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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71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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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1화

은천검제

제171화

 

절벽을 돌아보았던 백면호리가 다시 종무헌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짧은 사이에 암동에 다녀왔단 말이야?”

“암동은 모르지만, 앞에 있던 여인을 놓치지 않으려 달렸더니 바로 나왔습니다.”

“바로 나온 게 문제가 아닌데……. 일단 자리를 피하고 보자고.”

백면호리는 이미 절벽의 반대편으로 몸을 틀고 있었다.

“먼저 가지고 가십시오. 강호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흑판을 가지고 오기는 했으나 적어도 유광의 우환을 해결해야 마음 편히 돌아갈 것 같습니다.”

“뭐라는 거야! 지금 우환을 말할 때가 아니라니까!”

백면호리가 다급하게 외친 다음이었다.

부스스! 부스슷! 부스스!

세 사람을 둘러싸는 것처럼 흙이 아래로 꺼지면서 커다랗게 구덩이들이 피어났다.

“이런! 벌써 시작했네!”

“구덩이쯤은 경공을 발휘해 뛰어넘으면 되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위로 건너가는 순간 전갈의 독이 솟구쳐. 자네는 몰라도 문주와 나는 뻣뻣하게 굳어서 죽는 것 말고 없어!”

부스스! 부스스스!

구덩이들은 범위를 넓혀가는 것처럼 점점 늘어나서 황토색 바둑판 위에 검은 돌을 연속해서 올려놓는 것처럼 보였다.

종무헌은 백면호리를 향해 흑판을 건넸다.

“왜?”

얼떨결에 흑판을 받은 백면호리가 확인처럼 시선을 들었다.

“대사형께서 제게 주신 임무입니다. 제가 길을 뚫을 테니 문주와 함께 달리십시오.”

“자네는? 자네는 어쩌려고?”

“알아서 하겠습니다.”

백면호리가 달려야 할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종 소협. 노도는 이미 혈교의 수장을 해결했고, 또 이전에 죽었어야 할 몸이 진 대협 덕분에 여태 살아 있소. 이곳은 노도가 술법으로 맡을 테니 두 분이 달리시오.”

부스스! 부슷! 부스스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퍼진 구덩이는 방향을 바꿔 세 사람을 향해 범위를 좁혀들고 있었다.

“백면호리께서는 종 소협과 어서 출발하시오.”

“문주! 문주께서 가십시오!”

“노도는 종횡주를 사용해야 경공을 발휘하는데 그 상태에서는 술법을 부리지 못하오. 그러나 종 소협은 달리면서도 무공을 발휘하지 않소? 그러니 종 소협이 가시는 것이 맞소.”

급하게 뜻을 전한 운진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넉넉한 미소를 얼굴에 담았다.

‘종 소협. 목숨을 걸겠다는 각오를 이미 보았소. 이번만큼은 노도에게 마지막 일을 맡겨주시오.’

이미 속을 읽고 고개마저 끄덕이는 운진의 눈빛에 종무헌은 입을 열지 못했다.

“강호의 평화를 지켜야 할 분이 어찌 소소한 일에 매달려 죽음을 자초하시오? 어서 가서 보물을 전하고 진 대협과 모 소저의 곁을 지켜주시오.”

더는 안 되겠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문주. 죄를 용서하십시오!”

눈썹을 치켜세운 종무헌이 운진과 백면호리의 허리를 붙들었다.

“하지 마! 늦었어! 지금 던지면 진짜 죽어!”

그리고 그 직후에 백면호리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세 사람 중 이곳을 가장 잘 아는 백면호리의 말에 종무헌은 손을 놓고 자세를 세웠다.

“에효.”

들고 있던 흑판을 소맷자락으로 닦은 백면호리가 종무헌의 손을 당겨서 그 위에 놓아주었다.

왜 이러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종무헌은 시선만 들었다.

“죽은 마누라가 기다리기 지루했던 모양이야. 돌아가거든 그저 우리 정아를 끝까지 살펴주게. 진 대협에게도 내가 애절하게 매달리더라고 전해주고.”

종무헌과 운진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앞에서 백면호리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그는 삽시간에 가면을 벗었다.

이것이 백면호리의 진짜 얼굴일까.

왼쪽 절반이 불에 녹아내려 눈알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흉측한 모습이었다.

백면호리는 절벽을 향해 돌아서서 양팔을 높게 들었다.

“이부대공 요지다! 유광은 앞으로 나서라!”

내공이 담기지 않았으나 절벽까지 들리기에는 충분했다.

그의 고함이 터진 직후였다.

흙이 꺼지는 소리가 단박에 사그라들었고, 절벽에서 토굴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종무헌이 빠르게 주변을 살필 때였다.

“감히 아직도 이부대공을 입에 담는가!”

얇고 높다란 음성이 백면호리를 꾸짖는 것처럼 나왔다.

“원한다면 토황패를 찾아다 줄 테니 우리 세 사람을 돌려보내 다오!”

토황패를 훔친 당사자 백면호리가 뻔뻔한 조건을 내걸고 있었다.

궁금함의 연속이었는데 당장 질문하기는 어려워서 종무헌과 운진은 입을 다문 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유광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리도 당당한 백면호리라니.

종무헌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백면호리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였다.

“흑판을 돌려준 뒤에 말하라!”

침묵을 깨고 얇고 높은 음성이 요구를 전했다.

“유광은 오해하지 마라! 이곳에 있는 종 소협은 은천문의 기재로 얼마든지 몸을 빼낼 무공을 지녔다! 그 과정에서 희생될 유광의 사람이 안타까워 나선 것이지 두려워서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다!”

백면호리의 대꾸가 있고 나서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한 사람을 이곳에 두고 간다면 믿겠다! 토황패를 찾아온다면 세 사람이 함께 갈 것이다!”

그 직후에 백면호리가 바랐던 조건이 들렸다.

의논을 위해 백면호리가 몸을 돌리는 참이었다.

“흑판은 용도를 다한 뒤에 돌려준다는 약조도 필요하다!”

두 번째 요구조건이 길게 들려왔다.

“에이!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건데.”

백면호리가 오른손을 들어 매만지자 단박에 염소수염을 단 익숙한 얼굴이 뻔뻔한 표정을 그려냈다.

“어쩌겠나. 이리되었으니 토황패를 찾으러 갈 수밖에.”

“토황패가 없으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그건 그때 가서 의논하세. 정 안 되면 다른 조건으로 협상해야지.”

“그렇다면 노도가 남는 것이 가장 적당하겠소.”

운진은 오히려 반가운 얼굴이었다.

“종 소협. 만에 하나 토황패가 없다면 곧바로 진 대협께 가시오.”

“문주!”

“토황패를 찾으러 가는 곳이 무관이니 종 소협은 반드시 가야 하고, 길을 아는 이는 백면호리이니 노도가 남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외다.”

종무헌의 손을 잡은 운진이 손자를 달래는 조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토황패를 찾아오겠습니다.”

“못 찾는 일이 생긴다면 노도의 당부대로 해주시오.”

종무헌에게 말을 마친 운진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백면호리를 바라보았다.

“잘해주시리라 믿겠소.”

토황패를 못 찾을 경우, 진무린에게 바로 출발하라는 당부였다. 백면호리에게 다짐을 건넨 운진이 주저하는 기색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가 토굴 안으로 들어서자, 절벽에서 폭포수와 같이 흙이 쏟아졌고, 물이 솟듯이 흙이 치솟아 구덩이를 모두 메웠다.

“서두르세.”

“토황패가 분명 있습니까?”

“가봐야지. 그래서 서두르자는 게 아닌가?”

“이부대공은 뭡니까?”

“지금 그게 급한가, 토황패를 찾아 문주를 구하는 게 급한가?”

표정을 바꾼 백면호리의 독촉에 종무헌은 절벽을 노려보았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문주.”

각오를 전한 종무헌이 출발하자는 것처럼 백면호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합락궁의 정상은 진무린이 말했던 대로 움푹 들어간 분지였다. 

전체적인 모양은 표주박과 비슷한데 손잡이 쪽이 기울어서 빗물이 고이지 않는 천혜의 장소이기도 했다.

진무린과 모려원이 내려서자 2층 전각의 좌우 건물에서 마흔 명쯤 되는 여인들이 여유로운 태도로 걸어 나왔다.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들은 앞에서 상대했던 어린 여인들보다 농염하고 관능적인 눈빛으로 진무린과 모려원을 살폈다.

띠리링.

비파음이 짧게 울린 다음이었다.

춤사위처럼 몸을 움직인 여인들이 두 줄로 늘어섰고, 그 뒤에 2층 전각의 문이 열렸다.

원예가 사용하는 의자만큼이나 커다란 의자에 앉은 여인은 몸을 옆으로 틀어 비스듬히 누운 자세였다.

의상은 아래에 있던 어린 여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주요 부위가 거의 드러난 모습이었다.

“본궁은 보는 것과 같이 제자들의 의복이 강호와 달라요. 그런 이유로 금남의 장소로 지정하였는데 대협은 참으로 무례하군요.”

“은천문에서 온 진무린이오. 이쪽은 사매인 모려원이오.”

비스듬히 앉은 궁주가 힐끔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진 대협과 모 소저가 이곳을 찾은 이유가 혹시 보양진서를 원해서인가요?”

“그렇소.”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궁주가 진무린과 모려원을 향해 몸을 돌린 뒤에 다리를 꼬았다.

“드리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시오.”

궁주는 먼저 모려원을 한 번 본 뒤에 묘한 미소를 그려냈다.

“진 대협이 나와 하룻밤을 지낸 뒤에 가져가세요.”

분명 들어주기 거북한 조건을 내세우리라 짐작했던 참이라 진무린은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궁주. 내가 보양진서를 달라 하는 것은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강호의 평화를 지키고자 함이오. 이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 돌이키지 못할 일이 발생한다면 이곳 또한 명맥을 유지하기 어렵소.”

“그건 진 대협이 걱정할 일이 아닌 듯하오만.”

“궁주 또한 보양진서를 피로 얻은 것으로 아오. 정도맹이 삼보를 찾는 일 자체를 금했기에 지금까지 무사했던 것이지, 지금처럼 풀어놓는다면 더는 견디기 어려울 것이오.”

“그깟 침입자 정도는 감당할 거예요.”

“나와 같은 무인이 강호에는 적지 않소.”

“그런가요?”

비웃음을 가득 올린 궁주가 손목을 꺾어 턱을 괴고는 잠시 진무린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하죠. 앞에 있는 본궁의 제자들이 펼치는 미혼진을 견딘다면 보양진서를 드리죠. 단, 내공을 일으켜도 안 되고, 검을 꺼내서도 안 돼요.”

이런 엉뚱한 제안이 있을까.

진무린의 속을 읽겠다는 것처럼 궁주는 턱을 괸 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사매 분이 보는 앞에서 의지를 드러낼 자신이 있나요? 나는 아직 그런 사내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내가 말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의지로 미혼진을 이겨낸다면 보양진서를 드리죠. 어때요?”

진무린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내공을 일으키지 않고 진법을 상대하라는 것에 숨겨진 함정을 짐작하기 어려워서였다.

궁주와 그 앞에 늘어선 여인들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진무린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궁주는 알지 못하니 설명해 드리겠소.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기운이 일어나는 단계라 아무리 약조를 한다 해도 기운을 누를 방법이 없소.”

“피하는 건가요?”

궁주가 빈정거리는 투로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대사형께 무슨 망발이냐!”

모려원이 쩌렁하는 고함을 터트렸다.

이미 등룡창천을 깨달은 모려원의 내공이 터지자 전각의 기와가 들썩였고, 문이 흔들렸으며, 앞에 선 여인들의 표정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정도맹이 이미 삼보를 찾는 일을 허락하였으니 오늘 나는 반드시 뜻을 이루겠다!”

스응.

모려원은 거침없이 검을 꺼냈다.

“나조차 감당하지 못하면서 보양진서를 지킬 수 있다는 헛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내가 나설 테니 어디 미혼진이 얼마나 잘난 것인지 보여 봐!”

모려원이 연달아 내공을 담아 꾸짖자 산이 메아리를 토해냈고, 결국 앞에 선 제자들이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흥!”

코웃음을 뱉은 궁주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어 검지를 튕겼다.

쉬이이이익!

반지 안에 담겨있던 가느다란 쇠침이 모려원을 향해 날아들었다.

쉐에엑! 카앙!

쇠침을 검으로 때려낸 모려원이 앞으로 달렸고, 궁주가 단박에 의자를 박차고 나와 전각 앞에 떨어졌다.

그 직후에 사십여 명의 여인이 모려원을 둘러쌌다.

궁주는 양손 검지를 튕겨 쇠침을 쏘아대고, 사십여 명의 여인들은 빙빙 돌며 모려원의 틈을 노렸다.

쉐엑! 쉑! 쉑! 쉐엑!

모려원은 침착하게 초식을 펼쳐 달려드는 여인을 밀쳐냈고, 그 중간마다 궁주를 노리고 검을 뻗었다.

여기에서 진무린이 가세하면 승패를 단숨에 결정짓겠으나 그리해서는 보양진서를 찾기 어렵다.

적어도 이 싸움까지는 인내하리라.

만약 모려원이 승리했는데도 다른 소리를 한다면 그때는 진정 힘을 보여주겠다.

마음을 정한 진무린은 묵묵하게 모려원과 합락궁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쉐에에엑! 쉑! 쉐엑!

단아한 모려원과 음탕하고 천박한 복장을 한 마흔한 명의 대결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악녀들을 꾸짖는 것처럼 보였다.

미혼진이라면 분명 숨겨놓은 한 수가 있을 텐데?

진무린이 눈빛을 가라앉힌 채 지켜볼 때였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향기가 전각 앞을 뒤덮듯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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