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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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99화
은천검제
제99화
짐작하지 못했던 장소에 상상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한 꼴이었다.
게다가 남굉모는 진무린이 다른 사람이라 여길 정도로 패도적인 기운마저 내뿜고 있어서 달려온 목적이 선하지 않음을 감추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이유조차 모르는 미움을 퍼붓더니 끝내 목숨을 내놓으라고?
원한다면 받아준다.
그러나 순순히 목을 내줄 만큼 허술하게 살지는 않았다.
파천신군 남굉모의 눈을 바라보며 진무린은 마음을 굳혔다.
내공을 일으키자 등룡창천의 기운이 상단전을 통해 퍼져 나갔다.
곧바로 진무린을 둘러싼 모든 기운이 선명하게 뇌리에 담겼고, 옷에 가려진 남굉모의 작은 움직임까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불안한 것은 여전히 남았다.
몸에서 녹지 않은 채 웅크린 기운이 긴박한 순간을 맞아 열기와 냉기를 동시에 뿜어내는 증상이었다.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현상마저도 남굉모와 같은 고수를 상대하는 데는 치명적인 요소가 된다.
“네놈이 먹은 영약이 뭔지는 아느냐?”
독기 오른 남굉모의 첫 마디는 이해하지 못할 질문이었다.
“모르겠지. 적어도 알고는 그렇게 넙죽넙죽 처먹지 못했을 테니까. 그 영약 하나가 소소의 삶을 일 년 연장시킨다.”
남굉모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진무린이 눈가를 좁힌 다음이었다.
“파천신군이라는 내가 이 꼴로 지내며 온갖 죽을 고비를 넘겨 구해낸 영약이다. 소소를 살릴 그 생명줄을 네놈이 다 처먹었단 말이다.”
알아는 들었는데 이해하기는 어려운 말이었다.
대신 처음 보았을 때 남굉모가 드러냈던 적대감의 이유는 얼추 설명됐다.
도대체 그런 영약을 왜?
단지 은천문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도 아니고 네 가지를 모두 줄 이유가 있을까?
진무린의 눈을 본 남굉모가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찌할 테냐?”
“어떻게 하면 됩니까?”
“모르고 먹었다는 말로 우길 생각이 아니라면 네놈이 네 가지 영약을 구해와라.”
억지도 이런 억지가 있을까.
몰랐다고 피할 생각은 없지만, 당장 네 가지 영약을 구하라면 그 또한 쉽게 대답할 일은 아니었다.
“사고의 여유가 언제까지입니까?”
“돌아오는 가을이 한계다.”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가을까지 영약을 구한다고 자신하지 못합니다. 먼저 사고를 귀혼곡으로 모셔주십시오. 그곳에 있는 이안공자의 의술이 대단하니 방법이 있을지 모릅니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냐? 이안공자라 했느냐? 그런 놈이 치료할 수 있다면 이미 내가 귀혼곡을 뒤졌을 것이다.”
“귀혼곡과 이안공자를 아십니까?”
“그깟 놈들을 내가 어찌 알아!”
쩌렁 울린 고함이 계곡을 파고들 때였다.
진무린과 남굉모 모두 고개를 같은 방향으로 틀었다.
날카로운 종소리가 울렸는데 분명 화산이 있는 곳이었다.
“선배. 화산에 중한 일이 있다는 신호입니다. 급히 달려갔다가 돌아올 테니 그때 마저 말씀을 나누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저기 숨은 꼬마를 놓고 가거라.”
남굉모의 눈이 꿈틀하더니 표충량이 몸을 숨긴 장소를 가리켰다.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죽어 나자빠진 모습.”
“그럼 손을 쓰십시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에.”
참으로 까다로운 조건이 달린 엉뚱한 요구였다.
“아이를 두고 가지는 못합니다. 원하신다면 손을 쓰십시오.”
말을 마친 진무린은 표충량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직후였다.
“감히 나를 앞에 두고 함부로 돌아선단 말이냐!”
거친 고함과 함께 강한 기운이 진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훌쩍 몸을 날린 진무린은 허공에서 몸을 틀었고, 천으로 감은 검을 그대로 휘둘렀다.
달려들던 참이다.
그 자세에서 남굉모는 허리를 꺾어 완전히 뒤로 접는 것처럼 검을 피했고, 이어 몸을 펴는 탄력을 이용해 솟구쳤다.
단숨에 여섯 개의 주먹이 진무린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세 개의 주먹을 검으로 때려낸 진무린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는데 그때는 남굉모 역시 솟구쳐 오른 상태였다.
삽시간에 세 번의 주먹질과 여섯 번의 발길질을 날린 남굉모를 상대로 진무린 역시 검을 네 번 휘둘렀고, 왼손과 발을 움직여 위기를 벗어났다.
그 직후에 두 사람은 다섯 걸음쯤 거리를 두고 내려섰다.
남굉모가 불편한 기색으로 진무린의 검을 노려보았다.
아직 천을 감은 상태에서 뽑지 않았다.
만약 저 검을 뽑는다면 지금보다 능히 세 배는 빨라지고, 위력 또한 몇 배는 더 강해지리라.
이 정도였단 말인가.
영약을 찾아 흘려보낸 세월 동안 지닌 무공은 변함없는데 강호는 이리 발전했던가.
남굉모의 눈에 담긴 것은 놀라움과 회한이었다.
“선배. 사고의 일은 분명하게 책임지겠습니다. 반드시 영약이나 치료법을 고민할 테니 이곳에 계십시오. 화산을 살핀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런 능력을 지녔다는 이안공자가 강호에 소문조차 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사정이 있어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 번쯤 의지해볼 만한 인물입니다.”
볼을 씰룩한 남굉모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함께 가자.”
“기다리시면 이리 돌아옵니다.”
“네놈 말을 어찌 믿어?”
한숨이 푹 나오는 대꾸였다. 그러나 지금은 화산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더 급한 상황이었다.
“량아!”
진무린은 표충량을 불러 안고서 몸을 날렸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굉모는 당연한 것처럼 하얀 머리칼과 수염을 휘날리며 진무린의 곁을 달렸다.
**
양인각은 은혼이 거주하는 장소로 화산의 가장 중심이라 할 만했다.
청석을 깐 넓은 마당 주변으로 건물들이 둘러쌌고, 그 사이로 화산 너머의 풍경이 펼쳐져서 위엄은 물론이요, 도가 특유의 경건함이 도사렸다.
화산의 입구에서 급한 연락이 있고, 불과 일각이 지나기 전에 종이 울렸다.
장문인 은혼을 비롯한 장로들과 매화검수, 일대 제자, 이대 제자들이 달려 나왔는데 적은 이미 양인각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청색 영웅건에 금박으로 수놓은 백색 장포를 입은 젊은 무인이 거만하게 앞서 있었고, 그의 좌우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노인 둘이 얕잡아 보는 기색으로 화산을 둘러보았으며, 삼십여 명에 이르는 흑색 무복의 수하들이 뒤를 받쳤다.
들어선 이들을 살핀 은혼은 내심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감추지 않은 진득한 마기는 이들이 마교에서 왔다는 뜻이고, 거만한 젊은 무인의 얼굴을 보기 무섭게 구양강이 떠올랐으니 저자는 필시 그의 아들 구정봉일 것이며, 뒤에 선 수하들은 언젠가 마주했던 검은색 무복의 두 명과 같은 조직이리라.
둘을 상대하는 데도 은혼이 팔을 내줘야 동귀어진할 수준이었는데 그들이 서른 넘게 왔으니 은혼은 솜뭉치를 가득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궁금한 것은 중간에 선 두 명의 노인이었다.
“마교의 제자 분이 화산까지 어쩐 일로 왕림하셨소?”
“흥! 화산의 장문인이라 눈썰미가 과연 대단하시구려. 그렇다면 이리 방문한 목적도 짐작하실 듯한데?”
“아비의 복수를 원하시는 게요?”
은혼의 질문에 구정봉은 야비한 미소를 얼굴에 담았다.
“역시 짐작하고 계셨구려. 그러나 오늘 방문은 그런 사사로운 이유가 아니라 화산이 공공연하게 본교를 노리는 것에 대해 교훈을 드리기 위함이오.”
“본파가 그리 얕보였을 줄은 몰랐소.”
“아무렴 화산을 얕볼 수야 있겠소? 그런 이유로 본인이 어렵게 두 분을 모셨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대우한 것이라 여기실 게요.”
거칠 것 없이 대꾸한 구정봉이 좌우를 돌아보았다.
“부족한 이 사람을 위해 마선이절께서 오셨으니 장문인께서는 이 기회에 안목을 넓히시는 것이 어떠시오?”
구정봉의 설명을 들은 은혼은 느닷없이 고인 침을 삼키지 않으려 입에 힘을 꾹 주었다.
정도 무인들이 선인의 경지라 부르는 단계를 뛰어넘은 마교의 무인들을 마선이라 부른다.
마선이절은 마교에서 한계를 넘은 두 사람, 구철환과 부양곽을 가리키는 별호로 마교 교주 정동추가 마천강기를 대성하도록 가르침을 주었을 만큼 뛰어난 이들이었다.
저 두 사람이 직접 나섰다면 오늘 화산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은혼의 표정을 살핀 구정봉은 득의양양이었다.
“이 정도면 경고는 충분한 것 같으니 굳이 피를 볼 일이 무엇이 있겠소? 화산은 본인이 원하는 한 가지만 들어주시오. 그럼 조용히 물러나리다.”
무슨 수작이지?
은혼이 눈가를 좁히는 순간이었다.
“진무린이란 자를 내놓으시오. 그럼 화산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돌아가겠소.”
구정봉이 느물거리는 말투로 조건을 뱉었다.
말은 좋다.
그러나 진무린을 내놓겠다고 하는 순간, 화산은 구정봉 앞에 무릎을 꿇은 것과 똑같은 꼴이 된다.
이미 주변을 둘러선 장로들과 제자들 모두 죽음을 각오한 얼굴이어서 은혼은 고민할 이유조차 없었다.
송구한 것은 은혼이 장문인을 맡은 시기에 이런 고비가 온 것이고, 아쉬운 것은 매화검수가 열둘이나 희생된 뒤에 청강마저 잃었다는 점이었다.
은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혼 사제는 천종을 울려라.”
원시천존을 모신 전각 앞에 거대한 종이 있어 그 소리가 울리면 화산에 몸을 숨긴 전전대, 전대의 온갖 고수들이 달려온다.
이는 타 문파도 비슷한데 종을 울린 장문인은 그 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규정 또한 같았다.
“흥! 누구 마음대로!”
구정봉이 비웃음을 터트린 직후였다.
몸을 돌리는 문혼의 앞으로 구철환이 몸을 날렸고, 앗 하는 사이에 권을 내질렀다.
급하게 몸을 뒤튼 문혼이 권을 피했다.
그러나 권풍을 이기지 못해 그는 다섯 걸음이나 밀려난 뒤에야 겨우 몸을 세웠다.
구철환이 뒷짐을 진 자세로 겨우 몸을 세운 문혼을 거만하게 바라보는 터라, 첫 번째 대결에서 화산은 부끄러운 모습을 내보인 꼴이었다.
“원한다면 차륜전을 펼쳐도 좋소이다.”
거기에 구정봉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은혼에게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돌아가면서 한 명씩 나서란 말이었다.
구철환이 종을 지키고 있으니 마교에서 먼저 내세울 인물은 당연히 마선이절의 나머지 한 사람, 부양곽이었다.
그를 상대로 한 명씩 나서 대결한다면 화산은 아예 승산이 없다고 봐야 했다.
은혼은 잠시 시선을 들어 화산의 위로 펼쳐진 하늘을 보았다.
어찌 강호의 문파라 해서 흥망성쇠의 고리를 피할 수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당당히 맞설 일이고,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정신을 남기는 것이 화산이 택할 바가 아니겠는가.
“제자들은 들어라.”
각오를 마친 은혼은 내공을 담아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본파는 억울하게 등선하신 사부님의 복수를 위해 마교를 벌하려 하였다. 오늘 고난을 맞았으나 이는 복수의 기회가 좀 더 일찍 찾아왔을 뿐, 달라진 것은 없다.”
굳은 의지가 담긴 은혼의 말이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만, 이대 제자들은 다음을 기약할 일이니 지금 곧 산을 내려가 문선각에서 기다리도록 해라.”
냉정한 판단에서 나온 은혼의 지시였다.
쭈뼛대는 이대 제자들을 은혼은 매섭게 노려보았다.
마교의 인물들이 바라보는 앞이었다.
“장문인의 명을 받습니다.”
피를 토하듯 이대 제자들이 답을 올렸는데 그 모습에 남은 이들의 사기가 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 제자들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바람에 옷깃이 날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두 사람의 모습이 전각을 넘어 떠올랐다가 곧바로 은혼의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확하게는 세 사람이었다.
도착하기 무섭게 진무린은 표충량을 내려놓고 침입한 자들을 돌아보았다.
찢어진 눈과 뾰족한 눈의 구정봉을 보는 순간이었다.
진무린은 그가 구양강의 아들임을 바로 짐작했다. 그런데 종을 막아선 노인과 구정봉의 곁에 선 인상 사나운 노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와 반대로, 두 노인이 남굉모를 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이쪽의 정체를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네놈이 진무린이냐?”
질문을 던진 두 노인을 진무린이 돌아본 뒤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정봉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눈은 있나 보구나. 두 분이 바로…….”
“마선이절이란 놈들이지. 저 주둥이 튀어나온 놈이 구철환, 눈이 짝짝인 놈이 부양곽이다.”
설명은 남굉모의 입에서 나왔다.
“한동안 보이지 않아 뒈진 줄 알았더니 제법 명이 길구나.”
“선배야말로 죽은 줄 알았더니 몰골로 보건대 어디에서 빌어먹으며 지냈던 모양이오?”
“흐하하하하하!”
부양곽의 거친 대꾸에 남굉모가 커다랗게 웃음을 토해냈다.
이때 웃음에 담은 그의 내공이 얼마나 강렬하든지 전각의 지붕이 모두 들썩였고, 산을 타고 떠도는 울림이 한참을 이어졌다.
웃음 한 번으로 남굉모는 그가 어느 정도 무공을 지녔는지 단박에 증명했다.
“네놈 혼자 늙은 괴물 둘을 능히 상대할 만하니 됐고. 남은 것은 저 어린놈인데 잠력대법을 익힌 것은 물론이고, 어설프나마 마천강기도 수련한 놈이니 자하신공을 익힌 장문인이 장로 셋과 상대하면 적당하다.”
놀라운 것은 웃음을 멈춘 남굉모의 조언이었다.
“또한, 뒤에 서 있는 저 벌레 같은 놈들 역시 잠력대법 중 폭렬공을 익혔으니 이는 일대 제자들이 목상진을 넓게 펼치고, 그 안에서 매화검수와 남은 장로들이 양의추월도법을 펼쳐 상대하면 크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나타난 이들의 수준을 판단하여 화산이 지닌 진법으로 상대할 대책까지 막힘없이 내놓았다.
“많이도 아시는구려. 그럼 선배는 뭘 하시려오?”
“나? 나야 구경이나 해야지.”
질문을 받은 남굉모가 단숨에 내놓은 답이었다.
그가 나서면 화산이 월등히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구경이나 하겠다는 말을 뱉더니 실제로 훌쩍 몸을 날려 양인각의 지붕에 올라가 가부좌로 앉았다.
마교는 물론이고, 화산의 인물들조차 설마 하는 눈으로 보았는데 다른 이들은 몰라도 진무린만은 알 것 같았다.
그는 마선이절이라는 구철환과 부양곽이 꼴 보기 싫어서 상대할 방법을 알려주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진무린에게 도움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나서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분명했다.
다들 기가 막혀 하는 참이었다.
“말싸움하러 온 게 아니라면 얼른들 시작해라.”
지붕에 앉은 남굉모가 바라보는 이들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