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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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4화
은천검제
제174화
진무린이 느닷없이 느낀 위기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가슴 한쪽이 쿵, 내려앉았고, 불현듯 은천문과 그곳에 있는 이들의 안위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에 따라 느끼는 막연한 불안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분명하고 또렷한 경고였다.
‘제자가 달려갑니다! 제발 견뎌주십시오!’
진무린은 혼신의 힘을 다해 경공을 펼쳤고, 그만큼 몸에 지닌 기운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일각쯤 달린 후였다.
적을 마주한 것도 아닌데 묵빛 기운이 뿜어져 진무린을 감싸기 시작하더니 달리고 난 자리의 나무가 부러질 듯 휘었고, 작은 돌과 흙가루가 거칠게 튀었다.
부귀영화를 원하지 않았다.
벽계를 상대하며 보상을 바란 적 없다.
모려원의 마음을 확인했고, 언젠가 벽계의 야욕이 무산되는 날, 은천문으로 돌아가 함께 지내기를 바랐을 뿐이다.
돌풍처럼 솟구친 진무린은 산의 정상을 박찬 뒤에 건너편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은천문의 위기가 있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선 길이었다.
삼보를 얻는 것이 강호의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대신할 사람도 없었다.
그렇더라도 순순히 은천문의 몰락과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 따위 진무린에게는 없었다.
산의 중턱을 박차고 진무린이 튀어나가자 뒤늦게 작은 돌들이 솟구쳤다가 아래로 떨어졌고, 바위틈의 나무들이 부러질 것처럼 휘청였다.
**
벽계의 인물 신도황은 은천문의 입구라고 생각되는 곳을 노려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은천문의 진법은 대단해서 벽계의 여섯 명이 기를 촘촘히 펼쳐 찾는데도 좀처럼 기물은 드러나지 않았다.
신도황은 재촉하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본 뒤에 다시 시선을 입구로 가져갔다.
눈앞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졌고, 실제로 걸음을 옮기면 아무 문제없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언덕이었다.
은천문의 진법은 그렇게 무섭다.
진에 갇히면 길이 엇갈려 엉뚱한 곳에 당도해야 하는데 은천문의 진법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 일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다.
기물을 찾는 데 나설 인원의 최대치도 여섯이 전부였다.
은천문의 앞을 흐르는 기의 흐름을 왜곡하면 진법이 드러나기는커녕 아예 사라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산이 품은 기운과 풍경을 자연스레 이용한 터라 돌아보는 모든 것이 기물처럼 보였고, 반대로 어떤 것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안에서 분명 이곳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저들도 대비가 있을 테고.
가벼이 볼 자들이 아니었다.
어떤 이유인지 확실치 않으나 몰락한 구주가 은천문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증거도 있었다.
‘너희를 구주라 생각하고 상대하마. 나를 포함해 서른한 명 중 절반의 희생도 각오했다. 그 대가로 오늘 은천문에서 숨 쉬는 모든 것의 목을 끊겠다.’
신도황이 각오를 다졌을 때였다.
“장보. 기물을 찾은 듯합니다.”
기를 펼쳤던 여섯 명 중 한 명이 다가와 조용하게 알렸다.
“확실한가?”
“이중 결계로 감춰두어서 애를 먹었을 뿐 분명 기물입니다.”
수하의 보고가 있은 다음이었다.
“내 앞에 있는 이들은 열 걸음을 물러나라.”
신도황이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의아했으나 오늘 지휘자 신도황의 지시에 열두 명의 인원이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여 그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분명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기물을 제거하는 순간, 저들이 어떤 수법을 발휘할지 모르니 그에 대비해라.”
신도황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계속 이었다.
“우득보가 연관된 것으로 보아 구주가 등장할 수 있다. 혹여 적의 대항이 예상외로 강하더라도 모두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해주기 바란다.”
“장보의 명을 받습니다.”
두려울 정도로 나직한 대꾸가 있은 다음이었다.
“기물을 움직이게.”
신도황은 대기하고 있던 수하를 향해 지시를 건넸다.
**
은천문의 진법 안에서 밖을 지켜보던 임운령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벽계는 참으로 강하구나.’
서른 명이라는 인원을 믿고 방심하는 모습을 보일만도 하련만, 저들은 진법을 여는 순간의 위험을 피하고자 열 걸음을 뒤로 물러나는 치밀함을 보였다.
“저들이 물러났습니다. 혹여 변하는 것이 있습니까?”
“고작 열 걸음이네. 이곳에 계신 분들이 충분히 달려들 거리이니 원래대로 시행하세.”
임운령이 물었고, 엄소동이 바로 답했다.
전도위와 양소소, 남굉모, 나탑사가 모두 들었다.
진의 바깥에서는 기물을 발견한 무인이 주변을 돌아본 뒤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임운령은 양소소를 돌아보았다.
‘사저. 본문을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안쪽 기물을 풀어내는 사람은 양소소였다.
신호를 기다리는 것처럼 남굉모 역시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순간에도 외손녀가 살아갈 날이 걱정되었을까.
남굉모의 눈에 아련한 감정이 올라있었다.
“시작하세.”
엄소동의 요구가 떨어졌다.
대기하던 이들이 일제히 기운을 쏟아냈고,
“저를 용서하세요.”
알지 못할 한 마디를 남긴 양소소가 진법을 유지하는 기물을 당겼다.
진이 흐려지는 순간이었다.
내내 잔뜩 웅크렸던 기운을 폭발시키며 임운령과 전도위, 남굉모와 나탑사, 그리고 엄소동이 튀어나갔고, 안을 맡기로 했던 양소소가 약속과 달리 몸을 움직였다.
쉐에에에엑!
허공을 찢어발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며 여섯 명의 흔적이 신도황의 머리 위에서 피어났다.
벼락처럼 쏟아진 공격이었다.
놀라고 당황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신도황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오른손을 위로 쭉 뻗었다.
쿠으응!
그의 손바닥을 상대했던 엄소동이 허공에서 거꾸로 빙글 돌아 재차 검을 내리꽂았고, 벽계의 여섯을 쓰러트린 네 명은 목표했던 자리에 내려서 등을 마주 댔다.
쉐에엑! 쉑! 쉑! 쉐엑!
“이 모자란 것아!”
진중탈구검을 펼치던 남굉모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등을 마주 댄 사이에 자리한 양소소를 향해서였다.
대꾸할 틈이나 답을 요구할 겨를은 없었다.
쉐에엑! 쉑! 쉐에엑!
연달아 뿌려대는 진중탈구검에 밀렸던 벽계의 인물들이 전열을 갖추고 뿌려대는 손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쉑! 카앙! 쉐에엑! 쿠응!
때론 쇳소리가 울렸고, 때로는 공력이 부딪쳐 커다란 바위를 철퇴로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여섯을 쓰러트렸으니 이제 스물다섯 명이 남았다.
쉐에엑! 쉑! 쉐엑!
하지만 이들은 진중탈구검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했고, 숫자 또한 확실히 열세였다.
쿠응! 쿵! 카아앙!
“외조모!”
쉐에엑! 쉑! 쉐엑!
네 명의 틈에 있는 양소소가 번쩍 몸을 띄워 위기에 빠진 이를 도왔고,
“전 사부!”
쉐엑! 쉑! 쉑!
공격하는 전도위에게 힘을 싣기도 했다.
언제,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르나 양소소는 날이 번들거리는 낫을 들고 있었는데 영특한 만큼 누구보다 확실하게 진중탈구검을 쏟아내고 있었다.
“문주!”
쉐에엑! 쉑!
낫을 휘두른 양소소에게 달려드는 벽계의 인물을 임운령이 막았다.
공력이 부족한 것이 양소소의 최대 약점인 것을 감안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쉬익! 퍽!
대결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탑사가 어깨를 맞았다.
쉐에에엑! 쿠응!
남굉모가 검을 휘둘러 그녀를 지켰고,
쉐엑! 쉑!
뒤편이 빈 남굉모를 양소소가 낫을 휘둘러 막으면서 위기를 넘겼다.
훌륭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은천문 일행은 고작 다섯이었고, 벽계에 비해 공력이 부족했다.
이후 두 명의 적을 상대하던 임운령이 위기에 빠졌고, 그를 돕던 전도위가 어깨를 맞았으며, 빈자리를 메우던 양소소의 낫이 적의 손을 때린 뒤에 급하게 돌아갔다.
쉑! 쉐에엑! 쉑!
엄소동은 신도황을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의 적에 둘러싸인 상태에서도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엄소동이 펼치는 구주의 검법 진중탈구검의 위력이 대단했으나 홀로 다섯을 상대하는 대결의 한계 또한 분명했다.
구주의 인물 여덟이 더 있다면 천라구합진을 펼쳐 벽계의 인물들을 모조리 쓰러트리련만, 홀로 남은 엄소동은 우득보에게 부끄럽지 않은 최후를 맞으려는 사람처럼 어깨와 등, 허리에 손을 맞고도 검을 멈추지 않았다.
쉐에엑! 쉐엑!
전도위는 진중탈구검 사이에 묵룡검법을 섞어 적의 팔뚝과 어깨, 가슴을 베고 갈랐다.
은천문 일행 다섯 명 중 가장 돋보이는 이는 전도위였다.
침착한 태도도 그렇거니와 검의 운용이 돋보였는데 아쉬운 것은 공력이었다.
쿠으응! 쿠응!
불행하게도 그는 마지막에 만난 벽을 넘지 못해 등룡창천을 얻지 못했고, 그 점이 뼈저리게 아쉬웠다.
쉐엑! 쉑! 카앙!
적의 손에 맞은 검이 튀어나올 때, 전도위는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꿀꺽 삼켰다.
벽계를 상대로 한 이 싸움은 사부 전도위가 제자 진무린에게 주는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그의 제자 진무린이라면 흔적을 보며 싸움의 앞과 뒤를 추려낼 테고, 은천문의 문주와 사부 전도위, 그리고 양소소, 남굉모, 나탑사가 어떻게 적을 상대했는지 알아볼 게 확실했다.
쉐에엑! 카앙! 쉑! 쉑!
적의 손에 검이 튈 때마다 기혈이 뒤집히는 바람에 나이 든 전도위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전도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쉐엑! 쉑쉑! 카앙! 캉!
잠시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 임운령 역시 분을 나눠 바른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쉐에엑! 카아앙!
“푸훗!”
적의 손에 검이 튕겨 나오는 순간, 피를 뿜어낸 전도위는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엄하게 대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성격이 무뚝뚝한 탓에 살가운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
‘고맙다.’
전도위는 진무린에게 고맙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싶었다.
등룡창천을 이룬 제자를 보았으니 은천문의 대사부로 살아온 세월에 미련은 없다.
쉐엑! 쉑쉑!
전도위와 임운령이 연속해서 위기에 몰렸으나 양소소는 돕지 못했다.
쉑! 카아앙!
한계에 달한 나탑사에게서 발을 빼지 못한 탓이었다.
임운령과 전도위는 기혈이 뒤엉켰고, 이미 적의 손에 두세 곳을 얻어맞아 얼마나 견딜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대로 끝인가.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나 양소소가 돌아가며 도움을 준 덕분에 이나마 견뎠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는 누가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은천문 일행이 몰렸을 때였다.
쉐에에에엑!
세상을 가를 것처럼 섬뜩한 검 소리가 은천문 앞을 뒤덮었다.
그 직후였다.
은천문 일행을 둘러쌌던 적들이 뒤로 물러섰다.
죽음 직전에서 잠시 틈을 얻은 은천문 일행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쉐에엑! 카앙! 쉑! 캉!
가슴을 크게 베인 신도황이 급하게 손을 휘둘렀고, 입에 피를 머금은 엄소동이 매섭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두 사람만의 대결이었다면 누가 보아도 엄소동의 승리를 짐작할 상황이었다.
쉐에엑! 쿠응! 쉑쉑! 카강!
그러나 결정적인 기회를 잡고도 엄소동은 둘러싼 벽계의 인원에 막혀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막아서는 벽계의 인물들에게 엄소동의 검은 분노하고 있었다.
쉐에엑! 쉑!
“이쪽으로 오세요!”
단번에 막아서는 둘의 목 아래와 옆구리를 가른 엄소동에게 양소소가 소리쳤으나,
쉐에에엑!
엄소동은 신도황을 향한 검을 멈추지 않았다.
“제발 좀 이쪽으로 오라고요!”
엄소동을 돕고 싶은 마음은 은천문 일행 모두 간절했다.
그러나 마주 댄 등을 푸는 순간, 나탑사는 바로 적의 손에 쓰러질 테고, 양소소 또한 견디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엄소동이 합류해야 했다.
저렇게 홀로 죽음을 향해 달려갈 것이 아니라 남은 이들과 힘을 합해 좀 더 현명한 방법으로 버텨야 했다.
쉐에엑! 카앙! 쉑! 캉!
“나더러 포기하지 말라며!”
양소소가 재차 고함을 질렀을 때,
쉐에에에에엑!
다시금 세상을 두 조각으로 가르는 것처럼 처절한 소리가 은천문 앞에 울려 나왔다.
엄소동의 검은 눈부셨다.
화려하게 그려낸 궤적의 끝에서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그의 검은 부당할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구주의 몰락에 대한 회한, 홀로 벽계를 상대하는 참담함, 그리고 비겁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그의 검에 모두 담겨 있었다.
주변을 뒤덮은 요란한 검 소리의 끝에서,
퍼억! 퍽! 쉐엑! 쉑!
섬뜩한 소리가 연달아 피어났다.
엄소동의 몸에 두 개의 손이 박혔고, 그 둘의 목이 깊게 갈라져 피를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