소매를 걷은 구철환이 부르는 것처럼 진무린을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등룡창천의 기운을 통해 느낀 구철환과 부양곽은 그동안 상대했던 그 어떤 적수보다 강했다.

경지가 중요하다고 하나 결국 승패는 경험과 연륜, 그리고 찰나의 판단이 좌우한다.

두 사람은 이미 선인의 경지를 넘어선 터라,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고, 숫자 또한 불리하다는 사실을 떠올려 진무린은 호흡을 재차 가다듬었다.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내뿜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적을 앞에 둔 진무린의 검에서 서리처럼 묵빛 기운이 뿜어졌다.

저들 역시 진무린과 같이 기운을 통해 사물을 뇌리에 담는 수준이라 자연 일어난 현상이 아닌가 싶었다.

검에서 한 자가량 뿜어진 기운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광경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품게 하였는데 이는 마선이절 두 사람도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그들 역시 선뜻 권을 내지 못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구정봉이었다.

“하앗!”

길어지는 대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그는 거센 기합과 함께 도를 휘둘렀다.

카앙! 캉! 카가가강!

그를 신호로 수하들이 도를 꺼내 달려들면서 화산의 양인각 앞에 살벌한 대결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진무린과 마선이절은 누구 한 사람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답답하다! 답답해!”

요란한 고함, 검과 도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사이에서 남굉모의 음성은 또렷하게 세 사람의 귀를 파고들었다.

“저놈이 기운을 뿜어내는 것은 검기를 뿌리기 전의 준비 동작과 같다. 권을 쓰는 너희 둘이 시간과 거리를 둘수록 불리하다는 것을 왜 몰라!”

아무리 진무린이 밉다고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의심 많은 두 사람의 눈 끝이 꿈틀하며 시선을 교환한 직후였다.

“한 놈은 바싹 붙어 권을 내고, 다른 놈은 삼 보 거리를 유지하되, 놈이 검법을 연달아 펼치지 못하도록 위치를 바꾸면 능히 재미를 볼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눈싸움으로 시간을 끌 참이냐!”

확신이 선 모양이었다.

구철환이 거세게 권을 내지르며 진무린에게 달려들었다.

쉐엑! 카앙!

진무린이 검을 걷어 올리며 그의 권을 막아내는 순간, 쇠망치를 때린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부웅! 붕!

몸을 뒤로 빼지 못했다.

어느 틈에 뒤를 막아선 부양곽이 독수리의 발처럼 웅크린 손을 뻗어 옆구리를 파고든 탓이었다.

급히 몸을 돌린 부양곽의 손을 피한 진무린은 그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선인의 경지는 대단했다.

허리를 젖혀 검을 피한 부양곽은 그 와중에도 양손을 휘저어 진무린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동시에 발을 뻗어 발목을 노렸다.

쉐에엑! 카앙!

검을 날려 부양곽의 손을 때려낸 진무린은 왼발을 뻗어 발바닥으로 그의 발을 밀쳤다.

진무린의 발과 부양곽의 발이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찰나를 노리고 구철환이 연달아 주먹을 내질렀다.

쉐에에엑! 카가가강!

진무린은 먼저 검으로 구철환의 주먹을 쳐냈고, 튀어나오는 검을 그대로 뻗어 부양곽의 왼발을 노렸다.

퍼억!

부양곽은 놀랍게도 손바닥으로 땅을 때리는 수법을 이용해 몸을 눕히고는 맹렬하게 회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시 교묘한 각법으로 진무린의 머리를 노렸는데, 이때 구철환은 비겁하게 뒤를 파고들어 연속으로 등을 향해 권을 찔러 넣었다.

쉐엑! 쉐에엑! 카가강!

상체를 비튼 진무린이 구철환의 주먹을 때려내며 위기를 넘겼는데 이후에도 숨 가쁜 공방은 계속 이어졌다.

마선이절에게 남굉모의 조언은 적절했고, 유용했으며, 효과적이었다.

두 사람은 진무린에게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어쩌다 검을 내더라도 바로 뒤를 노려 검법을 이을 틈을 주지 않았다.

지켜보던 이대 제자들이 넋을 빼앗겼을 만큼 세 사람의 대결은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절묘한 동작의 연속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아무리 두 명을 상대한다고 해도 진무린의 검이 너무 쉽게 막힌다는 점이었다.

다른 이는 모른다.

그러나 진무린만은 마선이절 두 사람이 섬전검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진무린의 검이 나가는 순간을 파고드는 두 사람의 대응이 그랬고, 초식과 초식이 이어지지 않도록 맥을 끊는 수법을 보면 익히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하! 하!”

일대 제자들은 목상진을 펼쳐 마교 수하들의 빈 곳을 노렸다.

그 안에서 장로와 매화검수들은 두 사람이 한 명의 수하를 상대했는데 양쪽 모두 피에 젖었을 정도로 득실을 따지기 어려운 사투였다.

은혼과 세 명의 장로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카앙! 카가가각!

그런데 한순간 구정봉이 섬전검법을 펼쳐 검을 휘감고는 잠력대법을 이용해 도를 뿌리는 탓에 장로 한 명의 가슴이 갈라질 정도로 위기를 맞았다.

“네놈이 흉수로구나!”

청강을 쓰러트린 것이 바로 섬전검법 아니던가.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기는 했으나 그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닌지라 은혼은 이를 악물며 구정봉에게 달려들었다.

구정봉이 굳이 섬전검법을 펼쳐가며 노린 기회로, 흥분한 은혼을 단숨에 쓰러트리려는 계략이었다.

“장문인이 저리 흥분해서야 무엇에 쓸꼬!”

그런데 그 결정적인 순간에 또다시 구경꾼 남굉모의 탄식이 모두의 귀를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아직 대성하지 못한 검법에 휘둘리는 것은 화산의 검에 자신이 없어서란 말인가.”

따끔한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은혼은 그 정도쯤 알아듣는 실력과 인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쉐에엑! 쉐엑!

또다시 도발하기 위해 섬전검법을 펼치는 구정봉을 상대로 은혼은 청강에게서 배운 화산의 정수를 검에 담았다.

쉐에엑! 쉐엑!

은혼이 연신 매화를 피워내 구정봉의 도를 상대했으나 가슴이 갈라진 장로 탓에 아직 반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세 사람의 검이 은혼을 따르지 못한 탓이었다.

“매화는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어나는 법, 장로들의 매화는 어찌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느냐!”

그때 또다시 남굉모의 음성이 들렸다.

쉐엑! 쉐에엑! 쉐엑!

실로 고인이란 표현 외에 다른 말이 없을 시기적절한 가르침이었다.

빈 곳을 노리던 세 사람의 장로가 은혼과 함께 일제히 매화를 그려내자 구정봉은 잡았던 승기를 놓친 것은 물론이고, 몸을 피하기 바빴다.

“구경만 한다고 하지 않았소!”

억울한 구정봉의 외침이 떨어진 직후였다.

“내가 정말 나서는 것을 보고 싶다면 언제고 말해라. 너 따위를 상대하는데 가릴 것은 없다.”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모두의 귀에 남굉모의 말은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다.

구정봉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일이나 당장 남굉모의 입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일대 제자가 형성한 목상진 안에서 마교의 수하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런! 또 한 놈이 쓰러지는 바람에 이제 스물셋 남았다.”

심지어 남굉모는 쓰러지는 수하들이 생길 때마다 남은 숫자를 알려주었다. 

그것도 모두가 알아듣게 말이다.

물론 남굉모가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화산에서도 쓰러지는 제자들이 속출했다.

“양의추월도법은 화려함과 빠름의 조화다. 화려함만을 추구하면 효용이 반으로 줄어들고, 동시에 속도를 자랑한다면 얻는 것이 없다.”

“그만 그 입을 닫으시오!”

꽥하는 구정봉의 고함에도 남굉모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누가 화려함을 뽐내고, 누가 빠를 것인가. 결정은 순간마다 다르니, 이는 바람에 꽃이 흔들리는 것처럼 순리를 따라야 하느니.”

마치 화산과 인연이 있어 후학을 가르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남굉모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매화검의 정수를 짚어냈다.

그 직후였다.

“바람이 북에서 동으로 불 때면 매화는 설산에서 꽃을 피워 향을 남서로 피우지 않느냐. 한 사람이 꽃을 피우면 다른 이는 향을 뿜어야지.”

어떻게 된 일일까?

청강이 남긴 전언을 풀어주는 것이라 착각할 만한 가르침이 남굉모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한 사람이 꽃을 피우면, 다른 이는 향을 뿜어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진무린은 단박에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쉐에에에에엑!

곧바로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이전과 다르게 울려 나왔고, 내내 옷을 붙잡듯이 달라붙던 구철환과 부양곽이 다급하게 몸을 빼냈다.

“땅이 한기를 피워낸다고 햇살마저 겨울이라더냐. 햇살은 늘 봄과 다르지 않으니 매화는 그 진리를 알아 얼어붙은 땅에서도 홀로 향기롭다.”

햇살은 사계절이 같은데 땅만 얼었다, 녹을 뿐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쉐엑! 쉐에엑! 쉐엑!

마선이절을 향해 날아드는 진무린의 검에서 묵빛 기운이 줄줄이 퍼져 두 사람을 그 안에 담았다.

이때는 또 전각의 구석에 숨어 지켜보던 표충량이 멍한 눈으로 진무린을 바라보았는데 그 점을 눈치챈 이는 남굉모외에는 없었다.

짧게 표충량을 살핀 남굉모가 말을 이었다.

“하단전에서 시작된 기운은 혈도를 따라 움직이고 그것이 적을 향하는 것에는 막힘이 없다. 바람은 순서나 방향, 거리가 없으니 그를 아는 법은 오로지 흩날리는 매화를 보는 것밖에 없다.”

쉐에에엑!

진무린의 검 소리가 재차 바뀌었다.

홀로 깨달으며 품었던 갑갑함, 알기는 하는데 설명하라면 못하던 이치를 확연하게 깨달은 덕분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가를 것처럼 진무린의 검은 거침이 없었고, 빈 곳을 채우는 물처럼 기묘한 방향으로 파고들었다.

이때 진무린의 검이 어찌나 날카롭던지 구철환과 부양곽도 감히 거리를 좁히려 달려들지 못했다.

쉐엑! 쉑! 쉐에엑!

게다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갈수록 날카롭고 예리하게 변해서 그 많은 검과 도가 부딪치는 가운데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진무린이 마선이절을 짓누르는 것은 물론, 섬전검법과 잠력대법을 펼쳤음에도 궁지에 몰리자 구정봉은 악에 받친 모양이었다.

“하아아앗!”

커다란 고함과 함께 그가 느닷없이 잠력을 폭발했는데 이전의 폭렬공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카아아앙!

“장문인!”

그의 도를 막아낸 은혼이 휘청하며 흔들렸고, 잠력에 휘말린 장로 셋은 아예 중심을 잃었는데,

쉐에에에에엑!

그들을 향해 구정봉의 도가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은혼과 장로 셋은 도를 막을 길이 없고, 진법이 흔들린 다른 장로들과 일대 제자 모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어딜 가느냐!”

도움을 주기 위해 몸을 날리는 진무린을 향해 구철환이 권을 연달아 쏟아냈고, 그와 동시에 부양곽이 손가락을 구부려 목과 옆구리를 잡아 뜯으려 달려들었다.

진무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등룡창천의 기운을 있는 힘껏 쏟아내며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엑! 쉐에에에에엑!

남굉모마저 고개를 번쩍 들 정도로 섬뜩한 소리였다.

소리가 터지는 것과 동시에 눈부신 검광이 양인각 앞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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