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42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42화
은천검제
제142화
사파의 무리를 쫓아냈더니 이제는 근처의 고만고만한 문파들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풍기는 기운이 참으로 보잘것없어서 새롭게 다가오는 무인들을 바라보던 정동추가 같잖다는 웃음을 얼굴에 담았다.
“어쩔 셈이냐?”
“뭘 말입니까?”
“저런 것들도 일일이 상대할 셈이냐고 묻는 거다.”
정동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십 명쯤 되는 인원이 멀찍이 걸음을 멈추었다.
진무린조차 실없는 웃음을 지을 정도로 다가온 이들의 태도는 분명했다.
사파의 무리가 어디론가 달려가자 혹시 하며 산을 올라온 눈치였다. 욕심 나서 오기는 했는데 또 막상 앉아 있는 정동추와 진무린을 보자 함부로 다가서지 못해 쭈뼛대는 모습이었다.
“굳이 신경 쓸 필요 있겠습니까?”
진무린이 대꾸할 때였다.
날이 확연하게 밝아오는 것과 동시에 요란한 옷자락 소리를 울리며 경공을 발휘한 이들이 하나둘 내려섰다.
“이거야 원. 평소에는 찾기도 어려운 공적들이 알아서 등장하다니. 정도맹에서 보면 반가워 미칠 일이구나.”
세상사 참 공교롭다.
정동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십여 명이 좌우로 갈라지며 실제로 황종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잘것없은 실력의 오십여 명과 여러 가지 죄명으로 무림공적에 지정된 인물들을 뚫고 황종관은 곧장 진무린에게 다가왔다.
그 짧은 사이에도 일행의 앞으로 고수들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그 숫자가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다친 곳은 없나?”
“보시다시피 무탈합니다.”
진무린은 이 강호에서 가장 양편에 선 두 사람, 황종관과 정동추를 각각 소개했다.
“반갑소. 정도맹의 맹주 황종관이오.”
“실권을 잃은 분이라 들었더니 본교에 밀려났던 이 몸보다는 보기에 좋소.”
뻑뻑한 인사가 오간 다음이었다.
“인사를 마친 직후에 할 말은 아니나 내 제자가 위중하여 이만 길을 나설까 하오. 그 점을 양해해주시면 싶소.”
“원하시는 대로 하시오.”
정동추가 점잖게 양해를 구했고, 황종관이 요청을 받았다.
새로운 고수들이 속속 등장하는 앞을 황가의 가신들이 넓게 서서 막은 참이었다.
무림공적이 맹주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 것을 보며 진무린은 삼보의 보물이 주는 유혹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새삼 느꼈다.
“섬서에 있는 문파들이 모두 출발했네. 아마 가까운 순서대로 도착하겠지. 그런데 삼보 중 하나를 지녔다는 말은 뭔가?”
“궁도의 기운을 어설프게 느낀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가 지어낸 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무린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답할 때 또다시 인파가 갈라지며 삼십여 명의 인원이 새롭게 등장했다.
아무리 근처라고 하나 화산이 이토록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다.
“일이 점점 커지는군.”
정동추의 평가가 끝난 직후에 은혼 일행이 진무린 앞으로 바로 다가왔다.
“진 대협!”
“장문인께서 직접 나서셨습니까?”
진무린의 무탈함을 살핀 은혼은 먼저 황종관과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늘인 정동추의 차례였다.
“장문인. 마교의 정동추 교주입니다.”
마교라는 말에 눈알을 부라리긴 했으나 정동추는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인사가 오가지 않았다.
은혼은 청강을 잃었고, 구정봉이 화산을 급습한 일을 떠올린 눈치였고, 정동추는 또 그만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냐는 투였다.
“교주.”
진무린은 나직하게 정동추를 불렀다.
“한 달 뒤의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으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흐음.”
볼을 씰룩이던 정동추가 크게 한숨을 내쉰 뒤에 입을 열었다.
“본교와 화산에 불편한 일이 많았소. 그 점에 유감을 표하는 바이오. 본교 역시 그 일로 많은 숫자의 원로와 내 제자 놈을 잃었으니 이쯤에서 앞선 원을 묻어두었으면 하오.”
씹듯이 건넨 정동추의 유감 표명이었다.
은혼은 먼저 진무린을 보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교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과거의 일을 검에 새겨둘 뿐 꺼내지 않겠소.”
뭐라 해도 정동추는 정도맹의 맹주 황종관과 격이 같았으니 같은 유감을 표하더라도 은혼이 좀 더 득을 본 자리였다.
구정봉의 시신을 받았고, 정도맹주가 지켜보는 앞에서 정동추를 직접 상대한 은혼은 아쉽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한,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제 그만 출발하세.”
정동추가 시간을 재촉할 때였다.
앞에 몰려선 무인들 위로 누군가 길게 떠오른 뒤에 진무린과 정동추의 앞에 내려섰다.
“대사형!”
얼마나 힘겹게 달렸는지 내려선 모려원의 낯빛은 핼쑥했다.
“괜찮으세요?”
“이토록 빠르게 도착하다니. 고맙다.”
진무린은 먼저 모려원을 다독였고, 은혼에게 소개했다.
인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대사형. 혹시 이곳에서 버틴 이유가 교주의 제자 때문인가요?”
“어떻게 알았나?”
모려원이 바로 궁금한 점을 꺼냈고 정동추가 반문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사형이 이곳에서 버틸 이유가 없거든요. 누군가 문제가 있다면 세 분 중 제자 분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렇군.”
“대사형. 루주에게 방법을 고민해달라고 했으니 우선 홍화루로 가세요.”
모려원은 생각한 바를 꺼내면서 방향은 결정되었다.
문제는 주변을 둘러싼 무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였다.
자칫하면 이 무리들이 모두 홍화루로 따라오는 불편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대사형. 소매가 교주와 먼저 홍화루로 갈 테니 이곳을 정리하고 출발하세요.”
섬도곤의 상태가 위중해서 현재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모려원의 상태였다.
이대로 바로 달려가면 속도가 나지 않을 수 있고, 그 탓에 이곳의 누군가 따라갔을 때 위험에 빠지기 쉬웠다.
진무린은 둘러선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상태면 사매는 제힘을 내기 어렵습니다. 공력을 잠시 전해줄까 하는데 자칫 삼보의 무공을 전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해서 섬도곤을 살피는 것으로 할까 합니다.”
“우리가 다 같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진무린의 요청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은 정동추였다.
“내 제자놈이 몹시 위급하오. 맹주와 장문인이 살펴보고 지닌 환약이 있다면 도움을 주시오.”
정동추가 짐짓 엉뚱한 요청을 내고는 손으로 가리키자 일행 모두가 동굴을 향해 움직였다.
섬도곤은 아예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황종관과 은혼이 눈가를 찌푸리며 섬도곤을 바라보는 동안, 진무린은 먼저 모려원을 동굴 안쪽에 앉게 했고, 이어 그녀의 뒤에 앉아 손을 붙였다.
“일각쯤 걸릴 것입니다.”
“편하게 하게.”
황종관의 답을 들은 진무린이 운기에 들었다.
우우우웅.
공력을 전달하는 일로 검이 운다고?
황종관, 은혼이 놀란 눈으로 진무린을 바라볼 때였다.
“강호의 최고수란 놈이 매번 뒤치다꺼리만 하고 다니니 참 한심하다.”
정동추의 나직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비난이 아니라 의도가 분명한 말이었다.
“흑사련을 시작으로 풍령관을 무너트렸고, 본교의 원로들 줄줄이 쓰러트린 것은 물론이요, 구정봉의 목까지 잘랐소. 그뿐이오? 정도맹의 부맹주와 장로를 뇌옥에 가뒀고, 점창과 공동을 봉문시켰지.”
황종관과 은혼의 시선을 확인한 정동추가 말을 계속 이었다.
“본교의 교주인 나도 한편으로 만들었는데 정도맹과 정도 무림은 언제까지 저 아이의 등에 매달려 고생을 강요할 참이오?”
“무슨 의미입니까?”
내내 듣고 있던 황종관이 묵직하게 질문을 내놓았다.
“벽계를 상대로 강호를 지킨답시고 저러고 있소. 혼자 힘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돌아온 것은 삼보의 무공을 차지했다는 오명이지.”
할 말이 없는 황종관이 대꾸처럼 숨을 내쉰 다음이었다.
“삼보 중 하나인 천서유기는 내 손안에 있는 것과 같소. 내가 내놓지. 정도맹도 나머지 두 개를 여시오.”
황종관의 눈이 꿈틀했고, 은혼이 고개를 기울일 정도로 놀랄 만한 제안을 정동추가 던졌다.
“듣기로 그 안에 아홉 가지 관문이 있어서 하나만 통과해도 절세의 무공을 얻는다고 하던데. 정도맹에서 여덟, 본인이 한 명, 그렇게 아홉을 선정해 관문에 들여보내면 되지 않소?”
“그렇게 해서 교주가 얻는 게 뭐요?”
“저 아이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게요. 본교에서는 살아난다면 저 제자 놈을 넣겠소. 정도맹도 마찬가지로 나서시오.”
“후-. 교주야 어떨지 몰라도 우리는 봉문한 두 개 문파를 제외하고 모두 욕심에 차서 날뛸게요. 게다가 나머지 두 가지의 보물이 우리 손에 있는 것도 아니고.”
“흠흐흐.”
정동추의 나직한 웃음이 동굴을 가득 메웠다.
“바깥을 보시오. 저들은 이미 하나가 없어졌다고 여기고 나머지 두 개를 얻으려 공공연하게 죽고 죽일 게요. 그걸 막아서면 묻겠지. 진무린의 일을 먼저 밝히라고.”
말문이 막힌 황종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두면 삼보의 보물을 차지하겠답시고 강호는 어차피 피바다가 될게요. 그럴 바엔 정도맹이 나서라는 게요. 셋 모두 건재하다. 그러니 정도맹이 제시하는 범주 안에서 능력껏 나서라.”
“강호영웅대회를 열어라, 그 말씀이오?”
“그것도 좋겠지. 듣고 보니 참으로 좋은 생각이오.”
“다시 말하지만, 정도 무림은 내 말이 그리 크게 통하지 않소. 끝까지 반대하는 이들이 나올게요.”
황종관의 질문에 대한 정동추의 답은 고갯짓이었다.
그가 턱으로 가리키자 황종관과 은혼이 안쪽으로 시선을 돌려 진무린을 보았다.
“바른길을 택하는 것 좋지. 신의를 바탕으로 공명정대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나무랄 일 아니오. 그러나 눈에 드러난 것까지 부인하는 이들에게는 검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 될게요.”
소강명과 약연의 경우를 말하는 것처럼 정동추가 말을 이었다.
“궁도란 놈의 술수요. 그 혼란조차 저 아이가 해결해야 하지. 궁도란 놈 하나 제대로 상대할 자가 없는 이 강호를 지키겠답시고.”
정동추의 말이 끝났을 때 진무린이 몸을 일으켰다.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알아챈 진무린이 세 사람을 살필 때 모려원도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낯빛이 밝았고, 무엇보다 은은한 홍조가 볼에 가득해서 지켜보던 정동추가 픽 웃었다.
“공력이 아니라 애정을 받은 것이 아닌가.”
“교주께서는 소녀의 검을 확인하고 싶으세요?”
“농 한 마디에 목숨을 걸 수야 있나. 게다가 나는 제자 놈까지 두 몫이니 그렇게 하면 손해가 크지.”
정동추가 인간적인 면을 보였다.
어쩐지 고작 두 번 만에 정동추는 모려원에게 정이 가는 눈치였다.
“출발해도 되겠나?”
“소매가 앞장설게요.”
“부탁하지.”
그렇게 서두른 일행은 동굴 밖으로 나섰다.
물론 정동추가 섬도곤을 업었다.
“대사형. 먼저 출발할게요. 맹주, 장문인,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중에 보세.”
모려원과 섬도곤을 등에 업은 정동추가 훌쩍 몸을 날린 뒤였다.
진무린이 거침없이 검을 뽑아 그 앞을 향해 세차게 내리쳤다.
쉐에에에엑!
바닥을 가르며 기다란 선이 파였고, 작은 돌과 흙 조각들이 튀어 올랐다가 먼지를 피우며 흩어졌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진무린의 나직한 경고에 모려원과 정동추를 뒤따르려 했던 몇몇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때 황종관과 은혼 역시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순간 못 보았다.
그런데도 진무린은 정동추의 말대로 또 저만치 앞서 있어서 가히 강호최고수라 할 만한 실력을 보였다.
“본맹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무림공적들이 줄줄이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있나. 장문인께서는 도움을 주시겠소?”
“그리하겠습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이만한 기회가 또 있을까.
은혼이 황종관의 요청을 바로 받아들였다.
“저도 돕겠습니다.”
“지켜보고 있다가 위험한 곳에 손을 보태주게. 그것이 나와 화산의 장문인이 진정 바라는 도움일세.”
진지한 얼굴로 하는 당부여서 진무린은 “예, 맹주.”하고 자리를 지키고 섰다.
쉐에에에엑!
그러나 검을 가장 먼저 휘두른 것은 진무린이었다.
이번에는 도주하기 위해 몸을 빼내던 무림공적 둘이 움찔해서 돌아섰다.
“저들을 잡아라.”
황가의 가신들과 화산의 제자들이 무림공적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 앞을 메웠던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우르르 뒤로 밀려났다.
하얗게 피었던 서리가 햇살에 녹아내린 두이산에서 황가의 가신들은 도를 매섭게 휘둘렀고, 화산의 제자들은 날카롭게 검을 뿌렸다.
그 뒤편에서 진무린은 묵묵하게 서서 대결을 지켜보았다.
쉐에에에엑!
그리고 이따금 도주하려는 자의 앞을 검기로 막았다.
아침 햇살을 받은 채 검을 늘어트린 진무린의 검이 정한 반경 밖으로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음행, 살인, 방화, 악행이란 악행은 모두 저지르고 여태 잡히지 않았던 악랄한 자들이 감히 달려들지도 못하고 황가의 가신들과 화산의 제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때 물러선 오십여 명은 살벌한 대결이 아니라 진무린을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림맹주가 의지하고, 화산의 장문인이 공손하게 대하며 앞에 나서는 무인, 그들이 그토록 꿈꿔오던 절대자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