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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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2화
은천검제
제172화
이미 합락궁의 초입에서 경험했던 일이었다.
진무린이 기운을 뿜어내는 것과 동시에 여인들 사이에서 검을 휘두르던 모려원 역시 기운을 뿌리는 것으로 합락궁의 미약을 흩트렸다.
쉐에에엑!
왼쪽 무릎을 구부려 검을 냈던 모려원이 곧바로 몸을 돌려 뒤에서 달려드는 여인들을 완벽하게 밀어냈다.
모려원이 나섰고, 기다렸던 것처럼 궁주가 쇠침을 날리며 시작된 사투였다.
진무린의 침묵은 대신 나선 것을 인정한 것과 같아서 지금 벌어지는 대결은 완벽하게 모려원의 몫이었다.
쉬이익! 쉬이이이익!
모려원은 확실히 결정적인 순간을 양보하며 수준의 차이를 느끼기 바라는 눈치였는데 궁주는 또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은 궁주는 아예 여인들을 모려원에게 달려들게 하고 그 직후에 쇠침을 날리는 비겁한 수법을 연달아 사용했다.
쉭! 쉭쉭! 쉭!
더 양보하는 것은 확실히 위험을 자초하는 것과 같았다.
대결이 모려원의 강단을 요구하는 순간이었다.
‘물러나지 마라, 사매.’
진무린이 강력한 대응을 바라는 순간이었다.
휘리리리릭!
곧바로 모려원이 검 끝을 흔들었고, 눈부신 광채가 합락궁의 2층 전각 앞에서 화려하게 피어났다.
눈발처럼 휘날리는 검광에 싸이면 죽는다.
합락궁의 여인들이 바닥을 굴러 물러났고, 궁주는 양손을 넓게 벌린 자세로 솟구쳤다.
모려원을 상대로 허공에 솟구친다고?
진무린이 피식 웃었을 때였다.
“호호호!”
궁주를 구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여인들이 요사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일제히 모려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독특한 향이 진무린과 모려원을 감쌌다.
조악한 수법이나 요사스러운 웃음은 음공의 일종이었고,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미약을 터트리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궁주가 위험에 처하자 대신 죽겠다는 투로 여인들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쉐에엑! 쉐엑! 쉐에엑!
모려원은 궁주를 버리고 달려드는 여인들을 밀쳐냈다.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 중 하나밖에 없다.
죽이거나, 더는 달려들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물리치거나.
목숨을 도외시하며 여인들이 달려들자 대결은 점점 더 치열한 양상으로 바뀌었다.
진무린은 무거워진 눈으로 궁주와 여인들을 살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포위하더니 대결이 진행될수록 점점 모려원을 향해 범위를 좁혀가고 있었다.
압축이었다.
한눈에도 모려원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미혼약의 농도가 엄청나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저들이 깨닫지 못한 것이 있으니, 모려원은 여인들의 벗은 몸에 현혹되지 않으며, 미약을 밀어내는 법을 터득했다는 점이었다.
그렇더라도 호흡이 곤란할 것은 분명해서 모려원은 분명 세 번의 초식 안에 압박해 오는 진을 떨쳐내야 했다.
휘리릭! 휘리리릭!
궁주를 향해 검 끝을 흔든 모려원은 곧바로 몸을 돌려 후미를 노리는 여인들을 향해 눈부신 빛줄기를 뿌렸다.
다급하게 몸을 빼내는 여인들 틈에서 모려원은 닭 사이에 있던 학처럼 몸을 솟구쳤다.
“합락궁은 본문의 무공을 보아라!”
크게 소리친 모려원이 팽이처럼 몸을 돌렸다.
휘리릭! 휘리릭! 휘리리릭!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빛줄기로 악녀들을 벌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이는 또한, 지금껏 모려원이 양보해주고 있었음을 확연하게 알리는 한 수였고, 진무린이 나서지 않아도 합락궁 따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경고와 같은 무위였다.
등룡창천을 견디지 못한 삼십여 명의 여인들이 피투성이가 돼서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남은 인원은 궁주를 포함해 열이 되지 않았다.
바닥에 내려선 모려원은 꾸짖는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연이은 등룡창천으로 인해 내공이 한계에 달했을 텐데 모려원은 내색하지 않았다.
“흥! 이런다고 보양진서를 내놓을 거라 기대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오해하지 않는 게 좋아요, 궁주. 이 대결은 보양진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사형께 무례했던 것에 대한 벌이에요.”
모려원은 검을 아래로 내린 채 궁주를 상대했다.
“궁주가 내놓지 않겠다면 이대로 돌아가죠. 그러나 알아두세요. 다음번에 찾아올 이는 마교 교주와 그의 제자 섬도곤이 될 거예요.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맹세하죠.”
지켜보던 진무린이 놀랄 정도로 모려원의 대꾸는 다부졌다.
“충고도 하나 하죠. 그들이 방문하면 미혼진을 펼치지 않는 게 좋아요. 화가 난 섬도곤의 특기가 살아 있는 이의 목을 잡아 뽑는 것이니까요.”
말을 마친 모려원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검을 집어넣었다.
걸음을 돌린 모려원이 진무린을 향해 걸었을 때였다.
쉬이익!
궁주가 검지를 튕겼고,
쉐에엑! 카앙!
모려원이 검을 휘둘러 쇠침을 막아낸 뒤에 궁주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궁주의 목을 베는 것쯤 어렵지 않아. 검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지금 물러난 제자들 모두 죽었을 테고. 대사형께서 양보하셨기에 따랐을 뿐이지 합락궁이 두려워서가 아니란 것을 분명하게 알아둬.”
매서운 모려원의 말에 궁주는 대꾸하지 못했다.
“벌거벗은 몸에 현혹되지 않는 사람에게 합락궁은 그저 예를 저버린 추악한 집단일 뿐이야. 마교 교주나 섬도곤처럼 그런 몸뚱이에 관심 없는 고수를 만나면 죽은 목숨과 같고.”
마지막으로 궁주를 노려보았던 모려원이 후련한 얼굴로 진무린의 곁으로 다가왔다.
“죄송해요, 대사형. 참지 못해 나섰다가 일을 망쳤어요.”
“내가 나선 것보다 훌륭하게 마무리했으니 미안해할 것 없다. 사매 말대로 일단 돌아가 교주에게 부탁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 같다. 출발하자.”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대사형.”
진무린은 실제로 미련을 버렸다.
다른 조건을 건다면 모르겠지만, 잠자리를 제안하는 궁주에게 매달려 봐야 추악한 모습만 보리란 판단에서였다.
심성이 바르지 못한 사내들이 달려들었을 때나 벗은 몸과 미약이 먹히는 것이지 정도문파에서 올곧은 정신으로 수양한 이들이게 합락궁은 모려원 말마따나 추악한 집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들에게는 실제로 마교 교주나 섬도곤이 확실히 두려운 존재일 게 분명했다.
진무린과 모려원이 몸을 돌릴 때였다.
“그대의 대사형이 진정 유혹을 떨쳐내리라 믿느냐?”
몸을 돌리는 모려원을 궁주의 급한 질문이 붙들었다.
“네가 여자의 몸이라 미혼진의 마지막을 사용하지 않았다. 기운을 써도 좋으나 공격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대의 대사형이 유혹을 견뎌낸다면 보양진서를 내주마.”
떨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진무린과 모려원이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앞에서 궁주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네 대사형이 유혹에 넘어가 손을 뻗치면 너희 두 사람은 마교를 막아야 하고, 또한 너는 본궁의 사람이 되어라. 그 정도는 자신하겠지?”
“흥. 보양진서를 가져와 내 앞에 놓는다면 기꺼이 수락하죠.”
모려원의 대꾸는 시원시원했다.
“만약 네 대사형이 유혹에 넘어왔음에도 네가 보양진서를 탈취해간다면 우리는 막을 방법이 없다.”
“나는 대사형께 이미 마음을 드렸어요. 내 삶을 송두리째 잃었는데 보양진서가 무슨 의미가 있죠? 그리고 본문의 사람은 거짓 약속을 하지 못해요. 가져간다 해도 문주께서 돌려주실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기가 막힌 심정에 진무린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통쾌하게 궁주를 상대한 모려원이 진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죄송해요, 대사형.”
“약속은 몰라도 본문의 이름과 문주를 추한 약속에 언급한 것은 분명 잘못이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해라.”
“네.”
모려원의 답을 들은 진무린은 궁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양진서를 가져온다면 미혼진의 수법을 감당하겠다.”
입술을 뾰족하게 움직여 독기를 보인 궁주는 요대 안에서 손가락 크기만 한 피리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삐이이이.
진무린은 모려원과 함께 그들이 하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정도맹이 설립된 이후 처음으로 청룡단은 마교 교주와 제자에게 순순히 길을 내주었다.
물론 적대감 가득한 청룡단의 시선을 받은 섬도곤이 목을 뽑고 싶은 충동에 손을 움켜쥐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교주 정동추는 청룡단 따위 하는 얼굴로 지나쳤고, 청룡단은 정도맹을 완벽하게 움켜쥔 황종관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다.
유가장에 들어선 정동추와 섬도곤을 맞은 것은 장주 유금의 여동생인 유은방이었다.
“교주를 뵙습니다.”
“장주는 여전한가?”
“교주의 배려 덕분에 목숨은 건졌으나 자리를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번거롭게 할 것이 뭐가 있어? 천서유기를 주게. 그리하면 밖에 있는 정도맹의 떨거지를 보내고 유가장도 평온을 되찾겠지.”
정동추는 뒷짐을 진 채 정원에서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차를 드시고 계시면 준비하겠습니다.”
천성적으로 기다리는 일과 손에 무언가를 드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성품이 정동추의 눈매를 곱지 않게 만들었다.
힐끔 유은방을 보았던 정동추는 마지못해 정면에 보이는 대청의 탁자로 향했다.
시비가 가져온 차를 공손하게 놓아준 유은방이 다시 시간을 청한 뒤에 안쪽으로 움직였다.
“유가장이 어떻게 천서유기를 손에 넣었는지 아냐?”
기다리기 무료했던지 정동추는 질책하는 것처럼 질문을 건넸다.
“제자는 모릅니다.”
좀 공손하면 좋으련만, 그 사부의 그 제자답게 섬도곤의 대꾸 역시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천서유기를 순순히 내놓는 이유는?”
“장주를 살려주신 은혜를 갚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드러난 일이고, 뒤에 숨겨진 것을 알아야 진정으로 아는 것이지.”
“그렇다면 저는 모릅니다.”
터질 것 같은 분통을 참아내는 것처럼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정동추가 인내하는 얼굴을 역력하게 그려내며 뱉었다.
“교주가 돼서 겉만 보고 판단했다가는 반드시 죽는다. 누군가 친절을 베풀면 그 뒤에 나올 손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 당장은 아니더라고 세상사는 묘해서 돌고 돌아 결국 그런 순간을 만든다.”
“명심하겠습니다.”
“네놈은 더욱 강해질 게다. 처먹은 약이 있어 그렇고, 아직 대성하지 못한 무공을 곧 얻게 될 듯한데 힘만 믿다가는 머리 쓰는 놈들의 칼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잊지 마라.”
“애초에 머리 쓰는 놈들의 목을 모두 빼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섬도곤의 대꾸에 정동추는 지친다는 표정이었다.
“멍청한 놈. 정도맹이 계교를 부리면 누가 그것을 판단하고 대안을 만들겠냐. 그러니 옆에 두고 늘 조심해야지. 아들놈이 아비의 등에 칼을 꽂는 것이 권력이다”
“저는 혼인 따위 아예 생각이 없습니다.”
“흥! 부부싸움이라도 하고 나면 목을 뽑을 테니 네놈에게 오는 여자가 있을 턱도 없지.”
천산을 내려온 이후 정동추는 전에 없이 섬도곤에게 많은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다른 보물들은 손에 넣었나?”
더는 섬도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것처럼 정동추는 유가장의 담장에 갇힌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
보양진서와 금편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궁주가 불러낸 여인을 보며 모려원은 마른침을 삼킬 정도로 놀랐다.
세상에 저런 미인이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했다.
이제 열일곱에서 여덟쯤 되었을까.
고운 이마 아래로 새의 날개처럼 단아한 눈썹, 그에 못지않게 매력적인 속눈썹도 놀라운데 정작 모려원을 당황하게 한 것은 합락궁에서는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청초하고 애잔한 눈빛이었다.
청초함만 지닌 것이 아니었다.
여린 듯 보이나 시선을 확연하게 잡아끄는 몸매도 대단해서 무공을 익혀 탄탄한 모려원과 달리 나긋나긋한 매력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
윤곽만 드러나는 비단을 걸쳤는데 그것이 보는 이를 더욱 애타게 하는 느낌이었다.
모려원은 당황한 심정을 감추기 위해 진무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쩐 일일까.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태연하게 여인을 바라볼 줄 알았던 진무린의 표정이 확실히 무겁게 느껴졌다.
진무린은 결단코 미모나 몸매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설사, 만에 하나, 본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여인에게 한 조각 마음이 달려간다 하더라도 바로 중심을 잡을 사람이었다.
“보양진서를 확인했다면 어서 나와 진을 견뎌보아라.”
득의양양하게 말을 뱉어낸 궁주가 두고 보자는 투로 모려원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본궁의 여인이 되려면 오십 명의 남자를 상대해야 하지. 너를 위해 특별한 자들로 선발해 줄 테니 기대하는 것이 좋아.”
궁주는 아예 진무린이 진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