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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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63화
은천검제
제163화
손명은 지닌 내공을 옅게 풀어 은천문의 입구를 살폈다.
이미 오른쪽에서 의심스러운 곳을 발견한 상황이었다.
오른쪽과 연결된 다른 기물을 하나만 발견해도 진법의 절반 이상을 풀어낼 테고, 숨겨진 은천문의 안쪽을 보게 될 일이었다.
반 시진쯤 지난 뒤였다.
“이쪽입니다.”
확신에 찬 음성이 왼편에서 나왔다.
중앙에 서 있던 손명은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보기에도 은천문을 지키는 진법은 대단했다.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진법 저 안쪽에서 누군가가 지켜볼 것이 분명해서 손명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 아래에서 기운이 올라옵니다.”
그는 수하가 가리킨 곳을 빠르게 훑었다.
“기물이 없다는 건가?”
“이곳의 땅이 특별하게 자력을 지닌 것으로 보았습니다.”
수하의 설명에 손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법을 형성하려면 반드시 기운을 묶어둘 기물이 필요한 법인데 은천문은 아예 지형 자체가 그런 특성을 지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자네들 여섯이 오른쪽으로 가게.”
수하 여섯은 두말하지 않고 손명의 지시에 따라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자네들이 먼저 그쪽에 있는 기물을 부숴. 이후에 내가 이곳의 기운을 흐트러트릴 텐데, 혹시 입구가 드러난다면 말하지 않아도 안으로 들어가기로 하세.”
“대부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답을 들은 손명은 기운을 풀어내 의심스러운 곳을 노려보았다.
‘시작하게.’
손명이 고개를 끄덕인 직후였다.
쉬이이익!
여섯 중 셋이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손을 들어 은천문의 오른쪽을 내리쳤다.
콰으응! 퍼어어억!
여섯 명을 중심으로 바닥이 은은하게 흔들렸고, 흙이 덩어리째 허공으로 치솟았다.
지켜보던 손명은 곧바로 기운을 풀어 바닥에서 올라오는 자력을 감쌌다.
그 직후였다.
은천문의 입구의 공간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안쪽의 모습이 눈에 드러났다.
**
반나절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고작 반 시진 만에 벽계의 일곱 명은 진법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위를 찾아냈고, 이어 파훼했다.
콰으응!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흙덩이가 연달아 치솟았고, 전면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벽계에서 온 일곱 명은 임운령과 전도위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 진이 완벽하게 파훼된 것은 아니었다.
홀로 자력을 막고 있는 벽계의 인물을 흔든다면 은천문은 다시 모습을 감출 것이다.
은천문의 존폐가 걸린 상황이었다.
임운령과 전도위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검을 꺼내 들었다.
‘가장 힘겨운 적을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소.’
눈빛을 교환을 두 사람이 은천문의 입구를 향해 몸을 달렸고, 검을 꺼내 든 제자들이 물결처럼 그 뒤를 따랐다.
이미 약속된 일이었다.
전도위는 홀로 자력을 막고 있는 손명을 향해 날았고, 임운령은 여섯이 몰려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더 가리고 감출 것이 있을까.
임운령은 망설임 없이 은천수호검을 펼쳤다.
쉐에에엑! 카아앙!
여섯 명 중 한 명이 임운령의 검을 받았고, 대부라 불리던 한 명에게 전도위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제자들이 일곱 명을 촘촘히 둘러쌌다.
곧바로 혈전이 벌어졌다.
말벌 여섯 마리를 맞은 꿀벌의 대응이 이럴까.
수적으로 우위를 점한 은천문의 제자들은 벽계의 인물 넷을 상대로 악착같이 검을 뻗었으나 펼쳐진 장면은 처절했다.
검진이라 부를 것이 없는 은천문이었다.
그러나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를 대비한 수련은 있어서 익힌 대로 벽계의 인물들을 향해 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강호의 그 어떤 문파와 비교해도 월등히 뛰어난 은천문의 제자들이었다.
쉬익! 카가강! 쉭! 퍼어억!
그런데도 벽계의 인물이 휘두른 손짓 하나에 세 명의 검이 튀어나갔고, 그 뒤에서 한 명은 가슴을 얻어맞아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다고 물러설 줄 아느냐!
동료가 쓰러져도, 벽계의 인물이 휘두른 손이 가슴을 노려도 달려들기를 주저하는 제자는 없었다.
**
운기를 마친 엄소동은 양소소와 함께 은천문으로 향했다.
이 각쯤 달린 뒤였다.
은소소는 그제야 엄소동이 말했던 기운의 일부를 느꼈다.
‘문주!’
기운을 느끼는 순간, 양소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와 동시에 위기를 맞았을 은천문과 임운령을 떠올렸다.
‘감히 본문을 노린단 말이냐! 비록 부족한 아녀자일지라도 오늘 나는 너희와 마지막을 함께하겠다!’
무섭게 달리는 엄소동의 경공에 몸을 맡긴 상태에서 양소소는 최후를 각오했다.
“기운을 누르게.”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엄소동의 나직한 음성이 귀를 스치는 바람결을 타고 들렸다.
“말린다고 듣지 않을 테니 다른 말을 하지는 않겠네. 다만, 적을 만나기 전에는 기운을 누르는 것이 좋아.”
엄소동의 말을 들으며 양소소는 깨닫는 것이 있었다.
저런 기운을 지닌 인물이 여럿이라면 엄소동 홀로 견디기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죽음을 각오했구나!’
왜 엄소동이 마지막이라는 듯 하늘을 바라보았는지 양소소는 분명하게 알았다.
강호일통을 바랐나?
구대문파와 정도맹의 굴복을 요구했나?
은천문과 엄소동 모두 문파나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다.
강호의 평화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면,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했다면 얼마든지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었다.
엄소동의 조언이 있었으나 양소소는 올라오는 울분을 누르지 못해 다시 기운을 뻗쳐내고 말았다.
나무가 홱홱 지나가고, 머리칼과 옷자락이 사정없이 뒤로 흔들리는 가운데 엄소동의 기운이 양소소를 더욱 강하게 덮었다.
곧 대결을 앞둔 이였다.
누구보다 벽계의 인물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할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무섭게 경공을 펼치는 가운데 양소소를 위해 기운을 나눠주고 있었다.
“시련은 의지를 강하게 하는 도구일세. 과정이 힘겨워 잠시 쉴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말게. 시련 따위에 사명을 버린다면 나나 은천문의 존재가 너무 가볍지 않은가.”
은천문의 사명이 강호의 평화였던가.
엄소동의 조언이 양소소의 가슴을 잔잔하게 울렸다.
그런 다음이었다.
감정을 추스른 양소소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헛되이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왔던 지난 시절보다 은천문과 강호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달리는 이 길이 백 배는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슬쩍 시선을 돌렸을 때, 엄소동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
촌각이 급한 상황이었다.
기혈이 엉킨 모려원은 비통한 심정으로 진무린을 바라보았다.
경공을 펼친다고 해도 한 시진 거리라면 가는 도중에 피를 토할 테고, 결국 진무린과 은천문에 짐이 될 것을 짐작한 탓이었다.
“대사형. 가세요.”
모려원은 비통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음성으로 뜻을 전했다.
“가셔서 소매의 몫까지 저들을 벌해주세요.”
모려원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작정한 것처럼 진무린은 모려원에게 다가섰다.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지금 모려원의 앞에 서 있는 진무린의 숨결과 눈매가 살아서 보는 마지막 모습일 수 있었다.
모려원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처럼 진무린은 옅게 웃었다.
“사매. 홀로 남아 있을 자신 있어? 나는 없다.”
“대사형?”
“함께 가겠다. 홀로 남아 고통스러운 것보다 함께 본문을 지키는 것이 훨씬 낫다고 여긴다.”
“소매는 짐이 돼요. 본문과 대사형께 짐이 될 뿐이라고요.”
모려원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진무린은 팔을 뻗어 모려원의 허리를 부드럽게 안았다.
당황한 모려원의 허리를 당긴 진무린은 바닥을 힘껏 박찼다.
곧바로 몸이 허공에 떴고, 이어 귓가로 바람 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대사형!’
모려원은 놀라 진무린을 돌아보았다.
바닥이 접히는 것처럼 달려오고, 그만큼 주변이 뒤로 휙휙 지나는데 그 가운데 엄청난 공력이 모려원의 몸을 다독이고 있었다.
“운기를 해라.”
“대사형! 소매 때문에 이리 무리하시면…….”
“본문은 반드시 지킨다. 그러니 운기를 해서 몸을 되돌려라.”
이 정도였던가.
달리는 중에 공력을 전해주는 것도 믿기지 않을 판국에 진무린에게서 넘어오는 기운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검에 새겨진 고어와 용의 형상이 의미하는 무공, 이것이 등룡창천의 본 모습이다.”
모려원의 염려를 알아챈 것처럼 진무린은 지금 발휘하는 힘을 설명해주었다.
달리는 속도가 대단한 만큼 눈이 아플 정도로 바람이 달려들었고, 머리칼과 옷자락이 사정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앞을 노려보던 진무린이 짧게 시선을 주었다.
은천문의 과거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눈빛이었다.
이런 눈빛일 때 진무린은 무섭다.
해내고 만다. 아무리 큰 어려움과 힘겨움이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반드시 해낼 테다.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신 모려원은 허리를 안은 진무린의 손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세상이 그녀를 감싼 느낌이었고, 진무린의 손을 통해 허리와 손으로 엄청난 공력이 몰려들었다.
모려원은 운기를 위해 눈을 감았다.
한 시진쯤 걸린다고 했다.
눈을 떴을 때는 내상을 치유했을 테고, 더 높은 경지를 얻으리라.
다짐을 마친 모려원은 호흡을 고른 후에 운기에 들었다.
달리는 와중에 운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고, 주화입마에 들고자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는 누구도 가능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모려원은 허리를 감싸 안은 진무린의 손을 믿었다.
그녀의 대사형이고, 마음에 담은 유일한 남자 진무린의 의지와 뜻을 의심할 이유 따위 모려원에게는 없었다.
**
은천문 제자들의 의지와 뜻은 명확했고,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쉐에엑!
전도위가 검을 낸 뒤에는 마치 순서를 다투는 것처럼 손명을 향해 제자들이 달려들었다.
쉬익! 퍼억! 쉬이익! 퍼버벅!
손명의 손은 날카롭고 잔인하며 일말의 자비조차 담지 않아서 단번에 두셋의 제자들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았다.
쉐에엑! 카앙! 쉐에엑! 카아앙!
전도위의 검은 확실히 손명의 손날에 밀리는 것이 분명했다.
아지랑이가 피어난 손명의 손에 담긴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도 확연했다.
튀어나간 전도위의 검 사이로 손명의 손이 불쑥 들어오는데 알아보기도 힘든 그 순간이 바로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리라는 것을 손명도, 전도위도, 제자들도 모두 알았다.
어쩔까.
제자들은 전도위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단 한 번의 검을 내기 위해 그 손날에 몸을 던졌다.
‘비켜라!’
전도위의 눈이, 기운이, 표정이 제자들을 말렸으나,
‘대사부! 부디 본문을 지켜주십시오!’
제자들이 달려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쉐에에에엑! 쉐엑!
당연하게 전도위는 지닌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검에 담았다.
그는 최근 깨달은 묘리마저 아낌없이 뿌렸는데 불행하게 손명이 한 수 위인 것만은 분명했다.
쉐에에엑! 쉬익!
전도위의 검이 날아가고, 혹여라도 빈틈이 생길라치면 어김없이 손명의 손이 파고들었으며, 그럴 때마다 제자들이 달려들었다.
말벌을 감싸는 꿀벌처럼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뛰어드는 제자들의 모습은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쉐에에에엑! 쉐엑!
임운령의 상황은 더욱 절박했다.
여섯 중 하나를 임운령이 맞았는데 은천수호검을 발휘하면서 그는 동수를 이루었다.
문제는 남은 다섯을 맡은 제자들이었다.
쉬익! 퍼억! 쉬이익! 카가강!
다섯은 아예 제자들을 농락하듯 움직였고, 검을 때려냈으며, 가슴과 목에 잔인하게 손을 찔러넣었다.
몸을 눕혀 허공으로 떠오른 제자 아래로 다른 제자가 검을 찔러 넣었는데, 손을 위아래로 뻗은 한 수에 둘 모두 뒤로 길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마교의 폭렬공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사용했을 상황이고, 누구라도 목숨을 내놓는 대가로 저들 중 한 명이라도 쓰러트릴 수 있다면 당장 임운령이 먼저 자원할 정도로 위급한 순간이었다.
‘못난 문주를 용서해라!’
검을 휘두르는 임운령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최악의 순간이 오면 동귀어진의 수법을 발휘해서라도 한 명쯤 데리고 죽을 각오였다.
손명이 전도위를 상대하느라 이미 은천문 앞의 진법이 돌아왔다.
‘저놈만 제거한다면!’
피를 토한 채 쓰러진 제자들을 앞에서 검을 휘두르며 임운령은 손명을 노렸다.
손명만 제거한다면 다만 하루라도 진법은 유지될 테고, 은천문의 명맥을 유지할 제자 한 명이라도 몸을 피할 시간쯤 충분히 벌어줄 것이다.
쉐엑! 쉑! 쉐에엑!
은천수호검을 발휘하며 임운령은 전도위의 검이 회수되는 순간을 노렸다.
‘함께 가자! 나는 이렇게라도 본문을 지킬 것이다!’
쉐에에에엑!
매섭게 검을 휘두른 임운령이 자세를 낮추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임운령마저 가슴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내공을 담은 고함이 은천문 입구를 뒤흔들었다.
쉐엑! 쉑!
임운령과 전도위가 얼른 뒤로 물러났고, 벽계의 인물들도 자세를 풀며 더는 나서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기에 이런 내공을 보인단 말인가.
구주가 등장하는가.
임운령이 서둘러 시선을 들었을 때였다.
퍼러럭!
요란한 옷자락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진무린이 바닥에 내려섰다.
“제자가 문주와 대사부를 뵙습니다.”
그와 함께 내린 모려원도 고개를 돌렸다.
“제자가 문주와 대사부를 뵈어요.”
인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쓰러진 제자들을 돌아본 진무린이 손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으으으응.
임운령과 전도위, 제자들은 말할 것 없고, 벽계의 무인마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진무린이 분노하는 순간 바닥이 옅게 흔들렸고, 몸 전체에서 죽음의 전조처럼 묵빛 기운이 진하게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