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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46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44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은천검제 146화

은천검제

제146화

 

다음 날 오전, 진무린은 상등의 소능산에 도착했다.

아침을 먹은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은 시간이었다.

정면에는 홍화루, 고개를 내리면 원예의 민가가 보이는 장소였다.

진무린은 한가한 사람처럼 새로 올린 사당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감추고 숨길 것이 뭐가 있겠나.

솔직히 털어놓자면 오행신위의 기운을 이해하고 깨달은 뒤로 느껴지는 감각과 감정에 적응할 여유가 필요했다.

‘세상의 모든 기운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구나.’

상등을 바라보며 진무린이 느낀 감상이었다.

성취감을 따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허탈한 감정도 올라왔다.

이럴 때면 유독 청강 진인이 그립다.

그가 있었다면, 잔잔한 미소와 음성으로 진무린을 다독여주었을 텐데 지금 강호에 그런 인물은 없다.

진무린은 청강이 그리울 적마다 하던 대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구정봉의 목을 잘라 화산에 보냈고, 교주의 사과를 받는 선에서 마교와의 은원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혹여 서운하시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생각을 전한 진무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걸음을 내디디면 달라진 강호의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지금까지 미련할 정도로 묵묵하게 조력자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두이산의 대결 이후로는 누구나 진무린이란 이름을 알 정도로 떠들썩한 인물이 되었다.

‘먼저 혈교다.’

마음을 다잡은 진무린은 계단을 걸어 소능산을 내려갔다.

혈교를 노리며 세운 또 하나의 계획을 실행할 참이었다.

 

**

 

태양이 정도맹의 전각을 환하게 비추도록 윤고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통틀 무렵부터 꼼짝 못 하고 황종관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비월단의 부단주는 오금이 저린 몰골이었다.

내내 책상에서 무언가를 적던 황종관이 마침내 몸을 일으켜 부단주가 앉아 있는 탁자로 움직였다.

“부단주. 다시 한 번 확인하겠다. 분명 단주에게 명령을 전달했고 확인했다고 들었는데 혹 내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나?”

“확실하게 전달했다는 전령의 보고도 있었습니다.”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인 황종관은 시선을 돌렸다.

“부관! 지필묵을 가져와.”

“예, 맹주.”

섬서지부장의 팔을 자른 사건과 윤고상의 일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참이었다. 행여 불똥이라도 떨어질까 싶은 부관이 날랜 동작으로 황종관이 요구한 세 가지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명령을 지시한 시간, 확인한 전령의 이름, 그리고 오늘 오전에 윤고상 단주가 도착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적어주게. 아! 부관은 여기 있어.”

황종관의 지시에 마른침을 삼킨 부단주가 붓을 들었고, 부관은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동트기 전까지 도착하지 않을 경우, 척살령을 내린다는 지시 사항도 분명하게 밝혀줘.”

움찔했던 부단주가 다시 붓을 놀렸다.

“거기에 부관이 참관했다고 기재하는 것으로 끝내지. 부관은 내용을 확인하고, 다른 의견이 없다면 가장 아래에 자네 이름을 적어.”

급하게 내용을 확인한 부관이 이름을 적고 나자 황종관은 진술서를 돌려 내용을 살폈다.

“이제 수결을 해야지.”

황종관의 요구를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부단주와 부관은 먹을 손바닥에 묻혀 이름 아래에 차례대로 찍었다.

“두 사람은 이제 나가도 좋다. 부관은 내가 책상에 올려놓은 명령서를 백호단에 전해.”

부관이 책상에 있던 명령서를 들고 탈출하는 사람처럼 바삐 집무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맹주. 이제 저는 맹 바깥으로 나가도 되겠습니까?”

“일이 있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싶어 여쭙는 것입니다.”

부단주가 어렵게 질문을 건넸다.

“흠.”

황종관의 첫 번째 대꾸는 묵직한 숨소리였다.

“백호단에 윤고상 단주의 목을 가져오라 명령서를 내린 참일세. 이런 상황에서 자네가 외출하면 공연히 오해를 사지 않겠나? 그러니 당분간은 맹에서 지내는 것이 좋지.”

맹주가 이토록 강단 있는 인물이었던가?

황종관을 바라보는 부단주는 완전히 기가 꺾인 느낌이었다.

“책상에 명령서가 하나 더 있네. 이 시간 이후로 윤고상의 비월단 단주 직위를 해제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새로운 단주를 임명할 때까지 부단주가 책임지고 운영하도록.”

왜 대답이 없느냐는 투로 바라보는 황종관의 시선에 부단주는 겨우 “예, 맹주.” 하는 답을 내놓았다.

 

**

 

아침을 먹은 모려원은 대청에 앉아 운진과 담소를 나누었다.

“부탁은 했지만, 이안공자가 이렇게 빨리 도착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 때문에 노도가 이곳에 있는 것이라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화를 이어가는 모려원이 너무나 궁금하다는 반응이어서 운진은 만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안공자가 거대한 갓을 착용하였는데 그 바람에 백면호리 홀로 부축해서는 산을 넘기 어려웠소. 어쩌겠소? 사람들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며 그나마 수월한 길을 택할 수밖에.”

“그렇죠. 맞죠. 그래서요?”

대청 앞에서는 정동추가 뒷짐을 진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려원과 운진의 대화가 들렸겠으나, 그는 우리에 갇힌 호랑이처럼 갑갑한 태도로 이쪽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노도가 종횡주를 부착하여 거들고, 사람들이 지나갈 적에는 술법을 부려 이안공자의 모습을 감추는 것이었다오.”

“은신술도 가능하세요?”

“이안공자의 진법을 거들었을 뿐이오.”

모려원과 운진의 대화가 끝날 때쯤이었다.

마당으로 통하는 문으로 진무린이 들어섰다.

“나와 계셨습니까?”

“제자라는 놈이 죽지도 일어나지도 않으니 할 일이 있어야지.”

대청 앞에 있던 정동추가 못마땅한 대꾸를 내놓은 직후에,

“대사형!”

“진 대협.”

모려원과 운진이 대청을 나서 진무린을 맞았다.

“문주께서 이곳에 계셨습니까?”

“이안공자가 이동하는 것을 돕기 위해 따라나섰다오. 대신 종 소협이 귀혼곡의 안위를 위해 그곳에 남았소.”

“이안공자가 이곳에 오셨단 말씀입니까?”

“예, 대사형. 안에 계세요. 문주께서 은신술로 모습을 감춰주셨답니다.”

운진을 향해 감사의 눈인사를 건넨 진무린은 시선을 방으로 돌렸다.

“환자는 어떠냐?”

모려원이 답을 내놓기도 전에 정동추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잖냐. 공연히 대라구환단만 버린 게 아닌가 아까워하던 참이다.”

섬도곤의 부상이 워낙 심했고, 동굴에서 버티며 피를 흘린 것을 감안하면 살아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련만, 정동추는 과연 마교의 교주라 할 만했다.

“두이산의 뒷일은?”

“맹주께서 무림공적을 생포하여 맹으로 가신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흥. 실속은 곰 같이 생긴 맹주만 차린 꼴이군.”

뾰족한 답을 내놓은 정동추가 왼편의 방을 돌아보았다.

“어젯밤이 고비라던데 아직 숨은 붙어 있다. 치료법이 독특하던데 알고 있었나?”

“전에 경험한 바 있습니다.”

너는 참 별걸 다 해봤구나, 하는 투로 정동추는 입술을 내밀었다.

그런 다음이었다.

“오는 길에 궁도를 만났습니다.”

진무린의 말에 비수를 꺼내 드는 것처럼 정동추의 눈빛이 번득하고 빛났다.

“내내 제 주변을 살피던 눈치였습니다.”

“놈이 뭐라 하더냐?”

“그가 뭐라 하기 전에 제가 먼저 다음에 보면 반드시 목을 자를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정동추와 모려원, 운진이 멍한 표정으로 진무린을 보았다.

“속은 후련하다만 어떻게 감당할 셈이냐:”

“방법을 찾은 것 같아 도전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거기에 구주가 어찌 나올지 확인이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정동추가 눈가를 좁혔다.

“계획은 세우고 떠드는 게지?”

“그렇습니다.”

“너의 계획에 나도 포함되어 있냐?”

“마천강기를 제외할 정도로 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진무린의 답을 들은 직후였다.

“흠흐흐흐. 이제야 기다린 보람이 드는구나.”

마치 수십 년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정동추가 만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이안공자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진무린은 섬도곤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한 가지 확실한 점을 깨달았다.

이전에는 무언가를 얻을 때마다 주변인들이 “뭔가 달라졌다.” 라든가, “깨달은 것이 있느냐?” 따위의 말을 했었는데 정동추는 진무린의 발전을 알아채지 못하는 눈치였다.

비유는 좀 그렇지만, 하수가 월등한 고수의 수준을 짐작하지 못하는 경우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진 대협.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로 오신 것을 알았으나 다른 이의 눈이 의심스러워 나서지 못했소.”

“먼 길을 달려와 주셨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안공자와 인사를 나눈 진무린은 침상에 누운 섬도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무릎 근처를 자른 짧은 바지로 주요 부위만 가린 모습이었다.

“방 안이 추운데 환자에게 무리가 없습니까?”

“일부러 화로를 두지 않았소. 교주께서 대라구환단을 먹인 탓에 생기를 유지했으니 남은 것은 상처가 아무는 일이오. 심려하지 않으셔도 될게요.”

이안공자의 의술을 익히 아는 진무린은 그의 대답에서 섬도곤이 살아나리란 확신을 얻었다.

그러면서 문득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섬도곤이 다음 대 교주가 된다면 마교의 교주를 동생으로 두게 된다.

바꾸어 보면 마교 교주의 형님이 되지 않는가.

생각만으로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몇 가지 질문과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진무린의 요청에 이안공자는 먼저 섬도곤을 살폈다.

“조금 전에 약을 먹인 참이라 한 시진은 지켜봐야 하오. 그 뒤에 해도 되겠소?”

“그럼 한 시진 뒤에 대청에서 뵙겠습니다.”

이안공자와 약속을 정한 진무린은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방을 나섰다.

 

**

 

대청으로 나선 진무린은 그제야 차를 놓고 정동추, 모려원, 운진과 마주 앉았다.

진무린은 먼저 혈교를 응징하겠다는 생각을 꺼내놓았다.

“마침 문주께서 와 계시니 혈교의 근거지를 확인하고, 정리할 생각입니다.”

“대사형. 소매도 꼭 함께하게 해주세요.”

운진은 말할 것 없고, 모려원 역시 당한 것이 떠올랐는지 눈빛을 반짝였다.

“그 또한 벽계를 염두에 둔 계획이냐?”

“혈교가 개입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돌이켜 보면 풍령관이 그랬고, 점창과 공동 또한 그랬습니다. 당한 것을 갚으며 그 점을 짚어볼 생각입니다.”

“그것참. 참으로 꼼꼼한 대응이구나.”

느낀 바를 내놓은 정동추가 기회를 잡았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네가 동굴에서 사매와 애정행각을 벌이는 동안 의논한 것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정도맹주와 화산의 장문인이 이리 올 게다.”

애정행각이라는 표현에 운진이 놀라 눈을 껌벅였고,

“대사형이 공력을 나눠주신 것을 저리 말씀하세요.”

모려원의 설명에 표정을 풀었다.

“내가 유가장의 천서유기를 내놓을 테니 나머지 두 개를 정도맹이 가져오라고 제안했지. 구관이 있다면 본교에서는 저 녀석이 하나를 차지하게 해달라는 조건이었다.”

“맹주가 그 조건을 받겠습니까?”

“어차피 보물에 대한 갈망은 터져 나왔다. 게다가 하나가 내 통제하에 있다면 정도맹이 막아서기도 어렵지 않으냐? 분명 그렇게 하자고 나설 게다.”

“남은 두 가지를 얻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직접 구해올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면 곤란하지.”

정동추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진무린을 바라보았다.

 

**

 

원예는 엎드린 설란의 보고를 받고 잠시 말이 없었다.

“마교의 교주가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진 공자가 늦으셨다면 이틀에 한 번은 곤욕을 치렀을 테지.”

“교주는 진 공자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제자 탓에 움직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뿐인 자식의 생사조차 모르지. 그런 상태에서 반란이 일어났던 교를 비워둘 정도로 제자가 대단할까?”

“후계자로 지정할 인물이 대제자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설란의 의견을 들은 원예가 참 오랜만에 옅은 웃음을 입 끝에 달았다.

“살아있는 대제자를 두고 상등을 떠났는데 돌아왔을 때 죽어있다면 그 책임이 우리 몫이 돼. 그만큼 우리가 각별하게 돌봐야 하니까 교주는 당장 떠나는 것에 문제가 없지.”

“루주의 말씀 덕분에 크게 배웠습니다.”

설란이 고개를 조아린 다음이었다.

“이곳 상등에서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지 몰라. 허튼 정보라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더 세밀하게 관리해.”

“예, 루주.”

설란이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원예는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처럼 커다란 의자에 앉아 움직임이 없었다.

향 반 개쯤 탈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루주. 진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방 밖에서 총관 백섭광의 음성이 들렸다.

원예의 눈가에 반가움이 어린 것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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