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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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97화
은천검제
제97화
운암정은 양소소가 가보라 한 장소였다.
가르침을 달라 매달리라고도 했다.
괴팍하다는 의미일 테고, 그렇더라도 감정을 누르고 얻어보라는 조언이었다.
자칫하면 양소소의 배려를 무시하는 꼴이 되는 것은 물론이요, 체면을 상하게 할 수 있는 터라 진무린은 양손을 맞잡은 자세에서 몸을 세우지 않았다.
“흐음. 은천문이라 한 걸 보면 소소가 보낸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뭐라 하면서 보내더냐?”
“운암정에 가면 뵙는 분이 있을 테니 가르침을 청한 뒤에 매달리라 하였습니다.”
“흠흐흐.”
울음처럼 들리는 웃음을 토해낸 남굉모가 먼저 쓴 입맛을 다셨다.
“인사는 그 정도면 됐다. 그건 그렇고, 소소가 너를 보낼 정도면 뭔가 들려 보낸 것이 있을 텐데?”
“여기 있습니다.”
진무린은 자루에서 술병을 꺼내 남굉모에게 건넸다.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이 술병을 받더니 곧바로 뚜껑을 열었다.
그는 먼저 향을 음미했고, 이어 술병을 입에 물고 위로 들었다. 입가로 술이 흘렀는데 남굉모는 그렇게 반쯤을 마신 뒤에야 술병을 내렸다.
“크허!”
소매로 입가를 닦은 그가 병을 든 손으로 앞쪽의 돌을 가리켰다.
“앉아.”
“예.”
진무린은 그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지정해준 바위에 앉았다.
“등룡창천을 얻은 것도 그렇고, 상단전을 깨달은 것도 기특하다만, 홀로 얻은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남굉모 역시 한눈에 진무린의 성취와 부족함을 짚어냈다.
“어디 과정을 말해봐라.”
“지금 말씀이십니까?”
“바쁘면 그냥 가든가.”
자칫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바로 축객령을 받게 생긴 상황이었고, 상대가 다른 사람 아닌 파천신군이었다.
전전대 고수 중 최고라 불리던 인물로 진무린이 전에 상대했던 갈마천조차 마주 서기를 꺼리던 당대의 영웅이었다.
게다가 양소소가 술병까지 준비해주며 매달리라 당부한 사람이 아니던가.
진무린은 소소에게 전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였다.
뜨문뜨문 술을 마시던 남굉모는 남은 것이 없나 술병을 흔들더니 거꾸로 세우고는 털어가며 떨어지는 몇 방울을 소중하게 마셨다.
“쩝.”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신 남굉모가 술병을 내려놓았다. 통쾌하게 입가로 흘러가며 마시던 첫 모금과는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영약도 먹인 모양인데?”
“오선라미초, 삼각사의 내단, 설경의 내단, 만년설삼의 순서대로 섭취했습니다.”
“그걸 그리 퍼붓다니. 아주 죽을 셈이었구나.”
뭔가 말뜻이 이상했다. 아니면 말을 잘못했거나.
그러나 당장 그 말뜻을 묻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입가를 닦듯 손을 움직여 수염을 쓸어내린 남굉모가 오묘한 표정으로 진무린을 보았다.
“나쁜 놈.”
진무린이 무언가를 잘못했나 싶을 정도로 거친 말과 불편한 눈빛이었다.
“네놈이 소소를 찾아간 것은 어떤 계기냐? 은천문과 인연을 끊고 살았던 것으로 아는데?”
“문주께서 가보라 하셨습니다.”
“역시 가르침을 달라 매달리라 하더냐?”
“그저 심사장을 찾아가 보라 하셨을 뿐입니다.”
치켜뜨듯 진무린을 노려보던 남굉모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전전대 최고수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낡은 옷에 씻지 않아서 꾀죄죄해 보이는 몰골이었다. 다만, 그의 눈빛만큼은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강자의 날카로움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 옷 말이다. 지금 걸친 거. 그것도 소소가 만들어준 게냐?”
“그렇습니다.”
“고얀 놈.”
받은 옷이 한 벌이었기에 망정이지, 두 벌을 받았다면 당장 달려들고 남았을 만큼 매서운 눈빛이었다.
“가라.”
내내 등룡창천과 상단전을 깨달은 과정을 물었고, 양소소와의 사연을 털어놓게 하더니 결국 축객령을 뱉었다.
매달리라는 양소소의 조언이 떠올랐지만, 진무린은 조용하게 몸을 일으켰다.
“후배는 충분히 속을 보여드렸다고 믿습니다. 인연이 닿지 못해 가르침을 얻지 못했으나 이렇게 뵙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진무린은 양손을 마주 잡고 인사한 뒤에 몸을 돌렸다.
경공을 펼치기 직전이었다.
“거기 서.”
남굉모의 거친 음성이 진무린을 붙들었다.
해도 너무 하는데?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어 감정을 조절한 뒤에 남굉모를 향해 돌아섰다.
“언짢은 모양이다?”
양소소의 낯을 봐서 참아야 했다.
술병을 들려준 그녀의 성의를 봐서라도.
“선배. 사고의 곁에서 지낸 지난 이틀이 최근 제게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사고를 욕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러가라는 말씀에 매달리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진무린의 눈을 파고드는 것처럼 남굉모의 눈빛은 매서웠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이곳에 보내주신 사고의 낯을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언짢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나 후배가 떠나는 것으로 잊어주셨으면 합니다.”
“괘씸한 놈.”
사람이 미우면 숨 쉬는 꼴도 보기 싫다더니 남굉모는 진무린이 말하는 것조차 싫은 모양이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서라고 했다.”
진무린은 답하지 않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피하지도 않았다.
부친에 대한 기억은 두어 가지가 전부고, 모친은 아예 떠오르는 것 없이 살았다.
이유 모를 미움을 받는 일도 잦았다.
사부 전도위와 문주 임운령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백승과 원고성 같은 장로에게 눌려 지금 어떤 모습일지 짐작조차 안 되는 것이 진무린의 어릴 적 삶이었다.
무공에 매달리고, 그럴 때 유일하게 숨통이 트였다면 누가 믿을까.
저런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
떠나는 것도 밉고, 앞에 있는 것은 더 밉고.
두고 보자니 구역질이 나는 것처럼 싫은데, 그냥 돌아서는 꼴은 또 견딜 수 없어 붙드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모려원과 종무헌에게 말하지 않았던 아픔과 분노가 떠올라 진무린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눈빛을 하다니! 꿇고 잘못을 빌어라.”
“싫습니다.”
“죽고 싶으냐?”
“선배.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 말입니다. 그때마다 죽었다면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겁니다.”
“흥! 그 정도 실력으로 큰소리를 치다니. 어디서 얼치기들이나 상대했던 모양이다만 내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진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 없이 미움을 받을 바엔 얼른 자리를 피하거나 검을 마주하는 게 차라리 백 번 현명한 일이었다.
저런 눈빛인 사람은 진무린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것쯤 이미 충분히 경험한 탓도 있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무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몸을 돌렸고, 경공을 발휘해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높다고 하나 진무린에게는 문제 될 것 없었고, 임운령과 양소소의 배려가 걸렸으나 남굉모의 요구에 무릎 꿇는 것이 오히려 두 사람의 체면을 깎는 일이라 여겼다.
운암정에서 몸을 날린 진무린은 적당한 장소에 멈춰서 양소소를 떠올렸다.
“은천문의 제자는 걸음을 나설 때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어야 하는 법. 본문의 미래를 책임진 너는 뒤돌아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건넸던 말이 어쩌면 운암정의 결과를 예상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어 진무린은 화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청강의 모습을 그렸다.
여유로운 그의 미소와 넉넉한 눈빛이 그리웠다.
이럴 때 그가 생존해 있었다면 바로 달려가 하루쯤, 그도 아니라면 반나절쯤 함께 지냈을 텐데.
청강의 뒤로 자연스럽게 떠오른 사람은 표충량이었다.
녀석은 과거 진무린처럼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은혼이 버텨준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시기, 질투를 감당하기에 표충량은 아직 어린 나이였다.
무공이 확연하게 오르고 나면 바뀌겠으나 지금은 참으로 어려운 나날을 견디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진무린은 방향을 화산으로 정했다.
**
대청으로 나선 양소소는 마당에 서 있는 남굉모를 보며 표정을 바꾸었다.
“끝내 그 아이를 내치신 모양이군요.”
“네가 어떻게 그런 아이를 내게 보낼 수 있단 말이냐!”
“가세요.”
“그 아이에게 무공을 전하지 않았다고 이러는 게냐? 내가 그 아이를 가르치지 않아서?”
몸을 돌리려던 양소소가 앙칼진 눈으로 남굉모를 노려보았다.
“내가 용서했어요. 그깟 무공 죽어서 가져가실 것도 아니고.”
“놈을 보니까 자꾸만 그놈이 떠올라서 견딜 수 없었다. 어쩌면 그리 눈매나 성깔이 똑같던지, 네가 아니었다면 그냥 보내지도 않았어!”
진무린을 대할 때만큼이나 독한 눈매로 남굉모가 으르렁거렸고, 그를 대하는 양소소 역시 또 이제까지와는 달리 매서운 표정이었다.
“죽이려면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지만 쉽지는 않을 거예요. 홀로 등룡창천과 상단전을 깨달은 아이예요.”
“영약 따위가 깨달음을 준다더냐! 그것도 내가 이 몰골로 살면서 건네준 그 영약을 어떻게 그 녀석에게 모두 먹일 수가 있어!”
남굉모의 말을 들은 양소소가 더할 수 없이 차가운 눈매로 픽 웃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가서 그 아이를 죽이든, 돌산에 숨어 외롭게 죽든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요. 그리고 하나만 알아두세요.”
차갑게 말을 건넨 양소소는 오른손을 움직여 왼손 소매를 단숨에 뜯어냈다.
“이제 저를 다시 볼 일은 없어요. 그러니 이제 돌아가세요.”
“모든 게 내 잘못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때도 이러셨지요? 그토록 제가 매달렸는데 끝내 그 잘난 무공을 아끼다가 이렇게 됐어요. 더 뭘 원하세요?”
입을 다문 남굉모의 볼이 씰룩였다.
“아비나 어미의 정을 모르고 자란 아이예요. 저를 바라볼 때 눈빛 너머에 담긴 외로움을 봤어요. 그래서 그 아이를 보냈어요! 혹시 그 아이를 통해 이 원망 가득한 삶을 바꿔볼까 해서요!”
쨍하고 고함을 지른 양소소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 밤에 이곳을 떠날 테니 그리 아세요. 이제 진짜 끝이에요. 다시는 찾지 마세요.”
화를 낼 때보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표정을 푸는 양소소가 더 차갑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무섭게 달린 진무린은 운기를 하며 밤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나절에 화산에 도착했다.
진무린을 알아본 일대 제자가 날 듯이 달려 아뢴 덕분에 진무린은 곧바로 은혼을 마주했다.
반가운 인사가 오간 뒤였다.
그 직후에 은혼은 표충량이 겪었던 일에 관해 털어놓았다.
“비무를 핑계 댄 모양입니다. 목검으로 량아의 왼팔을 때려 움직이기조차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지금도 고개를 들기 어렵습니다.”
실제로도 그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참담한 얼굴이었다.
이대 제자라 해도 최소 3년에서 최고 10년에 걸쳐 수련한 십 대의 아이들이었다. 그 긴 시간을 수련하며 누군들 장문인의 제자가 되고 싶지 않을까.
따돌림은 이해한다.
그러나 강호의 흔한 무관도 아니고, 팔을 붓게 할 정도로 못된 짓이 화산에서 일어났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구대문파가 차지하는 위상도 그렇거니와 지금 표충량을 괴롭힌 자들이 강호에 나서면 그 어떤 속가제자보다 배분이 높아지는 탓이었다.
어리고 무공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표충량을 무시한 이대 제자들이 또 강호에 나서서는 쉰이 넘는 속가제자에게 고개 숙일 것을 강요한다면 질서가 바로잡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최근 돌아본 구대문파의 무공이 답보 상태에 놓인 것은 물론이요, 탐욕에 젖어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는 올바른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대화의 끝에서 은혼은 진무린에게 속을 털어놓았다.
“이대 제자 전부를 파문하고자 하였습니다.”
진무린이 놀라 바라볼 정도로 놀라운 결단이었다.
“사백께서 나서시어 고개 숙이시는 바람에 한 걸음 물러났으나 앞으로 유사한 일이 있다면 그보다 더한 벌을 내려서라도 화산의 정신을 바로잡을 생각입니다.”
은혼의 말이 떨어졌을 때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이대 제자들이 내려온 모양입니다. 량아는 아마 반 시진쯤 뒤에 내려올 겁니다.”
애처로운 시선으로 은혼이 건넨 말이었다.
“경공을 가르쳐주었는데 내공이 부족하고, 운용이 미숙하여 아직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기특한 것은 저 어린아이가 벌을 자청하여 함께 달린다는 점입니다.”
진무린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장문께서 허락해주시면 제가 량아에게 요령 몇 가지를 알려줄까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오히려 제가 청하고 싶은 일입니다. 진 대협께서는 근심을 놓으시고 지니신 것을 마음껏 전해주십시오. 설혹 이 몸보다 뛰어난 경공과 검을 지닌다고 해도 절대 샘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청강이 남긴 표충량을 제대로 키우고 싶다는 그의 소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대화였다.
농 섞인 은혼의 청을 들은 진무린은 가볍게 웃는 것으로 대꾸했다.
**
은혼이 벌을 내린 지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화산의 이대 제자들은 새벽에 일어나 낙안봉으로 달렸고, 죽을 각오로 몸을 날려서 내려갔는데 아무리 서둘러도 아침 시간에 맞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친 숨을 토해낸 이대 제자들이 모두 내려간 뒤였다.
한참이 지나서 볼이 빨갛게 된 표충량이 지친 걸음으로 낙안봉에 도착했다.
이대 제자에게 내린 처벌을 들은 직후에 표충량은 사부 은혼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고, 함께 벌을 받겠노라 청했다.
은혼은 남몰래 경공의 기초를 알려준 뒤에 표충량이 낙안봉에 오르는 것을 허락했다.
고작 닷새밖에 안 됐지만, 어린 표충량이 하루에 두 번 낙안봉에 오르는 것은 너무도 고된 일이었다.
배고픔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먼저 낙안봉에 도착했다가 내려오는 이대 제자의 차가운 눈초리를 견디는 것 또한 표충량은 끔찍했다.
“사숙. 먼저 갑니다.”
인사야 있었다.
보기에는 대하는 것도 바뀌어 공손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담긴 멸시는 이전보다 더해서 표충량은 그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낙안봉의 정상에서 거친 숨을 토해내던 표충량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저 하늘 어디에선가 신선이 된 청강이 표충량을 내려다보리라.
‘힘든고?’
“아닙니다, 진인.”
구름 속에서 청강의 질문이 들린 듯하여 표충량은 울음 섞인 음성으로 답을 건넸다.
‘그런데 왜 그러고 있누?’
“배운 경공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그렇습니다.”
‘정 힘들면 쉬엄쉬엄해도 되느니.’
청강이 있다면 분명 저리 말하며 다독여주었을 텐데.
두 주먹을 꼭 움켜쥔 표충량은 숨을 두어 번 고른 뒤에 아래로 달렸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 지경이 되도록 달린 표충량이 수련관 앞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사숙. 장문인께서 찾으십니다.”
일대 제자가 급히 다가와 전에 없이 공손한 태도로 표충량을 재촉했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볼은 빨갛다 못해 하얗게 질렸으며, 입이 바싹 마른 참이었다. 그러나 사부이자 장문인이 찾는다는 말에 표충량은 몸을 돌렸다.
그나마 일대 제자가 물을 들고 기다려준 덕에 목을 축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장문인, 표충량 사숙을 모셔왔습니다.”
일대 제자가 알린 다음이었다.
문이 열리며 은혼이 나섰고, 그 뒤에 진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다.”
눈을 끔벅이던 표충량은 얼른 양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화산의 제자 표충량이 진무린 사숙을 뵙습니다.”
“경공을 수련했던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사숙.”
엉망인 얼굴을 보고서도 진무린은 그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을 뿐이었다.
일대 제자들은 모두 안다.
진무린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공을 지녔는지를 말이다.
“장문께 청이 있습니다.”
“혹시 제자 아이와 잠시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 것이라면 제가 더 기쁘게 받겠습니다.”
진무린의 청을 은혼이 기쁘게 받았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점심은 검소하나마 이곳에서 드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점심을 하려면 대략 한 시진 가량의 여유가 있었다.
은혼에게 답을 건넨 진무린은 걸음을 옮겨 표충량 앞에 도착했다.
그런 뒤에 자세를 낮춰 표충량을 안아 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진무린은 발을 굴러 솟구쳤고, 곧바로 화산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사이 또 발전했으니 도대체 어디까지 가실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구나.”
감탄을 토해내는 은혼 앞에서 일대 제자들은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진무린과 표충량이 사라진 절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