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36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36화
은천검제
제136화
진무린이 아무리 등룡창천을 깨달아 검에 위력을 담았고,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내공을 얻었다 할지라도, 두 사람을 안고 달리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실제로 죽은 것처럼 늘어진 섬도곤을 위해 절벽을 뛰어내릴 때마다 진무린은 몸을 팽이처럼 돌리곤 했다.
섬도곤은 위급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그의 몸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이 그 증명과도 같았다.
이따금 험악한 절벽을 뛰어내릴 때면 정동추는 홀로 달리곤 했는데 부상으로 인해 속도가 떨어져 진무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저 앞의 동굴에 들러 잠시 살피고 가세!”
“그리하겠습니다.”
진무린은 먼저 정동추를 말한 장소로 던졌다.
뭐라 해도 마교 교주 아니던가.
그는 단박에 진무린의 의도를 알아채고 허공에서 몸을 굴러 산의 중간에 내려섰다.
진무린의 차례였다.
급하게 내려섰다가 혹여 섬도곤에게 충격이 갈 것을 우려한 진무린은 그를 꽉 붙든 상태에서 두 번이나 솟구친 후에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섰다.
나지막한 산의 중턱이었다.
얼어붙은 흙과 작은 바위와 돌, 앙상한 나무들이 즐비한 그곳에 천만다행으로 동굴이 있었다.
“이쪽에 놓게.”
진무린은 정동추의 말에 따라 동굴 안쪽 바닥에 섬도곤을 눕혔다.
피를 뒤집어써서 그야말로 혈인이라 할 텐데 낯빛은 창백한 터라 당장 보기에는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몸을 기울인 정동추는 소매에서 기름종이를 꺼냈다. 그리고는 섬도곤의 입에 환약을 물린 다음, 그의 턱에 오른손을 붙였다.
정동추가 기운을 풀어내 섬도곤의 입안에 물린 환약을 녹이는 동안, 진무린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돌이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섬도곤의 상태가 위중하기는 하나 그래도 마교 교주가 지닌 환약이라면 그 효능이 대단하리란 기대에서였다.
향 반 개가 탈 시간이 흐른 뒤에 정동추가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어깨에 제법 큰 상처가 있었는데 혈도를 눌렀는지 더는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섬도곤은 어떻습니까?”
“본교에 세 개밖에 없는 대라구환단 중 하나를 먹였으니 미안해서라도 숨이야 붙어있겠지. 그렇더라도 사흘을 넘기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서둘러 의원을 찾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 중상을 돌이킬 의원을 찾아가면 정도문파까지 상대해야 하지.”
진무린의 의견에 정동추는 고개를 저었다.
“교주. 기대해 볼 만한 곳이 있습니다. 사흘이면 대강 도착하리라 봅니다.”
“나까지 함께 가면 반드시 저놈들에게 붙들려. 그러니 이놈을 데리고 먼저 가게.”
진무린의 제안을 정동추가 거부했다.
동굴 입구를 통해 들어온 햇살이 비켜선 정동추의 오른편을 밝혔는데 대신 빛을 받지 못한 그의 왼쪽은 어둠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혈사를 막겠다며 나선 그의 모습이 햇살을 받은 오른쪽일 테고, 그래도 마교의 교주라는 신분이 어둠에 싸인 왼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극명한 대비였다.
“이럴 시간이 없어. 그러니 자네가 어서 제자 놈과 움직여.”
“교주께서는 어쩌실 참입니까?”
“저깟 놈들. 달려오는 족족 모두 죽이고 자네가 오기를 기다림세.”
어깨를 검에 베였고, 깊은 속을 아들에게 물린 늙은 호랑이 정동추가 진무린의 시선 앞에서 자신 있다는 투로 웃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셋이 함께 달릴 수야 있겠다.
그러나 만약 동굴을 발견하지 못해 사방이 뚫린 장소에서 멈추게 된다면 섬도곤을 지키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섬도곤만 데리고 달린다면 정동추는 이곳에서 최후를 맞을 확률이 높았다.
진무린이 무거운 얼굴로 섬도곤을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이어 정상교와 일호살, 이호살, 삼호살, 칠호살, 그리고 수라항천대와 흑룡대의 대원들이 줄줄이 동굴 앞에 내려섰다.
“나가보겠습니다.”
“이놈을 한 번 살피고 따라 나가지.”
짧은 대화를 마친 진무린은 동굴 앞으로 움직였다.
“기껏 도주한 곳이 이곳이냐!”
뭘 믿고 저러는지는 몰라도 기고만장한 정상교가 진무린을 향해 손가락마저 내밀며 목청을 높였다.
호랑이가 개를 낳은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정동추의 아들이 저토록 경망스럽고 가벼우며, 얄팍한지 그 점이 궁금할 정도였다.
진무린의 침묵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본교의 눈을 피할 자는 이 강호에 없다!”
정상교가 재차 득의양양하게 외쳤고,
“섬도곤을 치료할 장소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제부터 피하는 일 없이 제대로 상대해 주마.”
진무린이 다부지게 대꾸했다.
정상교가 누구든 나서라는 투로 좌우를 둘러보았으나 선뜻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정동추가 동굴에서 나와 진무린의 앞에 섰다.
“본교의 핵심 세력이라는 것들이 한 사람을 상대로 주저하는 꼴을 보다니. 그런 수준으로 강호일통을 입에 담았단 말이냐.”
음성이 나직한 탓에 정동추가 뱉어낸 말은 탄식처럼 들렸다.
“교주 자리를 내놓으시오!”
“그래. 가져라.”
정상교와 일호살의 눈이 번득하고 빛났다.
“이제 가서 교주 노릇을 하면 되겠다.”
“목을 주어야 교주가 될 게 아니오?”
일호살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쉐에에에에엑!
진무린이 검을 커다랗게 휘둘렀고, 그가 펄쩍, 뒤로 몸을 빼냈다.
놀라운 일이었다.
진무린이 검을 휘두른 방향으로 길게 한 줄기 선이 파였는데 만약 일호살이 피하지 못했다면 단박에 몸뚱이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진무린의 경고에 일호살은 대꾸를 내지 못했다.
저들은 진무린이 무서워 달려들지 못한다.
반대로 정상교나 일호살을 죽이겠다고 진무린이 달려 나갔다가 아차 하는 순간이면 섬도곤은 말할 것 없고 정동추가 위태로울 수 있어서 섣불리 달려들기도 곤란했다.
양쪽 모두 곤란한 지경이라 침묵 속에서 대치가 길어졌는데 동굴에 선 호랑이가 둘러선 이리 떼를 노려보는 형국이 꼭 지금의 모습이었다.
‘어서 가라. 너는 상관없잖아.’
정상교의 눈에 담긴 소망을 읽은 진무린이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였다.
일호살에게 뭔가를 속삭인 정상교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물러나겠다.”
그런 뒤에 기가 막히게도 정상교 무리는 진무린의 검을 피한 것처럼 이십 보 이상을 떨어져 둥그렇게 늘어섰다.
“시간을 끌려는 모양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빤히 보이는 수작에 대항할 방법이 없으니 참으로 갑갑할 노릇이었다.
그러면서 진무린은 한편으로 궁금한 것도 있었다.
불과 며칠 되지 않았으나 평소의 정동추라면 이리저리 돌파구를 찾기보다는 제자 따위 버려둔 채 달려들자고 나설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섬도곤을 위해 홀로 남겠다고 했고, 마교를 통틀어 세 개밖에 없다는 대라구환단마저 먹였다.
혹시 다음 대 교주를 그로 내정하고 있었던가?
아들조차 미끼로 던지고?
진무린이 물끄러미 앞을 보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흑룡대 수하 둘이 움직여 술과 음식을 정상교, 일호살 앞에 놓아주었다.
음식을 먹을 때 춘설난무를 발휘하면?
모두 죽일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두 번이라도 하겠다.
그러나 단숨에 기를 꺾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모두 죽이지는 못한다.
공연히 힘을 소진할 이유가 있을까?
진무린이 다시금 정상교를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바람결에 스치는 술 향기처럼 독특한 기운이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궁도?’
진무린이 고개를 드는 순간, 기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뭔가?”
“궁도의 기운을 느낀 것 같은데 바로 사라졌습니다.”
“그놈도 참 바쁘게 사는군.”
비록 속 편한 대화를 주고받지만, 진무린과 정동추 모두 이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
궁도는 새처럼 경공을 발휘해 산 두 개를 바로 넘었다.
“어떻습니까?”
“진무린과 정동추, 교주의 대제자라는 섬도곤이 동굴에서 버티고, 그 앞을 교주의 아들이 막고 있는 중이오.”
궁도를 맞이한 인물은 뜻밖에도 비월단 단주 윤고상이었다.
“소문을 내주시오. 마교 교주와 진무린이 삼보 중 하나를 지니고 있어서 그의 아들이 나서 회수하려 한다, 이렇게 말이오.”
궁도의 말에 윤고상의 고개가 쑥 올라왔다.
“누구든 보물을 사흘만 지니면 절세의 무공을 얻어 강호 최고수가 되는 터라, 시간이 촉박하다. 이 정도면 더 바랄 것 없을 정도요. 가능하시오?”
“가능이야 하지만, 그 뒤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이러십니까? 강호에 피바람이 세차게 불 일입니다.”
“싫다면 다른 곳에 맡기겠소.”
궁도는 단호했다.
“어쨌든 단주는 맹주에게 찍힌 몸 아니오? 구대문파도 우습게 보는 맹주가 속가 출신인 단주를 어떻게 처리할 것 같소?”
“흐음.”
“소문만 제대로 내주고 단주는 예전처럼 뒤로 물러나시오. 나머지는 모두 내가 알아서 하겠소.”
말을 마친 궁도의 시선에 윤고상은 천천히, 그리고 점점 확신을 담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십시오.”
마음을 굳힌 모양으로 윤고상의 눈빛이 독하게 빛났다.
**
반 시진이 채 안 돼서 마교의 장로 넷이 수하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날은 저물고, 적들은 숫자를 불리고 있으니 비 오는 날 진창길을 걷는 것처럼 점점 더 수렁에 빠지는 꼴이었다.
정동추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자네가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숫자가 얼마나 되나?”
“전체를 상대로 춘설난무를 펼치면 수라항천대 절반쯤은 죽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하면 경공을 펼칠 수는 있나?”
“경공이야 펼칩니다. 문제는 교주까지 모시고 이전만큼 오래 달리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이야 동굴이 있어 포위를 피할 수 있지만, 트인 곳에서 붙들리면 섬도곤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아들놈이 지닌 마천강기가 문제로군.”
진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천강기와 맞선 적은 없다.
다만, 함께 싸우는 동안 정동추가 뿌려내는 기운의 위력은 대강 짐작한다. 그리고 오행신위가 비슷한 기운을 다섯 가지에 담았다는 점도 깨달았다.
“아드님의 마천강기는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저 멍청한 놈이 그래도 재능은 타고 나서 위력이 대단하지. 저놈이 모든 것을 담아 검을 내면 나보다 약간 우위일 걸세.”
진무린의 질문에 정동추가 암담한 답을 내놓았다.
“잠시 안을 보고 나오지.”
한 시진에 한 번씩 섬도곤에게 기운을 전해주는 정동추가 동굴 안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기울어지는 해를 확인한 진무린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피식 웃었다.
정오에 있었던 요란스러운 사투와 이런 대치는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반드시 소문이 돈다.
은천문의 문주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모습이 떠올라 진무린은 웃음 끝에 쓴 입맛을 다셨다.
한번 생각이 달리자 이번에는 화산의 은혼이 떠올랐다.
마교를 치자던 진무린이 교주를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사매나 사제, 둘 중 한 사람만 있어도 이렇게까지 몰리지는 않을 텐데.’
진무린은 홍화루가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원예는 누구보다 빨리 소식을 얻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곳에 사매나 사제, 두 사람 중 한 명은 반드시 있다.
**
원예는 틈틈이 날아드는 급보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두이산?”
장소를 확인한 원예가 은향이 들고 온 작은 종이를 촛불에 태웠다.
“위험하고 어려운 것은 알아. 그렇더라도 소식을 재촉해.”
“예, 루주.”
은향이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설란이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은향이 나갔고, 그 직후에 설란이 바닥에 엎드렸다.
“출처를 알기 어려우나 진 공자와 마교 교주가 강호 삼보 중 하나를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지고 있습니다.”
놀랄 줄 알았던 원예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두이산 중턱의 동굴에 있다는 소문입니다. 마교의 핵심 세력이 삼보를 요구하며 그 앞을 가로막고 있고.”
홍화루의 모든 정보원을 총동원해서 겨우 두이산이라는 위치를 알아낸 참이었다.
그런데 설란은 동굴과 대치상태까지 말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정확한 정보라는 의미였다.
원예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보물을 사흘만 지니고 있으면 절세의 무공을 얻어 강호 최고수가 된다는 소문에 무인들이 줄줄이 두이산으로 향한다는 정보입니다.”
보고를 마친 설란 앞에서 원예는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속히 가서 모 소저를 모셔와. 경공을 발휘해서 3층 창으로 바로 오셨으면 할 정도로 급한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서둘러.”
“예, 루주.”
설란이 급한 걸음으로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누구도 원예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원예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와 냉정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