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49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49화
은천검제
제149화
아미의 장문인 현절 사태는 진무린의 이름을 듣자 확연히 양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렇더라도 아미 특유의 날카로운 성향과 현절 사태의 카랑카랑한 성품이 아예 감춰진 것은 아니었다.
“맹주께서 공개적으로 삼보를 내놓겠다는 뜻에는 얼마든지 협조하지요. 그렇다고 해도 사부님을 농락한 자들에 대한 징계조차 없이 사과로 일을 마무리하기는 어렵소.”
“장문께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교주가 사과하고, 관련자의 목을 쳐 그 죄를 벌한다면 본파는 마교 교주와 한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오.”
현절의 단호한 태도에 은혼은 고개만 끄덕였다.
은혜는 3년 가고, 원한은 평생을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막말로 화산은 구정봉의 시신을 받아 원을 풀었으나 아미는 아직 손에 쥔 것이 없는 형편이었다.
“혹여 진 대협과 운진 문주를 뵙게 되거든, 본파의 입장을 잘 설명해 주시오.”
한편으로 현절사태는 진무린과 운진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은 터라 은혼은 다른 말을 내기 어려웠다.
“소림과 무당의 의견은 어떻소?”
“정도맹에 있던 제자들을 통해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압니다. 말씀드렸듯이 본인이 아미산을 직접 찾은 이유는 마교와의 원한이 깊어 혹 오해가 있으실까 염려해서입니다.”
은혼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또한, 마교와 은원이 깊은 본파와 아미가 나선다면 정도맹에 속한 다른 곳이 거부하기 어려우리란 기대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건넨 나직한 당부에도 현절은 변함이 없었다.
더는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은혼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를 위해 현절은 아미산에서 십 리나 함께 걸으며 배웅했다.
몇 번의 당부를 전한 아미의 일행이 돌아간 뒤였다.
“진 대협을 어찌 뵐까.”
하늘을 향해 나직한 혼잣말을 털어낸 은혼은 화산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교주 정동추를 직접 보았던 은혼은 책임자의 목을 달라는 아미의 요구가 버거운 탓이었다.
**
진무린이 들어선 민가에서 정동추는 하릴없는 괴팍한 고수의 모습 그대로였다.
대청을 바라보는 자세로 탁자에 오른팔을 걸치고 앉은 그는 진무린과 운진을 보자 덜컥 서운한 감정이 올라오는 눈치였다.
“내가 있으면 말이 조심스럽더냐!”
“혈교를 향하기 전에 납타이의 행방을 알 수 있을까 해서 다녀온 길입니다.”
“그걸 꼭 밖에서 해야 하는 거냔 말이다.”
“노도의 수양이 부족해 높은 곳을 잠시 찾았던 것이오. 또, 홀로는 불안하여 모 소저에게 청했으니 교주께서는 그리 이해해 주시오.”
“크흠.”
운진까지 나서 점잖게 다독이자 정동추는 헛기침으로 표정을 바꾸었다.
“하여간 정도에 속한 인간들은 뭐 하나 시원하게 일을 진행하는 법이 없어. 삼보 중 하나를 내놓겠다는데 무슨 의논이 그리 긴지 원.”
“점창과 공동을 제외해도 일곱 개 문파가 있습니다. 뜻을 전하고 회신을 받아야 하니 자연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려면 도대체 정도맹은 왜 만든단 말이냐. 일단 결정한 뒤에 통보하면 되는 게지.”
갑갑해 하는 정동추를 진무린은 묵묵하게 보았다.
이리 성격이 불같고, 좁은 곳을 싫어하는 정동추가 구태여 상등의 민가에 남아 있는 이유가 과연 섬도곤 때문일까?
진무린은 정동추의 의도가 궁금했다.
“언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나? 나야 저놈이 일어나야 출발하지.”
“이곳에 있는 한 섬도곤은 안전합니다. 내부의 일도 단속하셔야 할 테니 급하시면 먼저 일어서셔도 됩니다.”
“정도맹에서 보낼 답은? 아직 그 답을 듣지 못했다.”
변명처럼 대꾸를 내놓던 정동추가 진무린을 향해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내가 귀찮으냐?”
“그렇다기보다는 급한 일을 두고도 계속 이곳에 묶여 계시니 방법을 고민해 본 것입니다.”
심오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정동추는 먼저 상등의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본교로 돌아갔을 때 재차 반란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양패구상일 게다.”
그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본교의 성향이 그래. 죽은 것들의 수하들이 있으니 독살을 노릴 수도 있지. 오해하지 마라. 그들 따위가 두려워 이 정동추가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다.”
말을 마친 그가 시선을 내려 진무린을 똑바로 보았다.
“내가 쓰러지는 순간, 본교는 반드시 강호일통을 외치며 도발한다. 본교의 무공이 부작용이 심해 주화입마에 드는 것을 너도 알 것이 아니냐. 그리 익힌 무공으로 할 일이 없으니 갑갑해 하는 심정도 이해해야 한다.”
강호에 피가 흐르는 것을 막고자 지루함을 견디는 마교 교주라니, 저런 교주를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진무린이 내심 감동하는 순간이었다.
“저놈이 일어나면 함께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저놈을 미끼로 던져두고 내가 뒤에서 남은 것들을 처리하지.”
존경심 우러나오는 뜻을 펼쳐냈던 정동추가 단박에 마교 교주다운 계획을 쏟아내 감동을 깨트렸다.
“섬도곤이 부상이 심합니다. 누군가 달려든다면 몸을 간수하기 어려울 텐데 그런 위험한 임무를 감당하겠습니까?”
“본교의 안녕을 위해 순교하는 일이니 저놈도 기쁘게 죽을 것이다.”
한숨이 푹 나오는 결론이었으나 마교가 원래 저런 곳이려니 하는 생각에 진무린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먼저 나갔던 아이는 왜 안 와?”
“모 소저라면 진 대협께서 공력을 나누어 주셨기에 그것을 연마하고 온다 하였소.”
“공력을 또?”
“본문의 검술을 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진무린이 답을 내놓았다.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나눈 뒤였다.
오랜만에 암연의 기운이 민가에 앉은 진무린을 찾았다.
“잠시 다녀올 일이 생겼습니다.”
“홀로 참 바쁘기도 하다.”
배배 꼬인 정동추와 납타이를 찾지 못해 기운 빠진 운진을 남겨두고 진무린은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 적당한 장소로 소능산만 한 곳이 없고, 암연을 만나는 일에 모려원이 있어 방해될 것은 없었다.
**
원예는 제법 기울어진 햇살을 즐기는 사람처럼 창가에 서서 소능산을 지켜보았다.
번쩍번쩍, 창으로 달려오는 빛에 끌려 섰던 그녀는 누군가 검을 연마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홀린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공력이 높아지면 시력 또한 대단해져서 먼 거리를 한눈에 담는다고 하던데 원예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누굴까.’
진무린 아니면 모려원이리라.
그런데 진무린은 저런 곳에서 수련할 수준은 이미 지났으니 지금 번득이는 저 검의 주인은 모려원이 분명했다.
둥근 이마, 흑요석을 심어놓은 것처럼 또렷한 눈빛, 밝은 미소에 재치있고, 영리하며, 무엇보다 마교의 장로쯤 어려워하지 않는 무공도 지녔다.
출신도 구대문파가 이전부터 한 수 접어주던 은천문에 속한 무인이었다.
부러운 것이 많았다.
그중에는 어릴 적 진무린과 함께했을 세월도 있었다.
그 안에 추억도 남았을 테고.
도대체 열 살의 진무린, 열두 살의 진무린, 열다섯 살의 진무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원예가 상상으로 진무린의 어린 모습을 그릴 때 소능산에서 보이던 검광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저런다고 벽계를 상대로 이겨낼 수 있을까.
진무린에게 구주의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소능산을 향해 원예는 나직한 한숨을 쏟아냈다.
**
진무린은 느긋하게 걸어 소능산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사당 앞에 도착했을 때 모려원은 검을 수습한 채 계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사형, 어쩐 일이세요?”
“암연의 연락이 있었다. 검은 어떠냐?”
흥분이 그대로 남은 모려원의 눈과 볼이 이미 답을 한 것과 같았다.
“분명 묵룡을 본 것 같은데 아직 손에 담지는 못했어요.”
“서둘러서 되는 것이 아니다. 느긋하게 마음먹고 운기할 적에 몸의 감각과 그에 따른 검의 형상을 떠올려 봐.”
“감사합니다, 대사형.”
모려원이 검을 내어 양손을 맞잡아 인사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사당의 뒤편에서 장 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노대.”
“진 대협께서 누군가 대화하고 있어 의아했더니 모 소저와 계셨군요.”
“노대는 소녀가 반갑지 않으세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 소저를 뵈니 일에 치였던 이 늙은 사람의 마음 한구석이 시원해지는 것 같습니다.”
장 노대의 능숙한 답변에 가벼운 웃음이 지나갔다.
“무슨 일입니까?”
“전 사부께서 폐관수련을 마치고, 수련동에서 나서셨습니다.”
장 노대는 먼저 전도위의 소식을 전했고, 그가 고심해 만들어낸 검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제자들이 익힐 때까지 보름 정도 소요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본문을 나설 수 있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진무린의 표정을 살핀 장 노대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본문과 진 대협의 이름을 강호에 알린 것은 신경 쓰지 말라는 문주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정말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이미 의지와 검법을 전했으니 그 점은 전적으로 진 대협께서 결정하실 문제라 하셨습니다.”
진무린을 다음 대 문주로 여기고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가볍게 전한 말이나 담긴 무게는 그와 달라서 진무린은 감히 대꾸를 내지 못했다.
“혈교를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도맹과 정도 문파, 마교를 하나로 묶어 벽계를 상대할 계획입니다.”
진무린은 정동추가 제안했던 내용, 그리고 정도맹의 반응 등을 장 노대에게 알려주었다.
“본문에서 파악하고 있는 사안들입니다. 진 대협께서 청을 하실 때 힘을 실어드리기 위해 본문은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것입니다.”
“문주께 제자가 한없이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사부님께도 찾아뵙지 못해 송구해하더라고 전해주시고요.”
“그리하겠습니다, 진 대협.”
장 노대의 답을 들은 진무린은 모려원을 향해 의미 있는 시선을 주었다.
“노대. 제가 묵룡을 보았노라 전해주시겠어요?”
“오오!”
“아직 감히 얻었노라 말씀드릴 단계는 아니나 조만간 문주와 사부, 장로분들을 모시고 검을 보일 수 있으리라 믿어요.”
묵룡검법이야 말로 은천문의 진정한 힘이요, 등룡창천을 향한 첫걸음과 다름없어서 장 노대의 반가움은 절대 가식이 아니었다.
“기쁜 소식입니다. 모 소저의 검에 용을 새기는 날, 축하의 의미로 이 늙은이가 향이 좋은 술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서두셔야 할 거예요.”
“본문에 용을 새긴 제자가 나오는 일인데 서둘러야 한다면 더욱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장 노대가 전에 없이 기뻐하는 것으로 대화가 끝났다.
하루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인사를 전한 장 노대가 사당 뒤편으로 모습을 감췄다.
“대사형. 마교의 손이 필요할 정도로 벽계라는 곳이 그렇게 강한가요?”
저녁을 준비하는 홍화루를 보며 모려원이 건넨 질문에 진무린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강하다는 한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내게 와라.’
지금 진무린의 바람은 그저 궁도가 다른 곳을 노리지 말고 직접 달려오는 것, 그것 하나였다.
**
정도맹 섬서지부장의 팔이 잘린 사건으로 곤륜은 시끄러웠다.
‘죄가 있어도 우리가 처벌한다.’
점창과 공동을 봉문시킨 맹주라 해도 곤륜은 달라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그런 참에 속가 제자의 팔을 잘랐고, 그 죄를 만천하에 떠들어서 곤륜의 체면을 상하게 했다.
마음 같으면 당장 달려가서 강력하게 항의한 뒤에 사죄를 요구하고 남는데 두려운 것은 은천문 진무린과 맹주의 무위였다.
점창과 공동이 봉문한 것을 보면 쉬 달려들 인물들 아니었다.
잠자코 있자니 죄를 자복하는 꼴이요, 달려들자니 봉문을 염려해야 할 상황이라 곤륜은 참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국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더할 때 이번에는 정도맹에 파견 나가 있던 장로가 달려왔다.
“장문인. 정도맹주가 삼보를 내놓겠노라 공언하였소.”
그가 전한 소식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삼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삼보를 개방하면 그에 속한 아홉 개의 관이 있다고 하오. 그곳을 통과한 자는 세상을 울릴 무공을 얻는다 하는데 정도맹은 아예 영웅대회를 열어 아홉 명을 공평하게 선발하겠다고 나서고 있소.”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올 만한 소식이었다.
강호에서 아홉을 꼽는다면 당연 구대문파의 차지였다.
더구나 점창과 공동마저 빠진 상황이라면 곤륜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따놓은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내내 삼보를 찾는 자를 무림공적에 올리던 정도맹이 왜 갑자기 개방을 외치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모종의 계획이 있는 것으로 보이오. 우리가 짐작하지 못하는 적을 상대하려는 것은 아닌가 싶소. 맹주가 마교 교주와 손을 잡을 정도라면 말 다하지 않았겠소?”
“마교 교주와 손을 잡았습니까?”
“유가장에 있다는 보물을 마교 교주 정동추가 내놓은 것이오. 이 때문에 소림과 무당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소.”
이는 절대 뒤로 물러나 있을 일이 아니었다.
곤륜파의 장문인 진하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직접 소림과 무당을 방문하겠습니다.”
“그리하면 확실하겠소.”
당분간 정도맹의 어떤 요구에도 응하지 않겠다던 장문인 진하자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공을 얻고 나서 두고 보자.’
진하자는 마교 교주와 손을 잡았다는 말에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마교와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문파가 곤륜이었다.
그만큼 충돌도 잦았고, 희생자도 많았는데, 반면에 독하고 욱하는 성향은 마교와 비슷하게 닮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