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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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3화
은천검제
제173화
모려원은 진무린의 무거운 표정이 염려되는 눈치였다.
‘염려할 것 없다.’
그런 모려원에게 듬직한 시선을 보낸 뒤에야 진무린은 궁주가 원하는 곳을 향해 걸었다.
“미혼진을 견디는 대결이다. 어떤 연유로 천음지체가 합락궁에 있는지 알기는 못하겠다만, 순수한 음기를 사용한다면 받아들이겠다.”
이전과 다르게 진무린은 아예 존대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무린의 어투보다 ‘천음지체’란 표현에 모려원이 당황했고, 궁주 또한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암수나 암기를 사용한다면 그때는 대응이 달라질 것이고, 비록 미혼진이 끝나지 않았더라도 반 시진 이상을 넘기지는 않겠다.”
궁주를 향해 재차 조건을 건넨 진무린은 새롭게 등장한 소녀를 돌아보았다.
강호가 넓다 하나 말로만 들었던 천음지체를 직접 볼 줄은 몰랐다.
최소 백 년의 세월이 지나야 한 번씩 태어난다는 천음지체는 하늘이 내리는 음기를 지닌 여인을 의미했다.
이들은 대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미모를 지녔고, 단명하며, 말로가 좋지 않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천음지체가 저주와 같은 운명을 피할 유일한 방법은 천양지체인 남자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 일이었다.
그동안 오행신위, 벽계를 상대하며 얻은 무수한 경험들과 기운이 있기에 그나마 알아보았지, 하마터면 진무린도 천음지체의 정체를 모른 채 미혼진을 상대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허술한 미혼진으로 보양진서를 지킨 것에는 이렇게 숨겨진 비기가 있었기 때문일까?
마음을 다스린 진무린은 불과 금의 기운을 바닥에 펼친 뒤에 당당한 태도로 미혼진의 시작을 기다렸다.
먼저 천음지체가 곱게 걸어 진무린의 앞에 섰고, 궁주는 등 뒤로 걸어가 위치를 차지했다.
그 직후에 진무린의 좌측에 두 명, 우측에 두 명의 여인이 마주 보고 서서 기운을 풀어냈다.
궁주가 팔을 높이 들자 천음지체의 몸에서 서리처럼 바닥을 뒤덮는 음기가 풀려 진무린이 뿌려놓은 불과 금의 기운을 뒤덮으며 달려들었다.
주변이 흐릿하게 변하는 느낌에 진무린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호흡을 조절할 정도로 미혼진을 통해 달려드는 기운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어떤 기운과도 달랐다.
표현이 어려운데 억지로라도 한다면 진무린은 새롭게 등장한 소녀를 품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팔과 가슴으로 그녀의 부드러움이 느껴졌고, 호흡을 고를 때마다 숨결이 전해졌으며, 심지어 품에 안겨 애달프게 매달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처음 본 여인의 미모 따위에 흔들릴 진무린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들과 차원이 달랐다.
‘살고 싶어요. 제발 소녀의 손을 놓지 마세요.’
천음지체의 몸을 바랐던 적 없는 가녀린 여인이 진무린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소녀를 품어달라는 청이 아니에요.’
미혼진의 유혹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절박한 청이어서 실제로 소녀가 합락궁을 빠져나가기 위해 호소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진무린의 생각이 흔들리는 순간, 주변이 또다시 바뀌었다.
어릴 적 올랐던 은천문의 동산처럼 녹음이 우거진 곳에서 소녀는 진무린을 향해 뒷걸음치고 있었다.
맑은 햇살, 바람, 기억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재현된 속에서 탐욕에 젖어 달려드는 네 명의 남자를 피해 뛰어온 소녀는 진무린의 뒤로 돌아 등 뒤에 숨었다.
또다시 그녀의 숨결이 진무린의 목을 간질였고, 참기 어려운 살 냄새가 코에 스며들었으며, 애처롭게 매달린 그녀의 몸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오랜 세월 함께 지냈던 사매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비켜라!”
네 명 중 한 명이 거칠게 외치며 손을 뻗었다.
이것이 미혼진이라 여겨 그대로 두면 소녀는 진무린의 눈앞에서 농락당할 것이다.
미혼진이라면서?
“대사형!”
소녀가 진무린을 불렀다.
모려원도 아니면서 말이다.
“제발 도와주세요, 대사형!”
은천문의 동산에서 소녀와 놀았던 시절이 있었나?
“손길만 막아주세요! 한 번만요! 그럼 끝나요! 소매의 숙명을 막아주세요!”
네 명의 남자는 천음지체의 비참한 최후를 부르는 네 가지 숙명, 부, 권력, 무위, 지위를 의미했다.
소녀는 진무린에게 안아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손을 막아 천음지체가 받아야 할 숙명을 잠시나마 피하게 해달라며 매달리고 있었다.
“비키라지 않느냐!”
진무린은 사내가 뻗은 손을 보며 호흡을 골랐다.
“대사형! 소매예요!”
사내가 뻗은 손을 내려다보며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소녀가 건넨 ‘소매’라는 말에 담긴 감정이 모려원과 너무도 달라 자연스레 나온 웃음이었다.
‘내게 사매는 한 사람뿐이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며, 위험에 처했다고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홀로 어려움을 감당하고자 달려드는 무인, 모려원이다.’
마음이 정해지자 자연스레 상단전이 열리며 둘러싼 풍광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비키라며 윽박지르던 네 남자는 진무린의 좌우에 섰던 여인들이었고, 실제로 천음지체인 소녀는 궁주와 함께 여인들 뒤에 있었다.
환술이 깨진 탓일까.
소녀가 뿜어내던 음기가 삽시간에 사라지며 반대로 억눌렀던 진무린의 기운이 삽시간에 터져 나왔다.
궁주와 소녀 모두 참담한 표정이었다.
“고작 이따위 수법으로 승리를 장담했다니 진지하게 맞선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다. 보검을 얻었다 해도 휘두를 무공을 지니지 못했다면 한낱 철검과 다를 바 없음을 명심해라.”
먼저 궁주를 꾸짖은 진무린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양진서와 금편은 약속대로 우리가 가져갈 테니 그리 알아.”
“한 가지만 답을 다오. 천음지체가 펼치는 환술은 사람의 힘으로 이기지 못한다. 도대체 어떤 수법이기에 하늘이 내린 천음지체의 기운을 이긴단 말이냐?”
상황을 정리하는 진무린에게 궁주가 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험악한 사내라고 방심해서 손을 붙들었다면 바로 유혹에 빠지는 것이 이 진의 무서움이었다. 그리고 그 단계까지 천음지체의 기운을 사용했고.”
그녀는 보물을 잃었다는 충격보다 천음지체를 이용한 미환진이 깨진 것이 더 견디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소림의 고승이나 무당의 신선이 와도 빠져나갈 수 없는 수법이었단 말이다!”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보검을 들어도 사용하는 법을 모르면 철검과 같다고 말하지 않았나. 또 한 가지. 내가 현혹되는 순간, 사매가 이곳의 사람이 된다. 사매를 버리는 대신 선택할 만큼 값진 것이 내겐 없다.”
차갑게 대꾸를 건넨 진무린이 모려원을 돌아본 뒤에 경공을 펼쳤다.
진무린을 따르기 직전에 모려원이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궁주를 돌아보았다.
**
천서유기와 옥환을 탁자에 올려놓은 유은방이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이로써 너에게 있던 금제가 풀렸으니 이제 유가장은 원하는 바대로 살아.”
“교주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면 몸에 새긴 글자들을 어찌할까요?”
“이미 천서유기가 내 손에 들어왔는데 글자가 남았다고 달라질 것이 있을까. 신경 쓰지 마라.”
정동추는 볼일이 끝났다는 투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알아차린 섬도곤이 천서유기와 옥환을 손에 담았으니 지난 세월 수많은 이의 피를 흘리게 했던 보물이 다시 주인을 얻는 일이었다.
정동추는 그 길로 유가장을 나섰고, 문 앞까지 따른 유은방은 청룡단이 지켜보는 앞에서 곱다랗게 읍을 올렸다.
내막이 있다는 것쯤 아무리 둔한 섬도곤도 충분히 눈치챌 정도의 상황이었다.
“네가 교를 맡게 된 이후에 유가장의 어려움을 보게 된다면 한 번쯤은 손을 내밀어 줘.”
“예, 교주.”
내용을 모르나 섬도곤은 정동추의 지시를 두말하지 않고 담았다.
“죽은 구정봉의 어미다.”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청룡단을 지나친 정동추가 숨겨진 이야기의 일부를 꺼냈다.
막내제자였던 구정봉의 이야기라 섬도곤이 귀를 쫑긋 세웠으나 정동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오늘의 인연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모른다. 그러나 부장주 유은방의 몸에 천서유기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심해라.”
“그리하겠습니다.”
섬도곤이 답을 한 다음이었다.
“가자.”
정동추가 훌쩍 몸을 날렸고,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섬도곤이 꿋꿋하게 그 뒤를 따랐다.
**
뿌우우우-. 뿌우우우-.
바람을 타고 달려온 뿔피리 소리가 팽팽한 긴장에 휩싸여 있던 은천문에 침입자가 있음을 알렸다.
곧바로 급한 발걸음 소리가 은천문 곳곳에서 울렸는데 이는 훈련된 일이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온 모양입니다.”
전각의 2층에 있던 임운령은 아예 홀가분한 음성이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피했어야 하나 외로운 이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가가께서 어려움을 외면하셨다면 오히려 서운했을 거예요. 당당한 가가의 모습에 지난 세월을 기다렸던 것이니 다른 말씀 마세요.”
남굉모가 안타까움을 전하는 반면, 나탑사는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의지를 전했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에요.”
양소소의 말에 따라 일행은 모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법을 설치하기 위해 먼저 가볼게요.”
“고생을 부탁드립니다.”
“문주를 지키지 못하는 문도에게 무슨 고생을 운운해? 얼른 다녀올게.”
비장한 표정의 양소소가 나선 다음이었다.
일행은 전각을 나서 그대로 경공을 펼쳤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여섯 명의 제자들이 임운령과 일행을 맞았다.
“고생했다. 오늘 물러나는 것은 내일의 영광을 위해서이니 너희는 서둘러 수련동으로 향해라.”
이를 악문 제자들이 검을 들어 포권을 보인 뒤에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재촉해 수련동으로 향했다.
일행은 혹여 모를 사태를 대비해 조심하며 입구로 걸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으나 안에서는 밖이 보인다.
예상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가 먼저 놀랐고, 다음으로 가장 앞쪽에 선 이가 사람의 머리를 들고 있는 것에 다들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어째 이리 시간을 끄나 했더니 저 친구를 찾았던 모양일세. 우득보일세. 벽계에 있었다네.”
답은 엄소동의 입에서 나왔다.
그동안에도 벽계의 인물들은 진법을 부술 기물을 찾느라 날카롭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준비하세.”
엄소동의 말에 일행은 각기 검을 든 채 정해진 위치로 움직였다.
우득보의 최후를 보며 느꼈던 안타까운 감정을 정리했을까.
숨을 한 번 길게 내쉰 엄소동이 검을 꺼내고는 검집을 옆으로 던졌다.
곧 있을 싸움에서 죽기를 각오했다는 의미였다.
이미 마지막 인사들은 차고 넘치게 나눴다.
각오를 세운 다섯 사람이 밖에 있는 이들을 노려보며 기운을 일으킬 때 마침내 양소소가 도착했다.
그녀는 바깥에 있는 인원을 확인했고, 손에 들린 머리를 보았는데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제 할까요?”
“저들이 진법의 일부를 발견한 순간이 가장 적당하지. 그쪽으로 잠시나마 시선이 돌아갔을 때를 노리세.”
양소소가 질문했고, 엄소동이 답했다.
진의 바깥에 있는 벽계의 인원 중 다섯이 주변을 세심하게 살필 뿐 나머지 스물다섯은 마치 안쪽이 보이는 것처럼 시선을 집중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법을 찾는 데 긴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리라.
양소소가 진법의 일부를 해체하면 튀어나간다.
달려나가기로 약속한 이들은 혹여 있을지 모를 미련을 털어내는 것처럼 숨을 길게 내쉬었다.
**
합락궁을 빠져나온 다음이었다.
경공을 펼치던 진무린은 느닷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던 참이었다.
속도를 제대로 줄이지 못한 모려원이 높다랗게 솟구치는 수법을 이용해 내려앉았는데 진무린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매서운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사형? 무슨 일이세요?”
“사매. 본문이 위험하다. 지금은 도저히 함께 갈 수 없으니 보물을 상등으로 가져가 맹주나 교주에게 전해주고 본문으로 와라.”
“대사형?”
진무린이 모려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진무린의 감정이 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감각이 경고하고 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설명하기 어려운데 본문으로 향해야 한다. 먼저 보양진서를 안전한 곳에 두어야 하고, 다음으로 지금부터 달리는 속도를 사매는 감당하지 못한다.”
비록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 할지라도 함께하기를 맹세했으나 은천문의 위기를 두고 감정을 앞세울 만큼 모려원은 어리석지 않았다.
“알았어요, 대사형.”
진무린을 이해한 모려원이 의아한 표정을 버리고 다부지게 답을 내놓았다.
벽계가 얼마나 강한지 능히 짐작한다.
만에 하나, 진무린이 그들 손에 쓰러진다면 모려원은 그 복수를 위해 달려들겠다는 각오였고, 하루 이틀 차이만 있을 뿐 함께 죽음을 맞는 것은 변함없는 일이었다.
“대사형. 어서 가세요.”
강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려원을 향해 진무린이 팔을 뻗었다.
팔이라도 다독일 줄 알았다.
그런데 진무린은 모려원을 당겨 품 안에 깊게 안았다.
“반드시 지켜낼 테니 본문에서 보자.”
모려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먼저 당황했고, 곧바로 이것이 진무린과 나누는 첫 번째 표현이자, 마지막 인사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오지 못할 순간을 붙드는 것처럼 모려원이 팔을 뻗어 진무린의 허리를 감쌌다.
한순간이겠으나 모려원은 진무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진무린의 숨결과 심장의 고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 모려원의 이마에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든든하고 듬직하며, 설레는 감촉이 느껴졌다.
허락된 여유는 길지 못했다.
숨 한 번 쉴 정도로 짧은 시간이 지나고 진무린이 팔을 풀었다.
“간다.”
“상등에 들렸다가 바로 갈게요.”
모려원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무린은 발을 굴렀고, 삽시간에 저 멀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