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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44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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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44화

은천검제

제144화

 

반 시진쯤 경공을 펼친 진무린은 이소향이란 작은 마을에서 걸음을 멈췄다.

일반인의 걸음으로 계산하면 두이산에서 하루 거리였다.

분명 삼보의 이야기와 혈투에 관한 소문이 돌았으리라 짐작한 진무린은 먼저 찢어진 장포를 벗어 검을 감쌌다.

혹시 하고 아래를 내려다본 진무린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추운 겨울에 마괘자만 걸친 모양도 우스웠지만, 그 역시 소매가 찢겨 나간 데다, 안쪽에 드러난 상처에는 피가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영락없이 호되게 당하고 도주한 무인의 꼴이었다.

그렇게 진무린은 이소향에 들어섰고, 곧장 상점이 몰려있는 장소로 걸었다.

작은 마을이었다.

상점이라야 서너 개가 전부였고, 반점과 다점 두어 개가 중심의 전부여서 당장 진무린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규모였다.

힐끔대는 이들과 삼삼오오 고개를 모으고 혀를 차는 사람들 틈에서 진무린은 마괘자와 장포를 새로 사 입었고, 깨끗한 천을 두 개 골라 하나는 검을, 나머지 하나는 양소소가 만들어준 옷을 담았다.

이제는 주린 배를 채울 차례였다.

반점을 향하는 동안 몇몇 무인들과 마주쳤는데 힐끔대는 표정과 눈치로 봐서 딱히 신경 쓸 수준은 아니었다.

진무린은 곧장 가까운 반점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진무린은 점소이가 안내하는 안쪽의 자리에 앉았다.

“시장해서 그러니 빨리 되는 요리 세 가지와 밥, 그리고 술 작은 단지를 다오.”

“바로 올리겠습니다.”

열다섯 살쯤 돼 보이는 점소이가 진무린의 주문을 받아 주방으로 움직였다.

늦은 점심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진무린은 검을 오른편에 내려놓고, 창밖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벌어진 일을 되돌릴 길은 없다.

그러니 아무리 쉬쉬해도 은천문과 진무린의 이름은 오늘 이후로 태풍처럼 강호를 휩쓸 게 되어 있다.

이왕 이름이 알려질 거라면 주저할 일이 뭐 있겠나.

게다가 실력도 얻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대놓고 벽계를 상대해 주면 그만이었다.

이것들을 아예 무림공적 수준으로 만들면 어떨까?

보이는 족족 신고할 수 있게.

‘그렇지.’

황종관의 도움을 받으면 궁도를 무림공적에 지정할 수도 있었다.

생각이 달리던 진무린은 내처 고개를 끄덕였다.

은천문을 숨기느라 쉬쉬하는 것보다는 아예 대놓고 나서 벽계와 궁도를 강호의 적으로 지정하는 것이 백 번 현명할 일이었다.

오늘처럼 헛소문에 죽는 사람이 없는 것도 좋을 테고.

진무린이 홀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가지요리입니다.”

점소이가 튀긴 가지에 향신료를 부은 요리와 밥, 그리고 술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진무린은 먼저 단지를 기울여 잔을 채웠다.

“새로운 무림공적을 위해.”

궁도를 떠올린 진무린은 단숨에 잔을 비웠고, 이어 요리와 밥을 입에 넣었다.

정상교를 상대하며 알았다.

오행신위의 다섯 기운에 왜 그렇게 밀렸는지를.

이 감을 제대로 익힌다면 적어도 궁도 수준의 고수 다섯을 상대할 힘은 얻는다.

또 한 가지, 이번 기회에 구주의 능력과 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볼 생각이었다.

궁도가 동료를 데려와 진무린을 노리는 데도 구주가 침묵한다면 그들 또한 뒤에 숨어 기회를 노리는 치졸한 집단이리라.

귀혼곡의 이안공자마저 구주에 관해 답을 주지 못한다면 그들에 대한 기대도 거기까지다.

각오를 세운 진무린은 단지를 다시 기울여 두 번째 잔을 들이켰다.

‘이제부터 확실히 다를 거다.’

확실하게 생각을 정리한 진무린은 다시 젓가락을 움직여 밥과 요리를 먹었다.

밥을 반쯤 먹었을 때였다.

점소이가 채소와 돼지고기를 볶은 요리를 가져다주었다.

왜 그랬을까.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둥글게 말린 채소를 집던 진무린은 느닷없이 임운령이 떠올라 옅은 웃음을 그려냈다.

은천문과 진무린의 이름이 강호에 떠들썩하면 임운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화를 많이 내시겠지?

하루 이틀 욕먹는 사이가 아니니까.

진무린은 새로 나온 요리를 밥에 올려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

 

황종관은 섬서의 정도맹 지부에 들렀다.

기습적인 방문이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이다.

대낮에 어지간한 연회 부럽지 않게 요리를 펼쳐놓고 술판을 벌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두이산에서 연이은 혈투가 벌어지는 마당에.

“맹주!”

들어선 황종관을 보며 섬서 지부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주변 인물들이 줄줄이 몸을 일으켰는데 황종관은 말 한마디 없었다.

탁자 위의 요리와 섬서 지부장, 그리고 함께 한 이들을 둘러본 황종관은 가신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가신이 도를 위로 들었고,

쉐에에에엑!

곧바로 황종관의 손에서 도가 번득였다.

번득이는 도를 피해 지부장이 바닥을 굴렀고 주변 인물들이 급하게 몸을 뺐으나,

콰등! 콰드드등!

황종관의 도는 탁자를 가르고도 멈추지 않은 채 다시 지부장을 노렸다.

쉐엑! 쉐에엑! 쉐엑!

화려한 요리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탁자는 두 조각으로 갈라져 주저앉았으며, 황종관의 도를 피하기 위해 섬서지부장과 간부들은 널브러진 요리 위를 뒹굴었다.

쉐엑! 퍼억!

거세게 날아드는 도를 피해 상체를 뒤로 젖힌 지부장의 가슴을 황종관이 세차게 걷어찼고, 이어 쓰러진 그의 목을 밟았다.

쉑!

그 직후에 도의 끝이 섬서 지부장의 미간 틈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맹주! 오해십니다!”

“뭐가 말이냐?”

“오늘이 부지부장의 생일이어서 축하 연회를 열었는데…….”

“부지부장?”

“예, 맹주.”

구석에 찌그러져 얼굴에 묻은 음식을 닦아내던 부지부장이 황종관의 시선을 받고는 몸을 움찔했다.

“오늘이 생일이라면 네놈 팔을 자를 테고, 아니라면 지부장의 팔을 자른다. 묻겠다. 오늘이 네놈 생일이냐?”

마른침을 꿀꺽 삼킨 부지부장이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금 움찔했다.

황종관의 커다란 눈이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살벌하고 잔인한 미소를 담고 있어서였다.

“생일인지 아닌지를 대답하는데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냐?”

“아닙니다! 오늘은 기필코 제 생일이 아닙니다.”

“그럼 연회는 뭐냐?”

“이건 그저……. 지부장이 관례처럼 여는…….”

부지부장의 답이 떨어진 직후였다.

쉐에에에엑!

황종관의 도가 번득였고, 실제로 목을 밟혀 버둥대던 지부장의 왼팔을 잘랐다. 

“끄윽! 끄아아악!”

곤륜의 속가 제자인 지부장의 팔을 실제로 자를 줄은 몰랐다.

섬서 지부의 모두가 머리칼이 쭈뼛 올라설 정도로 놀란 상태에서 황종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월단의 단주를 보거나 그와 관련한 사항을 아는 사람?”

허튼소리를 지껄이면 팔이 아니라 목이 달아난다.

황종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점창과 공동을 봉문시킬 정도로 강단을 보였다는 말을 들었지만, 곤륜의 속가제자인 지부장의 팔을 자를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다.

게다가 직접 마주한 황종관은 지난 세월을 어떻게 그리 얌전하게 보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눈빛과 기운을 뿜어내는 무인이었다.

“다시 묻는다. 있으면 예, 아니라면 아니오, 분명하게 답해라. 최근 비월단 단주를 보거나 그와 관련된 사항을 아는 사람?”

“없습……. 아니오!”

황종관의 눈이 씰룩하고 움직이자 모두가 한결같은 음성으로 답을 내놓았다.

왼팔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지부장은 기절했는지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는데 황종관은 아직 그의 목을 밟고 있었다.

“두이산에서 혈투가 있었고, 심지어 무림공적마저 출몰했었다. 그런데도 섬서지부가 꼼짝하지 않은 채 연회를 벌인 이유는?”

황종관의 시선이 돌아가자 부지부장은 ‘왜 자꾸 나만 가지고 그래요?’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늘였다.

“부지부장도 팔 두 개가 거추장스러운가 본데 그렇다면 내가 간편하게 만들어주지.”

“지부장이 절대 그쪽으로 가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연회를 베푼 이유?”

“짭짤한 수입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황종관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뒤에 지부장을 밟고 있던 발을 내려놓았다.

“이놈을 묶어. 그리고 부지부장은 나와 함께 맹으로 간다.”

“예? 예! 맹주!”

벼락이 떨어진 듯한 섬서 지부가 황종관의 지시를 이행하느라 분주할 때였다.

황종관의 도를 받은 가신이 의미를 알기 어려운 미소를 그려냈다.

“왜?”

“가주를 다시 뵙는 것 같아 기뻐서 웃었습니다.”

엉뚱한 답변이었다.

“그동안의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엉망이었나? 점창과 공동을 방문할 때 돌아온 줄 알았는데?”

“이전에도 지금도 제게는 한결같은 가주이십니다. 다만.”

“다만?”

“맹주가 되시기 전에 모시던 가주의 모습은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진무린이란 친구가 이리 만든 모양이다.”

나이 든 가신에게 대꾸한 황종관이 의미를 알기 어려운 미소를 그려냈다.

 

**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달리는 것밖에 없다는 투로 달린 모려원과 정동추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질 때 소능산의 오래된 사당 앞에 내려섰다.

이때는 모려원 뿐만 아니라 정동추 역시 낯빛이 좋지 않아서 두 사람 모두 휴식과 운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보세요.”

지친 모려원이 시선을 가리킨 곳을 향해 정동추가 고개를 돌렸다.

길게 펼쳐진 집들 중간에 하얀 천을 기와 위로 올린 민가가 보였다.

“저것이 표시인 모양이지?”

“루주가 저렇게 했을 거예요. 우리가 소능산에 도착할 것을 짐작했겠죠. 굉장히 총명하고 냉정하게 느껴질 만큼 이성적인 여인이거든요.”

지친 기색에서도 정동추는 모려원을 힐끔 돌아보았다.

“진무린이 루주를 좋아하더냐?”

“교주께서는 관심이 대사형의 애정 문제밖에 없으세요?”

“그럴 리가 있냐. 다만, 네가 안쓰러워 그렇지. 남은 이야기는 저곳에 도착해 제자 놈을 살피고 하자.”

중간에 말을 자른 정동추가 홱 몸을 날리자 입을 삐죽인 모려원이 바로 뒤를 따랐다.

정동추와 모려원이 담을 차고 올라 마당에 내려선 다음이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렸던 것처럼 총관 백섭광이 먼저 나섰고, 이어 운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주. 모산의 문주와 홍화루의 총관이에요. 이분이 마교의 교주세요.”

“분명하게 해둘 것이 있다. 앞으로 마교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가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게다.”

“모산의 운진이오.”

“홍화루의 총관 백섭광이 교주를 뵙습니다.”

“반갑네.”

서열에 걸맞은 인사가 오간 뒤였다.

“제자 놈을 눕힐 곳이 필요한데?”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환자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내가 직접 가겠다.”

백섭광의 제안을 거절한 정동추가 안쪽으로 움직였다.

혹시 몰라 모려원이 뒤를 따랐는데 방안에는 침상이 준비되었고, 안쪽에 거대한 갓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이안공자세요?’

모려원이 시선을 돌렸을 때, 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 이분은 모 소저의 요청에 따라 특별히 초빙한 분으로 이안공자라 합니다.”

“귀혼곡의 이안공자란 말인가?”

“이안공자가 교주를 뵙습니다.”

“흠. 이제야 반쯤 마음이 놓이는군.”

백섭광에게서 이안공자를 소개받은 정동추는 침상에 섬도곤을 내려놓았다.

“환자가 중하니 먼저 맥을 살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주게.”

이안공자는 짧은 검을 꺼내 섬도곤의 옷을 찢었고, 침상 옆에 두었던 대야에서 수건을 꺼내 상처 부위를 닦았다.

이어 섬도곤의 목과 팔목을 잡아보았던 이안공자가 정동추를 향해 거대한 갓을 돌렸다.

“혹시 대라구환단을 먹이셨습니까?”

“그러네.”

“오늘 밤이 고비가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니 쉬고 계십시오. 혹 급한 일이 있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정동추가 입을 꾹 다문 뒤에 몸을 돌렸다.

“교주께서 아끼는 제자 분이세요. 말씀은 하지 않았으나 이안공자께 당부하고 싶으셨을 거예요. 부디 최선을 다해주세요.”

“모 소저의 말씀을 명심하겠소.”

당부를 전한 모려원이 방을 나섰을 때 정동추는 뒷짐을 지고 마당을 둘러보고 있었다.

대청의 건너편 방에서는 저녁을 준비하는지 음식 냄새가 하루를 꼬박 굶은 두 사람의 관심을 자꾸만 당겼다.

“내가 이안공자에게 당부할 거라고 여겼냐?”

“아니세요? 그럼 들어가서 아니라고 하지요, 뭐.”

기가 막힌 웃음을 지은 정동추가 모려원을 돌아보았다.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게냐?”

“마교의 교주요.”

“내가 마교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두렵다는 생각은 안 하냐?”

“교주의 눈과 이마에 쓰여 있습니다. 소녀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고요.”

모려원의 당찬 대꾸였다.

정동추는 나직하고 긴 웃음을 토해냈고, 그 뒤에 있던 운진과 백섭광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눈으로 분위기를 살피느라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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