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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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68화
은천검제
제168화
하루를 꼬박 달린 진무린은 모려원과 함께 객잔이 보이는 언덕에 내려섰다.
“힘들겠지만, 저녁을 해결하고 밤에도 달릴 생각이다.”
“운기할 시간만 주세요.”
고작 운기할 시간을 달라는 요구를 해놓고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모려원은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빛나고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대사형. 그런데 여기가 어디쯤이에요?”
“섬서를 지났으니까 내일 아침이면 합락궁에 도착할 거다.”
이토록 빨리 이동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모려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새 달릴 테고, 내일 오전이면 합락궁에 도착하는 터라 저녁만큼은 제대로 먹는 것이 좋았다.
진무린과 모려원이 객잔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달려들었다.
시선은 먼저 손에 든 검을 살폈고, 이어 모려원의 미모를 확인했다가 마지막으로 진무린의 위아래를 훑었다.
경계를 넘는 객잔이 늘 그렇듯,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라고 해야 가운데 있는 두 개 탁자밖에 없어서 진무린은 그중 왼편에 앉았다.
“잘하는 요리 세 가지와 소면, 밥을 다오. 술은 괜찮으니 따듯한 차가 있으면 넉넉하게 부탁한다.”
점소이가 주방으로 향한 다음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무인 셋이 이쪽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모려원에게 번갈아 꽂히는 것을 본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통에 담긴 젓가락을 꺼냈다.
저들 따위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소면을 한 젓가락 먹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기가 시기인 만큼 굳이 일이 벌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먼저 차단하는 것이 현명했다.
세 사람의 시선을 알아차린 모려원이 눈에 냉기를 담을 때, 진무린은 젓가락을 세워 탁자에 차례대로 꽂았다.
물결처럼 진무린의 탁자를 중심으로 침묵이 퍼져나갔다.
‘대사형?’
‘이런 게 좋아. 굳이 일을 만들 필요 없잖아.’
진무린은 다섯 개의 젓가락을 일정하게 꽂은 뒤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무기를 감춘 세 사람은 탁자에 떨어진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진무린을 향해 모려원이 생긋 웃었다.
‘효과가 탁월하네요?’
“서둘러 먹고 빨리 나가면 더욱 좋겠지.”
모려원의 눈빛에 진무린이 음성으로 답을 했다.
총관은 그 말을 음식이 느리게 나온다는 타박으로 들은 모양이었다.
그가 바쁜 걸음으로 주방으로 달려가는 모양새가 그랬다.
**
함께 싸워 명예롭게 죽겠다는 제자들을 임운령과 전도위가 매섭게 꾸짖고 나서야 수련동으로 피하는 과정을 정했다.
먼저 노약자와 여성을 제자들이 맡아 달리는 방법이었다.
양소소는 따로 시간을 내 수련동 앞에 진법을 설치하기 위해 애썼고, 파천신군과 나탑사는 엄소동에게 진중탈구검을 배우느라 한 시진을 보냈다.
임운령과 전도위는 7층에 있는 집무실에서 제자들이 수련동으로 피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능력도 부족했지만, 문주의 직책을 맡지 않은 것이 이렇게 감사한 적은 처음이오.”
침묵으로 일관하던 전도위는 여유를 어느 정도 되찾은 음성이었다.
슬쩍 돌아보는 임운령을 향해 전도위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문주의 결단에 경의를 표하오.”
“죽어서 본문의 어른들을 어찌 뵐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함께 갈 테니 내가 엎드려서라도 잘 말씀드려보겠소.”
“힘이 됩니다.”
별것 아닌 임운령의 대꾸에 웃음이 터진 전도위는 기가 막힌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다음이었다.
곧바로 임운령까지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두 사람은 한참을 미친 사람들처럼 웃고 또 웃었다.
“흐하하하! 흐하하!”
무엇이 그리 웃긴지, 왜 그렇게 웃음이 터지는지는 몰랐다.
은천문의 암울한 미래와 희생된 제자들을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기도 했다.
결국, 눈물이 맺히도록 웃고 난 뒤에야 두 사람은 겨우 커다란 숨을 내쉬며 진정할 수 있었다.
“문주를 모실 수 있었음에 감사하오. 무린이와 려아를 가르친 인연에 감사하오. 그리고 본문의 사람으로 생을 마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오.”
전도위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 것처럼 후련한 눈빛이었다.
“이미 한 번 적을 상대해본 경험에 진중탈구검마저 담았으니 쉽게 쓰러지지는 않을 게요.”
“전 사부께서 계셔 든든했습니다. 지난 원 장로와 백 장로의 일에도 본문이 이리 견딜 수 있었던 것이 전 사부의 덕이고, 무린이와 려아가 등룡창천을 깨달은 것 역시 전 사부께서 계셔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임운령이 양손을 잡아 예를 표하자 전도위가 비슷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문주와 대사부가 서로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바깥에 펼쳐진 은천문의 노을이 창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
종무헌 역시 객잔에 들었다.
오전과 점심을 귀혼곡에서 준비한 만두와 건량으로 해결한 뒤여서 무엇보다 운진과 백면호리에게 제대로 된 식사가 필요했다.
“어서 오십시오.”
“빨리 되는 요리 세 가지, 삶은 소고기 한 근, 그리고 소면과 밥을 줘.”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을 던진 백면호리가 안쪽에 있는 빈 탁자에 앉았다.
이곳 또한 무인들이 있었는데 눈썹이 올라선 종무헌의 시선을 받고는 바로 고개를 떨궜다.
“얼마나 더 달려야 하오?”
“내일 오후면 도착할 거요.”
운진이 나직하게 낸 질문을 백면호리가 냉큼 받은 다음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백면호리가 은근한 음성으로 종무헌에게 말을 건넸다.
“평소보다 무인이 많아. 어디에선가 일이 있다는 의미거든. 뭔지 한번 알아볼까?”
“괜히 얽혔다가 시간이 지체되면 대사형을 뵐 낯이 없습니다.”
“그냥 알아만 보는 건데?”
종무헌의 답은 좀 더 치켜 올라가는 눈썹이었다.
“종 소협은 너무 직선적이야.”
백면호리가 툴툴대는 것을 알아챈 것처럼 요리가 나왔다.
**
저녁을 든든하게 먹은 진무린과 모려원은 이각쯤 길을 따라 걸었다. 경공을 펼치든, 운기를 하든 잠시의 틈이 필요한 까닭이었다.
진무린은 배려했고, 모려원은 짐이 되지 않으려 애썼다.
고작 이각을 걷는 걸음에서도 말이다.
고개를 돌린 진무린을 향해 모려원이 빛나는 눈빛으로 미소를 그려내기도 했다.
곁을 걸어주는 모려원의 머리를 쓸어주고 싶은 심정에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왜 웃으세요?”
“사매를 보고 있는 것이 좋아서.”
모려원이 장난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좀 더 일찍 이런 감정을 비쳤다면 더 좋았을까.
진무린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더 늦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또한, 서로의 마음을 아는 상태에서 벽계라는 고비를 함께 상대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대사형. 이 고비가 끝나면 우리 강호를 일주해요.”
“사제는 어쩔까.”
“빠지라고 하면 서운해 하겠죠?”
“눈썹이 이렇게 올라가겠지?”
진무린이 검지와 중지를 세워 눈 위로 올리자 모려원이 유쾌하게 웃었다.
“눈썹이 무서워서 함께해야겠어요.”
“그래. 셋이서 강호를 유람하자.”
답을 건넨 진무린은 멀리 있는 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전에 벽계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한다.
“이제 달려야 하겠다.”
“예, 대사형.”
잠깐의 휴식을 끝으로 진무린이 발을 굴렀고, 모려원이 곧바로 뒤를 따랐다.
합락궁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속도를 높이자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옷자락이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펄럭였다.
검에 새겨진 용도 손에 담을 것이다.
진무린은 뒤따르는 모려원을 살핀 뒤에 좀 더 속도를 끌어올렸다.
벽계를 반드시 멸할 것이다.
진무린이 의지를 다진 직후였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달의 중간에 진무린과 모려원의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
식사를 마치고도 종무헌은 반 시진을 쉬어야 했다.
먼저 운진이 아무래도 육체적인 한계를 만나 힘겨워했고, 다음으로 운기를 제대로 못 하는 백면호리 또한 볼이 핼쑥할 정도로 지쳐 있어서 최소한의 휴식이 필요했다.
“종 소협은 유광을 가 본 적이 있어?”
“말로만 들었습니다.”
산의 중턱에 앉은 상태에서 백면호리가 화제를 꺼냈다.
“유광은 말이지. 황토색 절벽에 동굴이 끝도 없이 박혔어. 그 안이 또 이리저리 연결되었거든. 잘못 들어가면 출구를 못 찾아서 갇혀 죽고, 그렇다고 벽을 무너트리면 흙더미에 파묻혀 죽어.”
운기를 하고 싶었으나 들어두어서 나쁠 것 없는 이야기라 종무헌은 잠자코 백면호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백면호리께서는 그곳에 들러보신 경험이 있소?”
“그것이 말이지…….”
무언가 켕기는 얼굴로 백면호리가 운을 뗐다.
“유광에 토황패라는 것이 있거든.”
“혹시 그것을 손댔소?”
운진답지 않은 빠른 질문을 백면호리는 부인하지 못했다.
얼핏 듣기에도 토굴에서 사는 이들에게 꽤 신성시되는 기물의 이름이라 종무헌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백면호리의 답을 기다렸다.
“그곳에서 장자를 잃은 문호방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지. 침범한 것도 아니고, 하필 유광의 공주라는 여자를 사모해 찾아간 것인데 토굴에 들어가서 묻혀 죽는 바람에…….”
“그래서 토황패라는 것은 아직 문호방에 있습니까?”
“있겠지.”
“한을 풀었다는 것을 보면 부쉈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건 아니고. 장자를 잃었으니 유광도 그만큼 중요한 것을 빼앗겨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만.”
백면호리의 설명을 듣던 종무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청부는 절대 받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내가 지금껏 살면서 청부만큼은 거부했었지.”
“그런데 왜 유광의 토황패를 손대셨습니까?”
“에효.”
백면호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사연이 복잡해.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홍등가에 들렀다가 마음을 빼앗긴 여자가 있었지 뭔가. 음식을 만드는 여인이었는데 내 평생 처음으로 사람에 빠진 거지.”
밤이고 달빛이 은은해서인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린 백면호리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빌어먹을 돈이 물려서 놔주지를 않는 거야. 돈을 가져다주었지. 그런데 두 번을 더 가져오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문호방을 찾아 부탁했네.”
당시가 떠올랐는지 백면호리는 기운 빠진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문호방이 제법 위엄이 있었어요. 사정을 듣더니 돈은 필요 없다고 하면서 억울하게 죽은 장자의 모습이 떠올라 도와주겠다고 하더군.”
말을 마친 백면호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아를 낳을 때까지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네. 그리고 먼저 갔지. 정아를 남기고 눈을 감을 때 그러더군. 고맙다고. 내가 물었지. 뭐가 고맙냐고. 답이 뭐였는지 짐작하겠소?”
이야기에 흠뻑 빠진 운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만나 정아를 얻고, 함께 지낸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두 번째 돈을 가져왔다가 그냥 돌아갈 때 그것이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는데 포기하지 않고 와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고.”
백면호리의 말이 끝나자 숙연한 분위기가 세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정아에게 무공을 얻을 기회를 준 것이 진 대협이고, 모르던 정을 알려준 사람이 모 소저요, 비무로 실력을 잡아준 것이 종 소협이지. 살면서 이렇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은혜를 받은 것도 처음이었소.”
공감한다는 투로 운진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유광에 들르기 전에 문호방에 먼저 들러보세. 말이 돌지 않는 것을 보면 거기에 아직 토황패가 있을 공산이 높아.”
“그것을 가져간다고 해서 그들이 쉽게 보물을 내놓겠습니까?”
“나를 요구할 수는 있겠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종무헌과 운진을 향해 백면호리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냥 죽을 사람인가. 정아도 있는데? 문주께서 나와 비슷한 형상을 하나 만들어주면 되지 않을까? 그걸 넘겨주고 보물을 받아오면 어때?”
기발한 발상인 것 같았으나 종무헌이 먼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이어 운진이 비슷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뭐가?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유광의 보물을 속임수로 가져온다면 먼저 본문이 비루한 집단이 되고, 다음으로 강호를 구한다는 명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종무헌이 답을 먼저 냈고,
“술법도 마찬가지요. 노도가 근처에 있어야 하고, 그렇다손 쳐도 손을 내밀어 붙잡으면 당장 허상인 것을 알아차릴 게요.”
운진이 안 되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일단 달리면서 고민하겠습니다.”
“벌써?”
반발했던 백면호리가 종무헌의 눈빛에 눌려 몸을 일으켰고, 운진이 종횡주를 다리에 묶었다.
준비가 끝나자 종무헌이 몸을 날렸고, 백면호리와 운진이 뒤를 따랐다.
“그럼 내가 온 의미가 없잖아!”
달리는 도중에 터진 백면호리의 불평이 바람을 타고 급하게 뒤로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