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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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43화
은천검제
제143화
모려원은 행여나 마교 교주인 정동추에게 얕보일세라 있는 힘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
가뜩이나 진무린이 공력을 나눠준 뒤였다.
어설피 굴었다가 은천문도 별것 없네, 소리를 들으면 변명의 여지도 없는 터라 모려원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했다.
놀라운 것은 섬도곤을 등에 업은 정동추였다.
모려원이 그토록 기를 쓰고 달리는 데도 바로 옆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잘하는 것과 능숙한 것은 분명히 다른 느낌인데, 정동추의 경공에는 연륜을 바탕으로 한 풍부한 경험이 녹아 있었다.
배우는 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뒤처지지 않는 것이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 시진을 쉬지 않고 달린 모려원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가쁜 숨이 올라왔을 때,
“잠시 쉬었다 가자.”
정동추가 세상 반가운 제안을 내놓았다.
다른 이의 눈을 피해 산을 타고 달리는 길이었다.
쉴 곳이 한정된 탓에 두 사람 모두 같은 곳을 보았다.
바위를 뛰어넘은 모려원과 정동추는 곧장 눈에 담아둔 오목한 공터에 내려섰다.
정동추는 등에 업었던 섬도곤을 먼저 바닥에 눕히고, 이마와 가슴 부위에 손을 얻어 공력을 나눠주었고, 그 사이 모려원은 혹시 몰라 주변을 살폈다.
“은천문이 대단하구나.”
섬도곤을 살피고 몸을 일으킨 정동추의 첫 마디였다.
“그렇다고 무리할 필요는 없다. 경공에 온 힘을 다 쏟는다면 급하게 적을 만났을 때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지.”
모려원의 속을 빤히 들여다본 듯한 그의 조언도 있었다.
입을 삐죽인 모려원을 정동추는 재미있다는 눈으로 보았다.
“운기를 해. 그래야 다시 달릴 힘을 만들지.”
“말씀은 감사해요. 그러나 경공을 펼치는 데는 아직 충분합니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거절하는 모려원에게 정동추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뒷짐을 진 채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뒷모습에 제법 위엄이 담겨 있었다.
모려원이 무심결에 정동추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였다.
그가 불쑥 고개를 뒤로 돌렸다.
“너, 대사형을 좋아하는 게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 적혀 있다. 네 이마와 눈에. 방년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나이는 아닌 듯싶은데?”
대꾸할 말이 없어 모려원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내가 좀 도와주랴?”
정동추의 은근한 질문이 건너왔다.
“그 녀석이 그러더구나.”
그리고 이어진 말에 모려원은 끝내 관심이 올라온 눈으로 정동추를 보고 말았다.
“흥! 관심이 없는 척하더니 결국은 마음이 있었던 게지.”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냥 질문을 하시기에 봤을 뿐이에요.”
“그럼 관둬라. 나는 그저 그 녀석이 한 말이 떠올라 그랬을 뿐이니까.”
“뭐라 했는데요?”
“좋아하지 않는다면 상관없는 말이다.”
전에 없이 장난스러운 정동추를 향해 모려원은 화제를 바꾸었다.
“제자 분은 괜찮은가요?”
“본교의 귀한 약을 먹여놔서 앞으로 이틀은 이 상태가 유지될 게다. 말을 돌릴 줄도 알고 기특하다?”
“걱정돼서 물어본 거예요.”
“오냐.”
새침한 딸을 대하는 근엄한 아버지처럼 정동추는 심지어 자상한 미소마저 담고 있었다.
“진무린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궁금해하는 모려원을 향해 뜸을 들인 정동추가 입을 열었다.
“내게 잘해라.”
“뭐예요, 그게?”
“충분히 쉰 것 같으니까 이제 출발하자.”
새침한 모려원의 시선 앞에서 정동추는 섬도곤의 상체를 잡아 일으켰다.
**
무림공적을 잡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먼저 진무린이 도주하려는 자들의 앞을 검기로 막았고, 멀찍이 물러난 오십여 명은 혹여 불통이라도 튈까 하는 눈으로 다가오지 않은 덕분이었다.
그 외에 고수들도 있었는데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볼 뿐 개입하지는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연히 나와서 그냥 돌아가는 것보다는 무림공적을 잡아가는 성과를 거둔 것이 낫지.”
“본파 역시 제자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으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실제로 홀가분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이제 자네는 어디로 갈 셈인가?”
“대강 정리되었으니 마지막 남은 한 곳을 정리하려 합니다.”
“마지막 남은 한 곳이라니? 그런 곳이 남았던가?”
“흑사련부터 풍령관의 일에 모두 개입했고, 사매를 납치해 모략을 꾸몄던 혈교가 남았습니다.”
“아.”
황종관은 잊고 있었다는 투로 가벼운 탄성을 터트렸다.
“마침 모산의 문주께서 직접 내려와 계시니 함께 움직일까 합니다.”
“자네가 나선다면 어려운 일이야 없겠지. 그렇더라도 맹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고 말하게.”
“진 대협. 본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화산의 힘이 쓰일 곳이 있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연락을 주십시오.”
“두 분 모두 감사합니다. 이리 든든한 배경을 얻었으니 다음에는 통쾌한 응징이 있었다는 소식을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무린이 단단하게 답을 낸 다음이었다.
“자! 그럼 사람들이 더 몰리기 전에 이곳을 나서기로 하지. 장문인께서는 저와 함께 가시면 어떻겠소?”
“가는 길이 함께인 것을 싫어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종관과 은혼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을 맞춘 뒤에 함께 돌아섰다.
두 사람이 가신과 제자들을 이끌고 돌아가자, 옷에 달라붙은 송진처럼 모여든 이들의 시선이 진무린에게 매달렸다.
설혹 보물을 지녔더라도 빼앗을 실력조차 안 되는 이들이 말이다.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아는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 인생에 더 큰 도움이 되련만, 말한다고 들을 사람들도 아니니 이쪽에서 빨리 떠나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양소소가 만들어준 옷이 군데군데 찢기고 헤져서 더는 입기 어려운 지경이라, 시선을 내린 진무린은 아쉬운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
진무린이 훌쩍 발을 굴러 솟구치자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
반 시진쯤을 걸은 황종관과 은혼은 적당한 곳에 가신들과 제자들을 머물게 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주 앉았다.
“교주의 제안에 대해 의논하고 싶었소.”
“맹주께서 그러시리라 짐작하던 참입니다.”
황종관이 솔직하게 말을 내었고, 은혼이 편안하게 받아주었다.
“교주의 말이 나쁘지 않다고 여기오. 세 가지 보물을 놓고 영웅대회를 열면 진무린이 삼보 중 하나를 지녔다는 의심도 자연 풀리지 않을까 싶은데 생각이 어떠시오?”
“그러려면 마교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정도 문파에서 마교와의 동행에 관해 항의가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홉 개의 관문을 개방한다면 크게 반대하기는 어려울 게요. 화산에서 힘을 실어주시고, 아미가 찬성한다면 남은 문파는 맹의 이름으로 밀어붙여 볼 만하오.”
입술에 힘을 준 채 고민하던 은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는 길에 아미에 들러보겠습니다.”
“그리해주시겠소?”
“진 대협이 구정봉의 시신을 본산에 보내준 일이 있고, 마교 교주가 직접 유감을 표했습니다. 아미도 비슷한 사과를 받는다면 충분히 협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진 대협과 모산의 문주에게 신세를 진 점도 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라 봅니다.”
은혼의 짐작에 황종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 부끄러운 말이 하나 더 있소. 이번 소문을 실제로 퍼트린 사람이 본맹의 비월단 윤고상 단주일지 모르오.”
내내 평온하게 대화하던 은혼이 놀란 얼굴로 상체를 세웠다.
“내가 이곳에 직접 온 이유도 반은 그 일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돌아가는 길에 윤 단주의 행적을 알아볼 참이니 혹여 은밀하게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절대 비밀이 새지 않도록 유념해 주시오.”
“참으로 어려운 시기입니다. 본산에서 일이 있다면 반드시 사람을 보내 맹주께 바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은혼이 황종관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대강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먼 길을 오셨는데 이리 가셔서 서운하오.”
“첫 번째로 진 대협이 삼보를 지니지 않았다는 점을 제 눈으로 확인했으니 무엇보다 다행이고, 엉뚱한 보물에 휘말려 제자들이 다치지 않았으니 그 점에 감사합니다.”
“과연 화산의 품격은 배울 점이 많소.”
대화를 정리한 두 사람은 서로 갈 길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
“나는 윤 단주의 일을 확인하고 맹으로 돌아가 교주에게 연락해 보겠소. 그가 한 가지 보물을 내놓은 약속을 준다면 다시 장문인께 연락드리리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미에 들렀다가 결정 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마저 마친 두 사람은 가신들과 제자들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함께 걸었다.
“마교 교주에게 유감이라는 말을 듣다니. 참으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것이 모두 너무 잘난 사람과 친분이 있는 덕분 아니겠소? 정도맹의 맹주를 맡으며 참 많은 일이 있으리라 각오했지만, 마교 교주와 손을 잡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소.”
강호의 삶이다.
다시 보기로 했으나 그 약속을 실제로 지킬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다.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술 한 잔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얼굴로 각자의 길을 향해 움직였다.
**
두이산을 나선 진무린은 경공을 펼쳐 높다란 산을 하나 넘어선 후에 걸음을 멈췄다.
원래 계획은 옷을 갈아입고 아침부터 거른 속을 달래기 위해 객잔이나 반점에 들른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상과 궁도는 그조차 그냥 두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적당한 곳에 내려선 진무린은 바위에 앉아 궁도를 기다렸다. 그리고 두 번쯤 호흡을 골랐을 때, 실제로 궁도가 진무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나?”
“안 오셨다면 서운할 뻔했습니다.”
“자네는 참 여유롭군.”
주변을 둘러본 궁도는 진무린의 왼편으로 치우친 바위를 택해 그곳에 앉았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얼굴이 보고 싶어서라고 하면 이상한가?”
“제가 기다린 것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궁도가 건넨 농을 무시한 채 진무린은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좋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번에 얼굴을 마주치거나 주변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제 검을 상대하셔야 합니다.”
여유롭던 궁도가 감정이 몹시 상한 사람처럼 눈을 하얗게 치켜세웠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진무린의 질문에 궁도는 순간 답을 하지 못했다.
궁도가 시험 삼아 나서더라도 진무린은 검을 꺼낸다.
그 의지가 지금 진무린의 눈빛과 태도,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또 하나, 객잔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진무린은 알지 못할 기운을 품고 있었다.
궁도마저 께름칙하게 여길 힘이요, 기운이었다.
지금 당장 검을 마주한다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는 계산과 언제 저런 기운을 얻었을까 하는 의문이 궁도의 입을 틀어막는 느낌이었다.
그렇더라도 이대로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은 궁도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꽤 자신 있나 본데 지금 손을 쓰지 않는 이유는?”
“가서 벽계의 인물을 더 데려오라는 뜻입니다.”
기가 막힌 궁도가 숨을 커다랗게 내쉬었다.
“구주가 끝내 나타나지 않으면 자네 혼자 우리 네 명을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궁 대협.”
“말하게.”
“네 명을 데려오면 알게 됩니다.”
진무린의 한 마디에 궁도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벽계가 이렇게 실질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데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며 모습을 감춘 구주 따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 있다면 숫자를 늘려 오십시오.”
말을 마친 진무린이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만 묻지. 왜 이렇게 갑자기 돌변한 건가?”
경공을 발휘하려는 진무린을 궁도의 질문이 붙들었다.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악인이든, 선한 사람이든, 여럿이 죽었습니다. 고작 소문 하나 때문입니다. 궁 대협이 직접 하지는 않았을 테니 누군가 하수인도 있겠지요. 그 사람의 목은 분명 제가 가릅니다.”
고개를 돌린 진무린의 말에 궁도는 설핏 윤고상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느리고 답답해 보이기는 했으나 진무린은 잡는다고 했던 상대를 그대로 둔 적은 없었다.
따귀를 맞은 것처럼 멍한 궁도 앞에서 진무린은 훌쩍 몸을 날렸다.
잠시 뒤였다.
“강호의 무인이 벽계의 일원을 협박하다니, 기가 막히는군.”
탄식처럼 혼잣말을 뱉은 궁도가 몸을 일으켜 진무린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이 이전과 다르게 몹시 강렬하고 독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