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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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3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59화
은천검제
제159화
생사현관이 타통되는 고통에서도 모려원은 의식을 놓치지 않았다.
이 기회를 어떻게 놓치랴.
모려원의 혈도를 다독인 진무린은 중단전에 기운을 심었고, 이어 상단전을 개방하는 과정을 두 번이나 거쳤다.
생사현관을 타통한 이들의 공통점은 피부에서 윤기가 흐르고, 기력이 올라오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는 의식을 잃는 사이 몸이 알아서 회복하는 과정 덕분이었다.
의식을 악착같이 붙든 덕분에 바로 중단전과 상단전마저 개방한 모려원은 체력의 한계를 느꼈는지 마지막 순간에 몸이 흔들렸다.
‘잘 견뎠다, 사매.’
진무린이 손을 떼는 순간이었다.
휘청, 하고 흔들린 모려원의 상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넘어왔다.
진무린은 모려원의 상체를 받아 왼편 팔에 눕혔다.
“대사형.”
그녀의 눈이 결과를 묻고 있었다.
“잘 견뎠다. 중단전에 기운을 심었고, 상단전을 열어두었으니 조만간 등룡창천을 검기로 뿌려낼 수 있을 거다.”
“감사해요, 대사형.”
“덕분에 이리 사매를 안아볼 수도 있지 않으냐.”
지치고 힘겨운 와중에도 모려원은 눈가에 미소를 그렸다.
지금껏 수없이 보았건만, 지금 모려원이 보여준 미소가 어찌나 아름답고 빛나는지 진무린의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모려원은 쏟아지는 잠을 이기려는 사람처럼 억지로 눈을 뜨며 버텼다. 안아주는 진무린의 모습을 영원히 눈에 담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내게 맡기고 잠시 쉬어.”
모려원을 잠시라도 더 품에 안고 싶어 권했는지 모른다.
더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대사형.”
스르륵 눈을 감은 그녀가 진무린의 품에서 잠든 것처럼 의식을 놓았다.
이때를 기다렸을까.
그녀의 몸 안에서 일어난 기운이 급류처럼 혈도를 타고 달렸고, 이어 땀을 비 오듯 흘렸다.
진무린은 오른손을 들어 이마에 붙은 모려원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감정을 들킬까 무던히도 조심했었다.
언젠가 운진이 모려원에게 했던 질문을 어찌 진무린이 못 들었겠나.
기억을 잃은 사매를 찾아 관도를 걸을 때, 유운 객잔 앞에서 사매의 기운을 느꼈을 때, 검에 어깨를 찔렸을 때, 그리고 귀혼곡에서 술법을 마저 풀어내지 못했을 때, 가장 앞선 것은 사매 모려원에 대한 염려였다.
양소소의 슬픔과 그 오랜 시간의 외로움을 아는 진무린은 더더욱 감정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이 어려움을 모두 떨치고 나면.
진무린은 손을 뒤집어 모려원의 이마와 볼을 닦았다.
금강석을 흩뿌린 듯 반짝이는 별들과 은색 달빛이 진무린과 모려원을 안타깝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
자시의 중간에 황종관은 한때 흑사련 호북 지부였던 장소에 들어섰다.
흑사련과 마등을 묶어두었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운 현재는 정도맹의 상등 지부로 이름을 바꾸었고, 무인 넷이 지키고 있었다.
한밤중에 들어선 맹주 황종관의 모습에 놀란 정도맹 소속 무인들이 부랴부랴 횃불을 밝혔는데 그 외에 필요한 준비는 황종관과 함께 온 정도맹의 금령단과 황가의 가신들이 모두 처리했다.
“교주는?”
“민가에서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다른 일은?”
“모산의 문주가 술법을 부린 듯하나 일의 과정을 저희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솔직한 대답에 황종관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밝는 대로 민가를 방문하겠다. 먼 길을 왔으니 오늘은 이만 쉬어.”
황종관의 지시를 받은 금령단과 황가의 가신들이 각자 숙소를 정해 들었다.
횃불이 피어오르는 마당에서 황종관은 잠시 홍화루가 있는 방향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홍화루는 잠들지 않은 시간이었다.
원예를 찾아가면 능히 지난 일들을 들을 수 있으리라.
고민하던 황종관은 도를 의자의 곁에 기대놓고 숨을 골랐다.
당장 움직이는 것보다 날이 밝기 전에 운기를 해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에서였다.
**
날이 밝기 직전의 여명 속에서 모려원은 의식을 차렸다.
그녀는 먼저 진무린의 품인 것을 알았고, 설마 하며 시선을 들었다가 눈이 마주쳤다.
일어나려는 모려원을 진무린은 놓아주지 않았다.
“대사형?”
“이대로 조금만 더 있자.”
밤새 이러고 있었을 텐데.
“무겁지 않으세요?”
진무린의 대답은 보기 좋은 미소였다.
“이렇게 함께 새로운 날을 맞고 싶었다. 언젠가 이 고비를 모두 털어내고 나면 그때는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함께 아침을 맞자.”
진무린이 시선을 들었고, 모려원이 그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굳이 말을 해서 무얼 하겠나.
상체를 감싼 진무린의 오른팔에 모려원은 왼손을 얹었다.
새로운 날의 태양이 강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
날이 밝기 무섭게 민가에 들이닥친 손님은 백면호리와 요정이었다.
“어이, 힘들다.”
요정을 내려놓은 백면호리가 대청문을 열었다가 화드득 경공을 발휘해 뒤로 날았다.
탁자에 앉은 운진의 맞은편에서 정체를 알기 어려운 남자가 매서운 눈매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섭게 생겼다는 것보다 문을 열 때까지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백면호리는 더 두려웠다.
“어서 오시오.”
“누구신지?”
운진이 건넨 인사의 끝을 문 것처럼 백면호리는 눈짓으로 정동추를 가리켰다.
“마교의…….”
정동추의 눈꼬리가 단박에 고리처럼 휘자 운진이 얼른 헛기침을 뱉으며 표정을 바꾸었다.
“신교의 교주되시오.”
“히엑!”
“저건 뭐하는 물건인가?”
“백면호리라 하오.”
“흐음.”
정동추는 금방이라도 머리를 깨물 것 같은 호랑이의 눈매로 백면호리를 노려보았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너는 이름이 어찌 되는고?”
“요정이에요. 요정이 교주를 뵈어요.”
요정은 앙증맞은 손을 맞잡고서 정동추에게 인사했다.
“오호라. 소수마공을 어찌 익혔지?”
정동추의 눈매가 어찌나 매서운지 백면호리가 조심스럽게 움직여 그 앞을 가렸다.
“소녀는 소수음공을 익혔어요.”
“소수음공?”
“예.”
“이리 와봐라.”
급작스럽게 나온 정동추의 요구에 백면호리는 입도 열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 내가 강호에서 살인을 너무 자제한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오랜만에 피를 한 번 볼까?”
정동추의 눈매가 독하게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며 황종관이 들어섰다.
기회를 잡은 백면호리가 요정을 데리고 한쪽으로 피했고, 몸을 일으킨 정동추와 운진이 황종관을 맞았다.
세 사람이 대청의 탁자에 앉은 다음이었다.
정동추는 문을 향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백면호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본교의 추적을 피할 자신이 있다는 게지?”
옆걸음으로 움직이던 백면호리가 딱 걸음을 멈췄다.
“와 봐라.”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간절하게 보냈으나 황종관은 연유조차 모르는 상태여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할 뿐이었다.
설마 무림맹주가 보는 앞에서 해코지를 할까.
아니지. 달리 마교야? 단숨에 요정의 무공을 망가트릴지 몰라.
심하게 흔들리던 백면호리의 눈이 한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정동추의 눈에 진실로 살기가 오른 탓이었다.
그가 독한 마음을 먹는 순간이면 백면호리나 요정은 손짓 한 번에 세상을 하직하는 수준이었다.
‘맹주만 믿습니다.’
백면호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정도맹에 의지하는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렵게 대청에 도착했는데 속 모르는 요정은 또박또박 걸어 정동추의 앞으로 다가섰다.
“너는 내공의 벽을 만났다. 그 점을 아느냐?”
“종 숙부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어요.”
“종 숙부라니?”
“진 대협의 사제되는 종무헌 소협을 말하나 보오.”
“예, 맞아요.”
운진이 설명에 덧붙여 요정이 얼른 답을 내놓았다.
“눈매가 흉할 정도로 사납더니 그래도 무공을 살피는 눈이 있었나 보구나. 이리 더 가까이 와봐라.”
정동추는 간식거리로 새를 잡은 호랑이처럼 다가선 요정을 앞에 두었다.
황종관이 눈빛을 빛내며 지켜보는 앞이었다.
요정을 돌려세운 정동추는 손바닥으로 목덜미 아래를 강하게 밀쳤다.
‘정아!’
백면호리가 입을 손으로 막은 직후였다.
턱! 터더덕! 턱!
엄지와 검지를 신묘하게 움직인 정동추는 요정의 목덜미에서 허리까지를 번개처럼 찍었다.
삽시간에 얼굴이 하얗게 변한 요정을 정동추는 또 재빨리 돌려세웠다.
“소수마공과 소수음공은 갈래가 같다. 너는 내공의 기본을 익혔으나 혈도를 제대로 뚫지 못했으니 그 점을 잡으면 능히 고비를 넘길 게다.”
하얗게 질린 요정의 낯빛을 보면서도 정동추는 태연했다.
“먼저 이곳으로 기운을 내라.”
턱! 터덕!
정동추는 검지로 요정의 양쪽 가슴 아래를 번갈아 찍었다.
아무리 어리다 하나 여자아이였다.
정도무림에서는 감히 손조차 내밀지 못할 혈도였는데 정동추는 그것 따위, 하는 투로 주저하지 않았다.
“내공을 좀 더 올려.”
정동추의 요구는 매서웠다.
“더! 얼굴이 피처럼 붉어져야 하는데 아직 절반도 올리지 못했다. 무엇이 두려우냐? 강호에 무공을 익혀 나섰는데 어리다고 봐주고, 여아라서 검이 피한다더냐?”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무공을 제대로 짚어주는 모습인 데다, 황종관마저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터라 백면호리는 대청을 향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더 끌어올리라니까! 사정을 봐주는 비무 따위 잊어라. 경계를 두려워하면서 어찌 발전을 바랄까.”
어깨가 움찔한 요정의 낯빛이 삽시간에 붉어지더니 금방 피처럼 붉어졌다.
터억! 턱!
정동추의 손은 멈추지 않아서 이번에는 양쪽 어깨 아래를 빠르게 찍었다.
“이리 기운을 올려라.”
이번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후, 일각에 걸쳐 정동추는 요정의 상체를 찍으며 기운을 인도했다.
터어억!
정동추가 요정의 목덜미 아래를 손바닥으로 세게 밀친 다음이었다.
“푸욱!”
요정이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당연하게 맞은편에 앉았던 정동추의 앞섶과 다리 위로 피가 튀었는데 그는 상관없다는 투였다.
소매에서 환약 하나를 꺼낸 정동추는 말 한 마디 없이 기름종이를 벗겨 요정의 입에 물려주었다.
“씹지 말고 입에서 녹여라. 그 사이 운기를 해. 서둘러.”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요정을 번쩍 든 정동추는 그대로 옮겨 탁자에 올려놓았다.
“말은 필요 없다. 지금 올린 기운을 단전으로 내린 뒤에 다시 세 번에 걸쳐 익힌 혈도에 돌려.”
무언가 느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요정은 시키는 대로 가부좌를 하고 운기에 들었다.
말릴 틈 없이 시작된 일이었고, 삽시간에 이루어진 과정이었다.
“이리하신 연유를 알고 싶소.”
황종관이 나직하게 건넨 질문에 정동추는 먼저 비릿한 웃음을 내놓았다.
“진 대협이라는 아이가 당장 벽계를 상대할 고수를 만들기 위해 뛰고 있으니 나나 맹주께서는 이번 싸움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미래를 책임질 씨앗을 뿌리는 일에 열중해야 하지 않겠소?”
황종관과 운진, 백면호리가 ‘그렇게 깊은 뜻이?’하는 투로 놀란 다음이었다.
“내가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어야 겨우 벽계의 하수 하나를 감당할 수준이었소. 그러니 앞으로의 싸움에서는 맹주와 내가 힘을 합할 수밖에 없을게요.”
정동추는 눈매를 치켜세운 채 말을 이었다.
“비록 나와 맹주가 저들의 손에 쓰러지고, 진무린과 은천문이 무너지더라도 이 강호는 다시 일어날 게요. 그러기 위해선 이리 재능 있는 아이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전해주어야 하지 않겠소?”
정동추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나직하게 숨을 내쉬는 황종관의 옆에서 손을 맞잡은 백면호리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도망가던 꼴과는 다르구나?”
정동추의 비아냥에 감동이 싹 달아난 백면호리가 입맛을 다시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 그때 진무린과 모려원이 민가로 들어섰다.
“무슨 애정행각을 밤새 나누었기에 냄새마저 이리 요란해? 그 꼴은 또 뭐고?”
재차 비아냥을 던진 정동추가 ‘이건 뭐지?’하는 눈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황종관은 진심으로 놀란 눈을 하고 모려원을 살폈다.
“언제 오셨습니까?”
“어제 늦게 도착해 아침을 기다렸다가 조금 전에 이곳에 왔네. 그나저나 어떻게 된 일인가?”
“사매가 기연을 얻은 터라 밤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생사현관을 타통한 모려원의 기운이 워낙 확연하게 바뀌어 있어서 황종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뜩이나 돋보이던 모려원이 전에 없이 빛나는 미모를 보이는 데다,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냄새마저 풍기니 달리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맹주. 소녀는 의복을 갈아입고 다시 뵐게요.”
“그리하게.”
정동추에게 서운한 눈빛을 잊지 않은 모려원이 시비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진 대협, 나도 왔소.”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백면호리와 짧은 인사를 나눈 진무린은 탁자에 앉아 운기하는 요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미래를 위해 애쓰셨습니까?”
그런 뒤에 마치 정동추의 말을 들은 것처럼 질문을 내놓아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 많은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