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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98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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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98화

은천검제

제98화

 

풍령관은 원체 외부와 교류하지 않았다.

관주 구양강은 표독하며 독선적인 데다, 배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죽었다고 한들 슬퍼하는 이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풍령관 주변의 장원 몇 곳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 여기는 분위기였다.

상황이 이러니 누가 나서 복수를 다짐할까.

그러나 세상의 모습은 참으로 오묘해서 강호에서 단 한 사람, 구양강의 비보를 들은 뒤에 복수를 다짐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마교의 제자 구정봉이었다.

물론 그들 부자의 관계가 특별해서 복수를 다짐하는 이유가 평범하지 않은 것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멍청하기는. 그토록 공을 들여주었더니 이룬 것 하나 없이 죽어버리다니.”

복수를 위해 커다란 객잔의 별채를 차지한 구정봉이 한숨과 함께 내놓은 말은 뜻밖이었다.

“혈교 따위를 믿고 설칠 때 알아봤지만, 그렇더라도 어찌 그리 쉽게 주저앉아? 잠력대법에 강시술까지 가져갔으면 화산이든, 아미든, 장문인의 목 하나는 자르고 죽었어야지.”

입맛을 다신 구정봉은 시선을 멀리 두었다.

진무린이 풍령관을 찾는다는 말에 달려가 마주한 것이 아비 구양강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 어찌 알았나.

 

“네가 어느새 이리 훤한 장부가 되었구나.”

그전까지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양반이 마교의 제자가 된 이후로 저리 바뀌었는데 그 모습이 구정봉은 더 싫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에, 강퍅하게 파인 볼, 끝이 구부러진 코를 지닌 구정봉이건만, 구양강은 반안이나 송옥을 본 듯 대했다.

“앉아라. 앉아.”

비슷하게 생긴 두 사람이 계곡을 향해 탁자에 앉았다.

이렇게 자리를 권하는 것도 마교의 제자가 된 이후에 생긴 변화였다.

“이곳의 풍광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두 네 것이 될 터인데 그리울 것이 무엇이냐? 결전의 날에도 너를 부르지 않는 것은 모두 네가 교주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교주가 되면 곳곳에 펼쳐놓은 마교의 분타를 손에 쥐고 훗날 이곳에서 생을 즐기려무나.”

구정봉은 가볍게 웃었다.

마교의 교주가 뭐 하릴없어 풍령관에서 처박혀 살겠나.

“수하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네가 전해준 폭렬공을 익혔으니 놈과 은천문의 떨거지들이 온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놈이 깨달았다는 등룡창천이 문제다만, 그 또한 대비한 것이 있으니 크게 염려할 것은 없다.”

말투와 달리 구양강은 아예 높은 이에게 보고하는 투였다.

“다만, 폭렬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폭주한 수하들이 있는데 잔인한 응징을 위해 따로 모아두었으니 그 또한 기대하는 바가 크지.”

“혈라마에서는 연락이 있었습니까?”

“내일 중으로 도착한다는 기별이 있었다. 그래, 네가 익힌 섬전검법은 어떠냐? 발전이 있더냐?”

“내공을 운용하는 방법이 독특해서 시일이 걸립니다.”

“흠.”

구정봉의 답이 아쉬운 듯 구양강은 나직한 숨을 쏟아냈다.

“현재 칠 성의 경지를 익혔으니 내년쯤에는 대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뭣이?”

실망했던 구양강의 눈에 번득 놀라움과 기쁨이 솟아났다.

“그렇다면 이미 중성을 이루었다는 뜻이 아니냐?”

“듣기로 칠성이면 은천문에서도 은천령에 동원될 정도의 수준이라 합니다.”

“크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이 구양강의 아들이지! 내 너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다만, 이리 발전이 빠를 줄은 짐작하지 못하였다.”

“모두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아버님 덕분에 얻은 것이지, 소자는 알려주신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구양강은 당장에라도 구정봉을 한 손에 잡아서 눈에 넣을 정도로 흐뭇한 얼굴이었다.

“네가 마교의 잠력대법을 익혔고, 운이 된다면 마천강기마저 손에 넣을 텐데, 혹여 그리되지 못하더라도 이 아비가 반드시 묵룡검법을 얻어올 것이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공 연마에 매진해야 한다.”

“명심해서 정진토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묵룡검법을 바라는 구정봉의 공손한 대답 덕분에 좋은 말이 오간 뒤였다.

“마교의 동태는 어떠냐?”

“소교주의 행방이 묘연하여 수배 중입니다.”

구양강이 물었고, 구정봉이 나직하게 답했다.

“흥. 우리의 힘을 얻을까 하여 너를 제자로 받았겠다만, 교주가 저리될 줄은 몰랐겠지. 되었다. 지금이야 비록 고개 숙이고 있어도, 네가 진정한 힘을 손에 넣고 나면 풍령관이 진정한 강호의 주인이 될 것이다.”

“소자가 반드시 이뤄낼 것입니다.”

“오냐. 네가 강호를 호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 평생소원임을 잊지 마라. 그때 풍령관의 깃발이 온 강호에서 나부낄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묵룡검법마저 손에 넣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아쉽다! 참으로 아쉬워!”

 

강호일통의 욕심을 부리던 구양강이 생을 마감하면서 구정봉 역시 묵룡검법을 얻기는 포기해야 했다.

“복수를 명목으로 화산과 아미를 노릴 수 있고, 그 과정에서 교주의 신임을 얻을 테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구정봉이 어두운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소주. 흑일입니다.”

그런 구정봉을 수하가 깨웠다.

“들어와.”

객잔의 별채라 걸릴 것은 없었다.

검은 무복 차림의 흑랑대 대주 흑일이 구정봉의 앞에 도를 세우고는 그에 의지하는 것처럼 왼쪽 무릎을 꿇었다.

“놈이 나타났습니다.”

“어디냐?”

“화산입니다.”

“그래?”

구정봉의 눈가에 매서운 한기가 돌았다.

“어차피 다음 목표가 본교라 떠들었으니 명분은 충분하다. 흑랑대를 모두 동원하고, 갈마천 장로의 복수를 위해 출발한다는 소식을 두 분께 전해.”

“명을 받습니다!”

구정봉이 고개를 끄덕이자 흑일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흑랑대 둘이서 화산의 장문인 은혼을 감당할 정도이니 무력은 충분했다.

“진무린이라 했지? 등룡창천 따위를 믿고 설치는 모양이다만, 마천강기의 두려움을 알게 된다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쥔 구정봉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

 

표충량을 안은 진무린은 단박에 절벽으로 떨어져 내렸다.

목을 꽉 안은 표충량이 보기에 바위를 차며 몸을 돌리고, 나무의 끝을 밟아 솟구치는 진무린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과 다를 바 없었다.

어딘지는 모르나 진무린은 산의 중턱에 있는 널찍한 바위 위에 몸을 내렸다.

“여기가 좋겠다.”

표충량을 내려놓은 진무린은 허리띠 안쪽에 두었던 작은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아침을 걸렀다고 들었다.”

표충량이 받아서 펼쳐보니 커다란 만두가 하나 있었다.

어린아이는 앙증맞은 손으로 만두를 잡아 반으로 갈랐다.

“네가 먹기에도 부족하지 않으냐?”

“사숙께서 빈속으로 계신데 소질이 어찌 입에 음식을 넣겠습니까?”

고 녀석 참.

“나는 이미 먹었다. 그러니 어서 먹어.”

가볍게 웃은 진무린이 재차 권한 뒤에야 표충량은 만두를 입에 물었다.

“무릎을 꿇을 일이 뭐가 있어? 편히 해.”

“예?”

“그리 있으니 내 오금이 다 저리다. 정 마음이 불편하면 가부좌로 앉아.”

표충량이 화산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털털함이었다.

진무린이 두 번 더 권하고서 어린 표충량은 가부좌로 앉아 만두를 입으로 가져갔다.

“소질은 이런 곳에 매나 수리만 앉는 줄 알았습니다.”

고물고물 입에 담긴 만두를 씹으며 표충량이 낸 말이었다.

그 작은 얼굴에 화산에서 지내는 동안의 힘겨움과 진무린과 함께 하는 기대감이 뒤섞였는데, 지금은 또 둘러보는 경치가 마음에 든 모양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은?”

“주머니가 없어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물을 마시러 가야겠구나.”

몸을 일으킨 진무린을 따라 표충량이 냉큼 일어섰다.

“어차! 어디 사질과 잠시 시간을 즐겨볼까?”

표충량을 안아 든 진무린은 바위 앞의 절벽을 향해 발을 내디디듯 나가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견디기 어려웠는지 표충량이 결국 품을 파고들었는데 바위를 밟은 진무린은 허공에서 크게 몸을 돌려 나무의 탄력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섰다.

“괜찮으냐?”

“만두가 목에 그대로 있습니다.”

“하하하.”

모처럼 크게 웃을 정도로 깜찍한 답이었다.

진무린은 표충량과 함께 일각 정도를 걸어 개울 앞에 당도했다.

“숙부께서는 물이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까?”

“위에서 보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어서 물을 마셔.”

표충량은 이 겨울에도 널따란 잎사귀를 찾는 눈치였다.

진무린에게 먼저 떠 주려는 모양이었다.

잘 가르쳤다. 그러나 진무린의 눈에는 또래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계속하는 것이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다.

진무린은 보란 듯이 움직여 중지로 얼음을 깨트린 뒤에 손을 씻었고, 이어 물을 마셨다. 표충량을 위해 그의 앞쪽 얼음을 깨준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물을 마신 뒤였다.

진무린은 손가락을 들어 표충량의 볼과 목에 튕겼다.

‘이런 장난도 하십니까?’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린 표충량이 놀란 눈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사매와 사제가 있어 어린 시절에는 이리 놀았다.”

진무린이 짓궂게 두어 번 물을 더 뿌리자 표충량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까르르 웃었다.

“어디 사질의 무공을 볼까?”

진무린은 아예 표충량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내가 물을 쏘아낼 테니 너는 배운 공부로 막아보아라.”

진무린은 자세를 낮춰 양손을 물에 담갔다.

긴장한 표충량을 향해 웃어준 진무린은 중지를 연속으로 튕겨 물을 쏘아냈다.

휘익! 휙! 휘이익!

상체를 뒤튼 표충량이 어설픈 동작으로 물을 막았다.

“나쁘지 않구나. 그런데 왼팔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데 어쩐 일이냐?”

내내 웃던 표충량이 고개를 떨궜다.

솔직히 말하자니 화산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고, 다른 핑계를 대면 진무린을 속이는 모양새라 그런 눈치였다.

“이리 와봐라.”

진무린은 표충량을 불러 왼팔을 양손으로 잡았다.

“탁한 기운이 혈도를 막았다. 수련이 과했던 모양인지 부은 곳도 있고. 조금 아플 텐데 견디면 효과가 있을 게다.”

내공을 일으킨 진무린은 표충량의 왼팔을 천천히 문질렀다. 잠시 뒤였다. 이번에는 검지와 중지로 아이의 왼팔을 두드렸다.

통증이 상당한 치료였다.

“이래도 비명을 안 내놓다니! 참을성이 대단하구나.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아니나 다를까, 더는 견디기 어려웠는지 표충량이 온몸을 비틀었다.

“사숙의 무공이 어떠냐? 강호의 악한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검지와 중지다. 너도 더 견디기는 어려울 테니 어서 비명을 내놓아라!”

진무린의 턱없는 허세에 눈물이 찔끔 올라온 표충량이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말이다. 진무린이 표충량 나이 때.

엄하게 대해준 이는 많았다.

길을 바로잡아 주려 애쓴 문주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진무린은 이렇듯 편하게 대해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싶었다.

가끔은 장난도 걸어주는 이 말이다.

의외로 장 노대가 이리 대해주었다.

가끔은 몰래 당과를 챙겨와 둘이 숨어서 먹던 기억을 어찌 잊겠나.

“사숙! 소질은 더 당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늦게 말했으니 그 죄로 일각은 더 두드려야겠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멈춰주십시오!”

진무린이 짓궂게 검지와 중지를 눈앞으로 들어 빠르게 움직이자 까르르, 하는 표충량의 웃음이 커다랗게 퍼졌다.

잠시 웃고 떠든 뒤였다.

“어떠냐?”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진무린이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로 공력을 쏟아부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표충량은 아직 어렸고, 실력이 부족했다.

“사숙께선 의술도 배우셨습니까?”

“무공이 고강해지면 너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무공을 익힘은 너보다 약한 이들을 도우라는 뜻이고, 고강한 무공은 더 많은 이를 지켜낼 좋은 도구이지, 강호를 네 마음대로 재단하라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아직은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였다. 그렇더라도 기본은 이리 어릴 적부터 익히는 것이 좋았다.

“내가 뵌 청강 진인이 바로 그렇게 사신 분이시다. 장문인 또한 그 가르침을 받은 분이니 너 역시 사부의 말씀 아래에서 그런 무인이 되어야 한다.”

“예, 사숙.”

청강의 이름이 나오자 표충량이 고개를 떨구며 말을 받았다. 

그 직후였다. 

무겁게 숨을 내쉰 진무린은 계곡 아래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누굴까?

강호에 나와 이리 강한 기운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가주 임운령이나 사부 전도위의 윗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패도적인 느낌마저 풍겼다.

“량아는 들어라.”

“소질 표충량이 사숙의 말씀을 듣습니다.”

“두려움이 가장 큰 적이니, 네가 옳다고 여긴다면 물러설 이유가 없다. 알겠느냐?”

“예, 사숙.”

고작 두 마디를 했을 뿐인데 기운은 이미 바로 앞에 있었다.

“찾아온 이가 있는 모양이니 너는 저 뒤에 잠시 몸을 숨겨라.”

아직 어린 표충량에게 가혹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강호를 살아간다는 것이 이런 것임에랴.

진무린의 단단한 눈을 본 표충량이 빠르게 눈짓으로 알려준 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진무린이 천천히 계곡 아래를 향해 돌아선 뒤였다.

퍼러러러럭!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노인이 진무린의 앞에 내려섰다.

노인은 매섭기 그지없는 눈매였고, 진무린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얇은 콧대와 마른 입술, 그리고 왼편 귓가에 달린 사마귀.

나타난 노인은 파천신군 남굉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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