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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96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49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은천검제 96화

은천검제

제96화

 

다음 날 진무린의 하루는 심사장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한 채 끝났다.

세 끼 식사를 챙겨준 양소소가 매끼를 먹은 후에 내미는 영약 탓이었다.

아침을 먹고 난 다음이었다.

“삼각사의 내단이다. 혈도와 단전을 보하는 효능이 특별하고, 상단전까지 기운을 원활하게 돌리는데 특히 득이 있단다.”

내단은 처음 보았다.

듣기로는 구슬 모양이라던데 양소소가 내민 것은 쓸개와 비슷한 형태였고, 오선라미초에 버금갈 정도로 강렬한 쓴맛이었다.

먹고 난 다음이었다.

이 역시 무섭도록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운기에 들었는데 눈을 떴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애썼다. 이제 점심 먹자.”

배가 고프지 않았으나 내내 기다린 양소소의 성의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밥과 간단한 요리로 점심을 먹은 다음 양소소는 투명하게 생긴 구슬 형태의 내단을 내밀었다.

“빙궁에서 구한 설경의 내단이다.”

책에서나 보았던 내단이 신기하기는 했다. 그러나 진무린은 사실 영약으로 무언가를 얻을 단계는 아니라 여겼다.

사양하려는 찰나였다.

“힘겹겠지만, 고모의 성의를 봐서 받아다오.”

진중한 양소소의 권유에 굴복한 진무린은 감사의 뜻을 전한 뒤에 내단을 삼켰다.

오선라미초와 삼각사의 내단이 몸을 불태울 것처럼 강렬했다면, 이번에 삼킨 설경의 내단은 아예 얼려 죽이려 했나 싶을 정도로 무섭게 한기를 뿜어냈다.

한기를 이겨낸 진무린은 녹초가 된 심정으로 겨우 운기에서 깨어났다.

“장하다. 이제 저녁 먹자.”

이제 무엇을 내놓을까 싶어 밥을 먹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식사를 마친 진무린의 앞에 양소소는 실제로 작은 접시를 내밀었다.

그나마 이번은 약초였다.

뿌리와 잎사귀를 포함한 길이가 집게손가락만 한 작은 크기로 진무린도 익히 짐작하는 종류였다.

“설삼이다. 족히 만 년은 넘었으니 이 또한 잘 견뎌 내공 증진에 도움받도록 해.”

진무린은 잠시 양소소가 내민 설삼을 바라보았다.

앞에 섭취한 것들이야 무인들이 눈에 불을 켜는 종류라 그렇다 치더라도, 만년설삼은 죽던 이도 벌떡 일으킨다는 효능에 부르는 것이 곧 값인 귀물이었다.

어제오늘 섭취한 영약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왜 그러고 있어?”

“제자가 받기에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렇습니다.”

“영약을 팔아서 부를 누릴 생각이었다면 이미 성 두어 개쯤 거느리고 황후 부럽지 않게 살았을 거야. 만년설삼은 제법 오래 운기해야 한다더라. 그러니 다른 말 말고 얼른 먹어.”

재촉하는 양소소에게 어찌 다른 말을 할 수 있으랴.

진무린은 역시나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에 만년설삼을 입에 넣었다.

영약도 순서가 있는가?

몸을 태우는 듯한 열기를 경험했고, 다시 이가 갈릴 정도의 한기를 느꼈다면, 만년설삼을 섭취한 뒤에는 그 두 가지가 번갈아 덮치는데 정신이 아득할 지경쯤 돼서야 진무린은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네 가지나 되는 영약을 섭취한 탓인지 기운을 모두 녹이지 못해 아직 날뛰는 열기와 한기가 언제 터질지 몰라 불안한 지경이었다.

“애썼다.”

바느질을 멈춘 양소소는 진무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열기와 한기를 이기느라 운기에 전념했던 탓에 분명 등룡창천의 기운을 보았을 텐데도 양소소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상상조차 못 했던 영약을 전해준 양소소의 배려에 감사했고, 이제 식사가 끝나 더는 이 과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라 여겼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진무린의 앞에서 양소소는 화로에 올려졌던 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랐다.

밤이 깊었나?

대청의 문을 닫아놓아서 밖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촛불과 느낌으로 꽤 시간이 흘렀지 싶었다.

“자시쯤 되었다.”

저녁을 먹고 시작한 운기가 한밤중에 끝났으니 대략 세 시진 가량 운기했다는 의미였다.

오늘 양소소는 종일 매달려 진무린에게 세 끼를 먹였고, 그 끼니마다 강호인들이 들으면 눈이 뒤집힐 세 가지 영약을 건넸다.

진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마주 잡고 깊게 읍을 올렸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정도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본문이 내게 베풀어준 은혜에 비하겠니. 공연한 일로 부담스럽게 하지 말고 앉아.”

“예, 사고.”

진무린이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몸을 움직인 양소소가 진무린 몫의 차를 따라 앞에 놓아주었다.

“사흘을 머물고 출발하라는 말을 기억하지?”

“예, 사고.”

“내일 아침을 먹고 나면 여기에서 오십 리쯤 떨어진 운암정에 들러 하루를 머물고 그 뒤에 네가 원하는 길을 나서는 것으로 하자.”

양소소의 존재를 몰랐던 것처럼 운암정이란 이름 역시 처음 들었다.

“네가 중단전을 깨우치고, 상단전을 느낀 것은 훌륭하나 그 단계마다 내공이 받쳐줘야 하고, 또 정밀한 운용의 차이를 깨달아야 한단다.”

무공의 가르침이었다.

진무린은 상체를 세우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무릇 하수는 고수의 기운을 읽지 못하는데 이는 기운을 조절하는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네가 내 앞에서 조심한 것은 알았으나 상단전에서 풍기는 기운을 막지는 못했다.”

그랬던가.

고수 앞에 숨죽인 하수처럼 진무린의 상태를 양소소는 모두 알고 있었던가.

“네 나이를 감안하면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요, 대단한 성과이다만, 홀로 익히느라 부작용이 심하고, 제대로 된 운용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진무린이 내내 아쉬워했던 점을 양소소는 세세하게 짚어냈다.

“내일 뵙는 분에게 가르침을 달라고 매달려.”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알려줄 생각이었다면 그저 내일 뵙는 분이라 두루뭉술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종일 매달렸다만, 아직 영약의 기운이 몸에 삼 할가량 그대로 남았다. 밤에 좀 더 운기해서 길을 나서기 전에 최대한 약효를 얻도록 해.”

“예, 사고.”

“나는 이만 일어나마.”

“편히 쉬십시오, 사고.”

진무린의 인사를 받은 양소소가 방으로 향했다.

이런 기연을 얻었는데 게으름으로 일을 망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진무린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엄중한 태도로 바닥에 앉아 다시 운기에 들었다.

대략 이각쯤 지난 뒤였다.

방에 들어갔던 양소소가 소리조차 없이 대청으로 나와 진무린의 방을 살폈다.

그녀는 대견하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소리 나지 않게 움직여 마당으로 나섰다.

겨울밤 하늘에는 금강석을 흩뿌린 듯 별이 총총하고 그사이에 뜬 영롱한 달은 수많은 고수를 거느리고 강호를 호령하는 영웅처럼 심사장과 양소소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소녀의 기다림에 주신 답이라 여깁니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던 양소소가 나직하게 혼잣말을 건넸다.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은 아련한 그리움이었다.

 

**

 

은천문 내부의 일을 임운령이 완벽하게 정리하자, 전도위는 곧바로 폐관수련을 신청했고, 다음 날 수련동에 들었다.

강호에 은천문의 검법이 풀린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당장 파훼법이 떠돌지는 않는다.

은천문의 제자들이 강호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일은 세월이 꽤 흘러야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수의 대결, 특히 구대문파와 같이 체계가 잡혀 있고, 검법만 연구하는 이들이 매달리는 곳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이미 은천문의 파훼법을 연구하고, 검법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구대문파의 검법을 은천문도 연구한다.

초식과 내공의 운용까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니 참고만 할 뿐인데, 은천문은 아예 본전까지 싹 털린 꼴이었다.

전도위는 본인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일은 자신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알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은천검법, 섬전검법, 묵룡검법을 하나로 묶은 반쯤 새로운 검법이었다.

진무린이 어려울 때, 누군가 은천문을 노리고 달려들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검법, 비록 눈에 익은 수법이나 예상하지 못했던 운용을 통해 적을 제압하는 검법을 만들기 위해 그는 수련동의 문을 걸어 잠갔다.

횃불을 받은 그의 검이 번득이며 수련동 안의 어두운 공간을 갈랐다.

흡사 검무를 연습하는 사람처럼 전도위는 천천히 검을 움직였는데 이때 그는 내공의 흐름을 매 순간 확인했다.

검과 기운이 일치하지 않으면 날카로움이 덜하고, 내거나 회수하는 동작에 빈틈이 생긴다.

뒤트는 그의 손목을 따라 검이 바삐 위로 올라갔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려운 일이나 은천문의 대사부 전도위가 아니면 당장 이 중요한 사명을 책임질 사람은 없었다.

 

**

 

아침을 먹은 진무린이 인사를 하기 위해 섰을 때였다.

“한번 입어보련?”

내내 손에서 바느질을 놓지 않았던 양소소가 앞섶이 열린 외포를 건네주었다.

사양한다면 양소소의 성의를 무시하는 일이다.

진무린은 두 번이나 감사하고 황송한 마음을 표한 뒤에 그녀가 건네준 외포를 몸에 걸쳤다.

“보기에는 잘 맞는구나.”

진무린의 등을 쓸어내리며 아래를 확인한 양소소가 궁금한 느낌의 시선을 들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지금껏 입었던 그 어떤 옷보다 편합니다.”

다른 이가 보았다면 믿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말도 안 되는 영약을 건넬 때보다 외포를 확인하는 양소소의 표정이 더 행복해 보인다는 사실이 말이다.

“솜도 적당해서 봄날까지는 충분히 입을 것 같습니다.”

“공력을 짐작해서 얇게 했는데 혹여 날이 너무 추우면 나중에 입도록 해.”

“주신 영약 덕분에 이 솜도 좀 많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넉살 좋게 대꾸하는 진무린을 향해 양소소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그 옷을 줄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하다. 그리고 운암정에 들르면 이것이 필요할 테니 가져가.”

양소소는 술병이 담긴 자루 하나를 건넸다.

“수고만 끼치고 이대로 떠납니다. 그렇더라도 반드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위해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이었다.

눈치를 알아챈 양소소가 진무린의 팔을 받쳤다.

“됐다. 고맙다는 표시는 이런 인사보다 다시 찾아주는 것으로 대신하자.”

몇 번이나 진무린을 말린 양소소는 심사장을 함께 나섰고, 돌다리를 건너 피음향의 경계까지 따라 걸었다.

고개를 오르자 뒤편은 팔경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피음향이고, 앞은 호북이 놓였다.

“사고. 무탈하십시오.”

“은천문의 제자는 걸음을 나설 때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어야 하는 법. 본문의 미래를 책임진 너는 뒤돌아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말을 마친 양소소가 어서 출발하라는 투로 손을 내밀었다.

읍을 올린 진무린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에 왼편으로 돌아가는 길이 나타났다.

저곳을 돌면 고개가 보이지 않는다.

몸을 트는 그 짧은 사이에 양소소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어쩐지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 탓이었다. 그러나 양소소의 마지막 말이 마치 가르침과 같은 터라 진무린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반드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십 리 길이라면 진무린에게 그다지 먼 곳이라 하기 어려웠다.

딱딱하게 얼은 길을 걷던 진무린은 주변을 살핀 뒤에 훌쩍 몸을 날렸다. 영약을 섭취하고 나면 내공이 급격하게 늘어난다는 말이 있어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무의 위를 밟으며 솟구친 진무린은 곧장 앞에 보이는 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내공의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몸에 남았던 영약의 기운이 날뛰는지 갑자기 열이 오르는가 하면, 느닷없는 한기가 느껴져 내공의 운용을 방해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크게 득을 본 것도 있는데 내내 거슬리던 내상이 완벽하게 치유돼 기의 흐름이 원활했다.

제법 달린 진무린은 마침내 양소소가 일러준 장소에 도착했다.

정상 바로 아래 마치 정자를 세워 놓은 형상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고 들었다.

‘저건가?’

주변을 둘러본 진무린은 운암정에 내려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사장이 하천에서 물러나 야트막한 산에 숨은 모습이라면 운암정은 사람의 발길을 아예 외면한 형태였다.

주변을 둘러싸듯 뾰족한 바위가 서 있어서 아래에서는 확인조차 어려웠고, 위에서 확인하지 않는다면 아예 찾기도 어려운 장소였다.

진무린은 팔각형 정자 모양의 바위 안쪽에 뚫린 동굴로 고개를 돌렸다.

“계십니까?”

진무린이 나직하게 사람을 찾은 뒤였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인이 동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머리칼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노인은 먼저 눈가를 좁혔고, 이어 진무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얇은 콧대와 마른 입술, 그리고 왼편 귓가에 달린 사마귀.

‘설마?’

노인을 살핀 진무린은 얼른 양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은천문의 진무린이 파천신군 남굉모 선배를 뵙습니다.”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도 남굉모는 진무린을 노려만 볼 뿐, 쓰다, 달다, 말 한마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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