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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75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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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5화

은천검제

제175화

 

누군가 주변의 침묵을 모두 삼켜버린 것처럼 은천문의 입구는 고요했다.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달려온 늦은 햇살 아래에서 신도황은 길게 갈라진 가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또한, 엄소동의 왼편 옆구리와 등에 손을 꽂았던 두 명의 적은 목이 갈라진 채 널브러져 꿈틀거렸다.

“푸후!”

피를 뱉어낸 엄소동은 죄를 자복하듯 무릎을 꿇은 신도황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박혔던 옆구리와 등에서 핏물이 연신 흘러내렸으나 그는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구주는 과연 대단하구려.”

“우리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은천문의 진무린이란 무인을 보게 된다면 내 말의 뜻을 알게 될 게다.”

“흠흐흐.”

억지로 웃던 신도황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더니 그대로 엎어졌다.

이로써 수장인 신도황을 포함해 쓰러진 벽계의 인원은 모두 아홉이었고, 남은 인원은 스물두 명이었다.

“이자가 수장일세.”

고개를 든 엄소동이 은천문의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생을 유지하는 촛불이 서서히 꺼지는 것처럼 그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견디게. 그리하면 자네들에게는 길이 있을 걸세. 마지막 가는 길에 희망을 보게 해준 것에 감사하네.”

몇 마디 말을 남기는 엄소동을 노리고 벽계의 인물 둘이 눈빛을 빛냈다.

“엄 대협!”

양소소가 외치며 다가서려는 순간이었다.

시선을 준 엄소동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지금 그 형태를 무너트리면 모두 죽음을 맞게 된다네. 벽계를 막아낼 유일한 희망이 자네들임을 명심하게.”

말을 건넨 엄소동이 옅게 웃었다.

분명 시선은 은천문 일행에게 주었으나 초점이 흩어진 그의 눈은 과거를 보는 것이 분명했다.

엄소동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 테고, 눈부시게 빛나던 젊음과 사모하던 이를 그리워하는 감정 또한 어딘가에 담겨 있으리라.

그가 마지막으로 누리는 과거의 모습이 못마땅했을까.

벽계의 한 명이 거칠게 손을 들었다.

“엄 대협!”

쉐에엑! 카앙!

전도위가 악착같이 검을 뻗었으나 앞을 막아선 적의 손에 튕겨 나갔고,

쉭! 퍼억!

등을 파고든 손이 엄소동의 가슴 앞으로 불쑥 나왔다.

벽계의 인물이 손을 빼내자 휘청했던 엄소동은 검을 앞으로 찍어 몸을 버티고는 이내 고개를 떨궜다.

구주에 대한 원한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양이었다.

벽계의 두 사람이 엄소동의 목을 자르려는 것처럼 손을 높게 들었다.

“그만해!”

양소소가 참지 못하고 고함을 버럭 지른 뒤였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고 말지 더는 지켜보기 어렵다.”

임운령이 걸음을 옮겼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마주 댄 등을 풀어내면 남은 네 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건만, 그는 검을 들고 엄소동의 앞을 향해 걸었다.

“문주가 저리 나서니 안 따를 수가 있나.”

핏물을 꿀꺽 삼킨 전도위가 임운령의 뒤를 따랐고, 남굉모가 한숨을 푹 내쉰 뒤에 걸음을 옮겼다.

남은 벽계의 인물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투로 지켜보는 앞에서 임운령, 전도위, 남굉모, 나탑사가 엄소동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섰다.

등을 마주 대고 대항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벽계를 상대하는 참이었다. 그런데도 은천문 일행은 엄소동을 중심으로 원을 크게 그리며 둘러섰다.

적을 상대하기는 불리하나 함께 싸우던 이가 당할 수모를 막아서기 위한 선택이라 은천문 일행 누구도 후회하는 기색은 없었다.

엄소동의 곁에 선 양소소가 낫을 들고 나탑사를 받친 다음이었다.

스물두 명의 적이 네 명을 향해 서서히 다가섰다.

죽기 직전에 엄소동은 조금만 더 견디라 당부했고, 길이 있으리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말한 길은 보이지 않는데 죽음은 이미 다섯 명의 코앞에 닥쳐 혀를 날름대는 형국이었다.

쉬이익! 카앙! 쉭! 쿠응!

마침내 적이 달려들며 사투가 벌어졌다.

양소소는 아예 나탑사를 밀쳐내고 앞으로 나서다시피 했고, 남굉모는 적의 손을 때려낼 때마다 휘청거렸으며, 세 번의 충격이 있고 난 뒤 전도위는 또다시 피를 토해냈다.

쉐엑! 카앙! 쉑! 쉑쉑!

“저들이 우리를 모두 죽인다 해도 본문의 진법은 절대 못 열어요!”

마지막을 짐작한 양소소의 고함이 요란한 검 소리를 뚫고 다른 네 명의 귀를 파고들었다.

“내 몸에 진을 심었어요. 내가 죽으면 진이 닫혀요!”

“그렇다면 후인이 와도 열지 못할 게 아니냐!”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남굉모의 질문이었다.

쉑! 카앙! 쉐에엑! 카강!

“본문의 내공을 이용하면 돼요! 저보다 월등히 높은 본문의 내공이라면 진이 움직일 거예요!”

“으하하하! 통쾌하다! 오늘 우리 다섯이 결국 벽계의 서른한 명을 맞아 은천문을 지킨 것이니 파천신군의 마지막으로 부족하지 않은 싸움이구나!”

남굉모의 통쾌한 대꾸가 나온 직후였다.

쉐에엑! 쉑! 쉑!

양소소는 아예 죽는 것으로 은천문을 지키겠다는 투로 낫을 휘둘렀다.

쉬익! 퍼어억!

한계를 넘어선 양소소가 어깨 아래를 얻어맞고 밀려나 나탑사의 품에 안겼고,

쉭! 퍼어억! 쉭! 퍽!

양소소의 자리가 비기 무섭게 전도위가 옆구리와 가슴을 얻어맞아 무너졌으며,

쉭! 퍼퍼퍽!

역시나 가슴을 연달아 맞은 임운령이 검을 땅에 꽂으며 오른쪽 무릎을 구부렸다.

쉭! 쉬쉭! 퍼벅! 퍼버벅!

“푸후-!”

마지막까지 버티던 남굉모가 벽계의 손에 얻어맞아 뒤로 주저앉았다.

“푸후-!”

다리를 길게 편 자세로 버티는 남굉모가 입에 남은 피를 토해낸 다음이었다.

처절했던 싸움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벽계의 인물들이 다가왔다.

여기까지인가.

남굉모가 고개를 돌려 나탑사를 보았고, 이어 애잔하게 웃었다.

비록 적의 손에 죽음을 맞게 되었으나 양소소의 기지로 은천문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목숨을 건 사투에서 패배한 것이 아쉬울 뿐, 목적한 바를 이루었으니 무슨 미련이 남을까.

기울어진 햇살 탓에 다가선 이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을 직감한 양소소는 그늘진 벽계의 인물들 사이로 드러난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엄소동 덕분에 죽을 목숨을 연명했고, 오늘은 진법을 변형해 은천문을 지켰으며, 이제는 그리운 이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하늘을 향해 시선을 주던 양소소는 눈가를 좁혔다.

그늘진 머리 사이에서 검은 덩어리가 피어나는 것처럼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묵빛 기운?’

은천문의 선조들이 현신하는 것일까.

양소소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떠올린 직후였다.

쉐에에에에에엑!

지금까지 그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을 정도로 처절한 소리가 은천문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투명한 원반이 은천문 일행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느낌 뒤에 바로 앞으로 진무린이 내려섰다.

투둑. 툭. 투두둑.

은천문 일행을 둘러쌌던 다섯 명의 머리가 허무하게 바닥에 떨어지자 놀란 것처럼 몸뚱이들이 버둥대다가는 두서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제자가 늦었습니다.”

진무린은 은천문 일행을 향해 짧게 손을 잡아 보인 뒤에 몸을 돌려 검을 세웠다.

스물두 명에서 다섯이 쓰러졌으니 남은 적은 열일곱이었다.

적어도 한 마디 말쯤 할 줄 알았다.

쉐에에엑! 쉑! 쿠으응!

그런데 진무린은 다짜고짜 벽계의 인물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엑! 쿠응!

진무린의 검에 담긴 것은 확실한 분노였다.

주저앉은 은천문 일행을 지키는 것처럼 둥그런 원을 타고 돌려 뿌리는 진무린의 검을 막을 때마다 벽계의 인물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쉑! 쉐에엑! 쉑쉑!

검을 휘두르는 진무린의 몸에서 묵빛 기운이 피어났고,

쉐에에에엑!

그 직후에 묵빛을 그대로 담은 검기가 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쉐엑! 카아앙!

검기를 막았던 적의 팔에서 피가 솟구쳤고,

쉐엑! 쉑쉑쉑!

화려한 궤적을 그려내는 검기를 피해 적들이 연신 몸을 비틀었다.

벽계의 인원 열일곱을 홀로 궁지에 몰아넣는 진무린의 모습에 은천문 일행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할 때였다.

후아아아아-,

걷잡을 수 없이 강한 기운이 진무린의 몸에서 뿜어지더니,

쉐에에에에엑!

휘두른 검을 타고 눈부신 용의 형상이 피어났다.

빛줄기로 만들어진 용은 벽계의 인원을 향해 거칠게 달려가 머리를 물어뜯었고, 발로 목줄을 할퀴었다.

쉐에에엑! 쉐에엑!

진무린이 검을 휘두르는 방향을 타고 꿈틀거리는 용은 거침이 없었다.

목과 가슴이 벌어져 피를 뿜어내는 적들이 연신 바닥에 널브러졌는데 진무린의 검은 용서가 없었다.

쉐에에에에엑!

마침내 마지막 남은 적이 갈라진 목을 부여잡고 버둥대다가 쓰러지며 은천문 입구에서 벌어졌던 사투가 끝났다.

주변을 둘러본 진무린은 검을 집어넣은 뒤에 일행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것이 등룡창천이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사고.”

놀란 와중에 양소소가 질문했고, 진무린이 답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자. 사저께서는 진을 열어주십시오.”

임운령의 요구를 들은 양소소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

 

문호방을 찾았던 종무헌과 백면호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걸음을 돌렸다.

가장 먼저 백면호리와 인연이 깊다는 장주가 이미 사망한 뒤였고, 성세가 대단했다는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잡풀이 우거진 채 방치돼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쫄딱 망할 수가 있나, 그래?”

주변을 뒤져 소식을 알아낸 백면호리가 쓴 입맛을 다셨는데 그렇다고 오 년 전에 무너졌다는 문호방을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이제 어쩔까?”

터무니없이 방치된 문호방의 마당에서 백면호리는 입술을 내민 채 의견을 물었다.

“제가 저들에게 가겠습니다. 문주를 놓아주는 대신 제가 들어갈 테니 흑판을 가지고 상등으로 가십시오.”

“어쩌려고?”

백면호리의 연이은 질문에 종무헌은 답을 하지 않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자네가 그곳에 갇혔다고 해봐. 진 대협이나 모 소저가 그럼 못 찾겠네요, 하고 끝낼 것 같아? 유광이 무너지든가 두 사람이 그곳에 파묻히든가 둘 중 하나 아냐?”

말을 하던 백면호리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문주를 저리 두고 돌아간 것을 알면 대사형은 말할 것 없고, 본문 역시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입술을 내밀고 인상을 찌푸렸던 백면호리가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얼른 가서 흑판을 써버리고 껍데기만 돌려주면 안 될까?”

종무헌의 시선을 본 백면호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지. 안 되겠지.”

뭐라 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가세. 가서 솔직하게 말하고 방법을 찾아보세.”

“솔직하게 말한다고 저들이 문주를 놓아줄 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대신 들어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걸음을 옮기며 종무헌이 재차 의지를 밝혔는데 백면호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

 

유광의 토굴에 갇힌 운진은 어둠에 휩싸인 안쪽에 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들었다.

누군가 흙을 파고드는 소리가 이따금 울린 것을 제외하면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어두웠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토굴의 안쪽이 흙냄새가 진한 것을 제외하면 숨쉬기가 편하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명상에 잠겼던 운진이 눈을 뜨고는 흙으로 막힌 토굴 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밖에 계신 분이 있다면 들어주시오. 노도가 잠시 술법을 부릴 것인데 도주하거나 이곳 분들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알기 어려운 귀기를 물리치려 함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잔잔한 음성으로 뜻을 밝힌 운진은 소매에서 부적 두 개를 꺼내 양손에 들었다.

그는 먼저 주문을 외웠고, 이어 손등을 밖으로 돌린 뒤에 검지와 중지를 뿌려 부적을 날렸다.

화륵. 화르륵.

불이 붙은 두 장의 부적은 곧바로 토굴의 위를 향해 스며들었다.

잠시 뒤였다.

“어느 놈이 본인의 휴식을 방해하느냐!”

남자와 여자의 음성이 절묘하게 겹친 섬뜩한 꾸짖음이 토굴 안을 흔들었다.

“이곳은 선량한 이들의 터전이다. 요물이 어찌 산 사람의 공간에 들어와 이들을 괴롭히느냐.”

“허튼 도사 놈이구나! 이곳이야말로 이 몸의 공간이니 목숨이 아깝거든 속히 물러가라!”

휘이이이잉-.

또다시 기괴한 음성이 터진 뒤에 운진을 나무라는 것처럼 거센 바람이 일어나 흙먼지를 가득 뿌렸다.

머리칼과 눈썹, 수염에 흙가루가 잔뜩 올라온 운진은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가슴 앞에 세우고 나직하게 주문을 외웠다.

드드등. 드드드등.

그 직후에 토굴이 나직하게 흔들렸고, 위에서 흙가루들이 연달아 쏟아졌다.

운진은 외우던 주문을 멈추고 확인처럼 토굴의 위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 직후였다.

불쑥 토굴에 사람이 들어와 운진의 손을 붙들었다.

이십 세쯤 되었을까.

운진의 손을 당기는 것으로 봐서 따라오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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