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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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54화
은천검제
제154화
납타이를 잡기 위한 운진의 준비는 확실히 지난 모습과 달랐다.
그는 먼저 홍화루의 종복들에게 부탁해 백색의 천으로 만든 깃발 네 개를 준비했고, 그 위에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를 써넣었다.
마당에 네 개의 깃발을 정사각형 형태로 꽂은 그는 그 안쪽에 작은 상을 놓고 물과 향료를 올렸다.
그 사이 진무린은 정동추를 찾아 협조를 구했다.
“납타이란 놈을 이런 식으로 불러내면 하북 분타를 벌할 증거가 사라지는 꼴 아니냐.”
정동추의 첫 번째 반응은 하북 분타를 벌할 명분과 증거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어쩐지 막무가내로 “네놈의 죄를 알렸다!” 한 뒤에 목을 뽑아버릴 것 같은데 일을 처리하는 정동추의 모습은 상상과 확실히 달랐다.
“때가 되면 알려다오. 마기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납타이란 놈의 면상을 한 번은 보고 싶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마기를 청한 뒤에 감사하는 정도문파의 제자라니. 내막을 모르는 정파인들이 보면 눈이 뒤집힐 일이구나. 그건 그렇고. 반 시진 뒤라 했으니 아직은 짬이 있지?”
의논이 마무리되는가 싶은 순간에 정동추는 화제를 바꾸었다.
“뭐라 해도 정작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모산의 문주와 너의 사매가 아니냐. 문주라면 몰라도 그 아이는 소능산에라도 데려가 다독여주어야지.”
“사매라면 이미 의지를 보였습니다. 강한 무인이니 잘 견딜 것입니다.”
“이렇게 참.”
정동추는 마치 섬도곤을 대하는 것처럼 갑갑한 표정이었다.
“납타이의 목을 반드시 베고 싶다 하는 것을 보면 분명 분하고 억울한 것이 있었겠지.”
말을 마친 정동추는 더는 말을 잇고 싶지 않다는 투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준비를 마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무린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
외부 상황을 알지 못하는 귀혼곡에서 백면호리는 그야말로 행복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쫓길 염려 없지, 사는 것 걱정 없지, 종무헌이 요정과 비무를 나누는 덕분에 원예를 찾을 이유 또한 없었다.
더불어 요정은 나날이 발전해서 얼핏 보기에 종무헌의 검에 더는 소매나 옷깃이 잘리지도 않았다.
오전 비무를 마친 종무헌이 검을 집어넣은 뒤였다.
“내일부터는 비무를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시간을 정해 나설 것 없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백면호리가 화들짝 몸을 일으킬 언질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우리 아이가 그 정도로 발전한 게야, 아니면 뭔가 서운한 게 있나?”
“이제는 내공과 초식의 운용을 돌봐야 할 때입니다. 대사형이 계셨다면 바로 잡아주었을 텐데 저는 소수음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안다 해도 무공을 지도하지 못합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사부를 찾아야지요.”
“오.”
빤한 내용이 새삼스럽다는 것처럼 백면호리는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상등에 다녀와야겠구먼.”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결론은 바로 있었다.
“함께 가겠나? 이곳이야 어차피 문을 막으면 누구도 못 들어오니 잠시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바깥의 상황도 알아볼 겸 말일세.”
“대사형과 사매의 지시가 없이는 이곳을 비우기 어렵습니다.”
“참 뻑뻑해.”
종무헌의 강직한 답에 백면호리는 서운한 얼굴이었다.
**
정도맹을 찾은 은혼은 바로 황종관과 마주 앉았다.
“먼 걸음에 고생하셨소.”
“결과가 미진해 아쉬울 뿐입니다.”
은혼은 곧바로 아미의 의견을 황종관에게 전했다.
아쉬워할 줄 알았던 황종관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투였다.
“나는 이 길로 상등으로 출발해 진 대협과 교주를 만나볼 참이오. 장문인께서는 어찌하실 게요?”
“본파에 돌아가 결정을 기다릴까 합니다.”
“소림과 무당은 말할 것 없고, 곤륜마저 침묵하고 있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유리한 쪽에 서겠다는 의미일 게요. 또 하나, 몸을 숨긴 비월단주를 아직 찾지 못했으니 분명 그를 돕는 세력도 있을 것이오.”
“본파보다는 맹주께서 주의하셔야 할 일이 아닙니까?”
“삼보를 개방한다는 말은 이미 돌았소. 자칫 내가 사라지면 모든 과실을 마교와 은천문, 화산이 얻게 되는 터라 당분간 나를 노리지는 않을게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황종관은 당당했다.
“상등에 가서 결정 나는 것이 있다면 가장 먼저 화산에 연락하겠소.”
“도울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나서겠습니다. 맹주께서 상등으로 향하신다니 저 역시 잠시 쉬었다가 바로 본파로 향하겠습니다.”
먼 길을 달려왔음에도 은혼은 바로 출발할 뜻을 밝혔다.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니오?”
“하루라도 빨리 본파의 모습을 보고 싶으니 이 또한 병인가 봅니다.”
넉넉하게 웃은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 대협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그리하겠소.”
짧은 만남을 끝낸 은혼은 황종관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말한 화산의 모습이 표충량을 의미한다는 것을 황종관은 알지 못했다.
‘얼마나 발전했을까.’
표충량을 떠올린 은혼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
표충량은 진무린에게서 공력을 얻었고, 알지 못하는 사이 등룡창천의 기운마저 얻었다. 거기에 은혼이 화산의 내공심법과 무공, 보법, 경공을 가르쳤다.
그 덕분일까.
표충량은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보고 배우는 것은 놀랍다.
가뜩이나 애늙은이 같던 표충량은 진무린의 듬직한 성품에 은혼의 온화함을 지녔고, 무공을 발휘하는 풍모 또한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은혼이 강호에 나선 이후에도 표충량은 하루에 한 번 낙안봉에 올라 먼 하늘과 넓게 펼쳐진 화산을 돌아보았다.
‘진인. 제자 표충량이 인사드립니다. 사부님과 진 대협께서 강호를 위해 애쓰시는데 제자는 아직 힘이 되지 못합니다.’
표충량이 그리워하는 이가 청강 진인이요, 다음은 사부 은혼이며, 마지막은 진무린임을 화산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알았다.
바람이 거세게 분 뒤에 표충량은 낙안봉에서 몸을 돌렸다.
이전의 모습이 새끼 매와 같았다면 지금은 표충량이 펼치는 경공은 미숙함을 털어낸 매의 모습이었다.
아래를 향해 뚝 떨어진 표충량은 가볍게 중간의 바위를 차고 떠올라 섬뜩하게 입을 벌린 절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표충량이 수련장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사숙, 오십니까?”
나이 많은 사질들이 연이어 고개를 숙였다.
최근 표충량의 조언을 받은 제자들이 부쩍 실력이 는 데다 틈틈이 비무를 통해 얻은 것을 전해준 탓이었다.
전처럼 비무를 핑계로 팔을 부러트리는 일?
지금 그런 짓을 하려다가는 다른 동료들에 의해 팔다리가 부러지고 남는다.
사조부 청강 진인, 사부 은혼, 숙부 진무린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표충량이었다.
“사숙. 소질이 검에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말씀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이 있나 살펴볼게요.”
“사숙께서는 말씀을 편히 하셔서 소질을 편케 해주십시오.”
“오래 화산을 지킨 사질들을 어찌 함부로 대할까요? 그러지 말고 궁금한 점을 말씀해주세요.”
봐라.
이러니 누군들 고개가 안 숙어지겠나.
사질은 어려움을 털어놓고 부족한 초식을 펼쳐 보였다.
“내공의 수발이 원활치 않은 듯 보여요. 사질은 검을 내세요. 저와 비무를 할 텐데 보법에 중점을 두되, 초식마다 변화하는 내공에 집중하세요.”
“사숙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펼쳐지는 비무에서 표충량은 싫은 기색 한 점 없이 사질이 깨달을 때까지 그의 속도와 수준에 맞춰 검을 내었다.
쉐에엑! 쉑! 쉑!
한순간, 깨달음을 얻은 사질의 검이 바뀌었는데도 표충량은 또 그것을 완벽히 붙들 때까지 오래도록 비무를 이었다.
쉐에엑!
표충량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사질이 곧바로 검을 앞으로 내어 잡고 상체를 깊게 숙였다.
“사숙! 소질이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제가 아니라 등선하신 사조부와 출타하신 사부, 그리고 본파와 연이 깊은 진 대협께서 주신 가르침입니다. 사질은 부디 지금 깨달은 검을 소중히 간직해 혹여라도 어렵고 힘든 이들을 보거든 반드시 도와주세요.”
심지어 표충량은 나이 많은 사질에게 같은 자세로 깊게 고개 숙여 바른길을 갈 것을 청하는 터라 지켜보는 화산의 제자들은 묘하게 가슴이 울려 눈시울을 붉히는 이도 많았다.
**
진무린은 모려원과 함께 대청에 앉아 운진의 준비를 지켜보았다.
네 곳에 세운 깃발이 흔들리고 그 안쪽에 물과 향로를 준비했으며, 역시나 알아보기 힘든 글자를 써 놓은 커다란 등 두 개를 뒤편에 세웠다.
이때 진무린은 처음으로 깃발과 등에 써놓은 글자를 제대로 보았다.
‘혹시?’
검의 양쪽 날에 써놓은 고어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납타이를 잡을 중요한 순간에 운진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기는 곤란했다.
“사매.”
진무린이 부르자 함께 탁자 건너편에서 마당을 지켜보던 모려원이 고개를 돌렸다.
“어려운 일이나 사매가 잘 견뎌주리라 믿는다.”
“혹여 소매가 또 기억을 잃어 깨어나면 꽁꽁 묶어서 동굴에 넣어주세요.”
“왜?”
“대사형에게 검을 낼까 봐 그렇지요.”
그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었던 모양이었다.
이전에 은천문에 있을 적이라면 이럴 때 어깨를 다독여주었으련만, 정동추가 ‘애정행각’이란 말을 뱉은 이후 그 작은 행동 하나가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과거에는 볼에 붙은 머리칼도 올려주곤 했었다.
“왜요, 대사형?”
탁자에 올려진 모려원의 손이라도 잡아줄까 해서 진무린이 시선을 떨어트렸을 때였다.
“준비가 끝났소, 진 대협.”
마당에서 고개를 돌린 운진이 진무린의 생각을 막았다.
함께 몸을 일으킨 진무린과 모려원은 마당으로 나섰다.
“모 소저는 노도의 뒤에 앉아 계시면 되오.”
“운기를 해도 되나요?”
“관계없을 게요. 혹여 고통을 견디기 어려우면 깃발의 바깥으로 나가면 되리다. 진 대협께서 보시다가 노도가 요청하면 모 소저를 밖으로 데려가 주시오.”
“알겠습니다, 문주. 그런데 마기가 필요하다면 교주께서 이리 나오셔야 합니까?”
“그 점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소.”
세 사람이 대화를 마친 다음이었다.
진무린은 정동추를 찾아 방으로 들어갔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다만, 밖에 준비한 장소에서 마기를 주셔야 한답니다.”
“번거롭기도 하다.”
투박한 말을 건넨 정동추가 손을 내밀었다.
진무린이 그의 팔을 잡아 부축해서 함께 방을 나섰다.
마당에 나선 진무린은 대청의 의자를 가져다가 정동추를 앉게 했는데 그것으로 준비가 모두 끝났다.
“술법을 부리는 내내 마기를 내야 하나?”
“향을 피우면 마기를 내 주시고, 등에 붉은빛이 돌면 멈추셔도 되오.”
마지막으로 정동추의 질문에 운진이 답을 하면서 민가의 마당에 긴장이 맴돌았다.
진무린을 돌아본 모려원이 가부좌로 자세를 잡았고, 오른손의 소매를 길게 늘어트린 운진이 향을 한 움큼 잡아 향로에 뿌렸다.
정동추가 모려원과 운진을 향해 마기를 뿌려냈고, 운진이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모려원은 운기하는 무인의 자세였는데 같은 자세인 운진은 생사대적을 앞에 둔 것처럼 엄중한 모습이었다.
숨을 세 번쯤 쉬었을 때였다.
향로에서 하늘하늘 피어나던 연기가 사악한 느낌으로 바닥에 깔려 운진과 모려원을 둘러쌌다.
휘이이이이익-.
이어 느닷없이 마당에 불어온 바람이 깃발과 뒤에 세워 놓은 두 개의 등불을 흔들었는데 거짓말처럼 안에 깔린 연기는 흔들림조차 없이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주문을 외우던 운진이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세워 가슴 앞으로 세운 직후였다.
실제로 뒤에 세워 놓은 두 개의 등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정동추가 숨을 나직하게 내쉬며 마기를 거두었는데 등은 더욱 새빨갛게 변해서 마치 피를 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운진이 다시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주문을 외운 다음이었다.
바닥에 깔렸던 연기가 모려원을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감쌌다.
둥글게 모려원을 타고 오른 연기가 머리까지 감춘 다음이었다.
양팔을 높다랗게 든 운진이 고개를 젖히다시피 하늘을 바라보았고,
“이노-옴!”
상등을 뒤덮다시피 거대한 납타이의 얼굴이 하늘 위에서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