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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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57화
은천검제
제157화
소능산에서 생각을 정리한 진무린은 곧바로 민가로 향했다.
벽계를 억누르던 금제가 모두 없어진 마당에 망설일 것도, 감출 것도 없었다.
“대사형?”
“진 대협?”
염려했던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모려원과 운진이 진무린을 맞았다.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모두 아셔야 할 일이 있어서 교주가 있는 방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매는 이안공자를 불러다오.”
진무린은 정동추의 방으로 들어가 잠시 기다렸다.
모려원과 운진, 그리고 이안공자가 들어온 다음이었다.
“구주의 인물 중 엄소동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진무린은 그를 만나 들었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모인 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삼보를 얻는 일을 서둘러야겠구나.”
정동추는 삼보를 통해 대응할 방법을 떠올렸고,
“본문은 괜찮을까요, 대사형?”
모려원은 은천문을 염려했으며,
“네 사람이 노린다니 진 대협께서는 괜찮으시겠소?”
운진은 진무린의 안위를 염려했다.
단 한 사람, 이안공자만은 끝까지 침묵했다.
엄소동의 등장과 그가 한 말이 꽤 충격으로 닿은 눈치였다.
“우선 들은 바를 전해드렸습니다. 제가 얻은 진중탈구검은 교주께서 일어나는 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공이 따르지 못하는 초식 따위 보아서 무얼 할까. 그 일은 급할 것이 없으니 천천히 고민하자.”
“그럼 대청에 있겠습니다.”
“뭐라 해도 당분간은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겠습니다.”
의논을 마친 진무린은 다른 이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진 대협. 저는 방에 있겠습니다.”
“그리하십시오.”
대청으로 나온 이안공자는 끝내 이렇다 할 말 없이 섬도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충격이 꽤 큰 모양이었다.
은천문은 당장 염려할 정도가 아니고, 양소소는 엄소동이 장담하였으니 위험이 다가온다 한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궁금한 것을 해결하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문주.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오전에 납타이를 불러들이는 깃발에 적힌 문자가 어떤 것입니까?”
엉뚱한 질문이라 여겼는지 고개를 갸웃했던 운진이 바로 입을 열었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형상을 표기한 것이라오. 깃발을 네 개 사용하였는데 좌측부터 율율부진, 율사인도, 강조평사, 형과상척이라 적어 기운이 들어올 수는 있되, 나갈 수는 없으리라는 뜻이라오.”
운진은 막힘이 없었다.
“문주. 본문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검에 고어를 새겨줍니다. 본문의 서가에도 그 내용이 없어 현재는 이전의 모양을 따라 새길 뿐인데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 혹시 확인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을 어찌 그리 어렵게 말씀하시오? 기회를 주신다면 성심껏 살펴보겠소.”
대화를 지켜보던 모려원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진무린은 검을 꺼내 운진에게 건넸다.
“보기와는 다르게 무게감이 꽤 있구려.”
“날을 세우지 않았으나 검날은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운진은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왼손 위에 검날을 얹었다.
천천히 문자를 따라 시선을 옮긴 그는 검을 뒤집어 뒷면을 비슷한 태도로 확인했다.
이어 운진은 검자루를 위로 들었고, 다시 거꾸로 들어가며 문자를 확인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은천청검이라는 분이 계시오?”
진무린과 모려원의 고개가 불쑥 들릴 정도로 놀라운 운진의 질문이 있었다.
“본문의 개문조사이십니다.”
답을 들은 운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토록 원형을 유지한 고대의 문자를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운진은 품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이것이 양묘가 찾았다는 술법서요. 언젠가 진 대협께 보여드려 했으나 거절하여 덮어두었던 것이오.”
운진은 책의 앞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색이 변한 종이 위에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가 적혀 있었다.
“비슷하네요, 문주?”
“그렇소. 다만, 검에 새긴 문자가 이 책이 쓰인 것보다 훨씬 오래전 것이 아닌가 싶소.”
내용이 알려질까를 염려한 것처럼 운진은 책을 덮어 품에 넣었다.
“검에 새긴 문구 또한 부적에 문자를 새길 때와 비슷한 방식이라오.”
설명을 마친 운진은 오른손을 들어 검을 잡고 왼손에 검날을 올렸다.
“등룡은 거처를 가리지 않으나 하늘로 향한다. 바람을 따라 움직이며, 운무를 휘감되, 천둥과 벼락을 부를 때면 막힘이 없으리라.”
싯구와 같은 내용을 전해준 운진은 검을 뒤집어 검날을 위로 향하게 들었다.
“태양은 강요하고, 달은 순응하는 법, 기운을 다스린 등룡은 하늘을 열리라.”
내용을 전해준 운진이 검을 공손하게 잡아서 진무린에게 전해주었다.
“적힌 것을 읽어드린 것이오. 워낙 심오하고 난해한 내용이라 노도는 감히 언급조차 하기 어렵소.”
검을 받아든 진무린은 양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문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노도는 그저 읽었을 뿐이오. 부디 진 대협께 도움 되기를 바랄 뿐이오.”
운진이 급히 포권으로 진무린의 인사에 답했다.
진무린은 운진의 말을 되새기는 것처럼 상등의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본문과 사고는 무탈할까?’
아무리 믿는다 해도 염려마저 없어지지는 않았다.
**
하루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기였다.
피음향의 구석에 숨은 심사장으로 물을 지나온 매서운 바람이 달려들었다.
매섭다 해도 절기는 무섭도록 정확해서 그 작은 틈을 비집고 끼어든 봄의 냄새가 바람결에 묻어있었다.
뒤쪽의 밭에서 몸을 일으킨 양소소는 작은 소쿠리에 호미를 담고서 대청을 향해 걸었다.
양소소가 주방의 앞쪽에 소쿠리를 내려놓았을 때였다.
“계시오?”
묵직한 음성이 양소소를 불렀다.
원래대로라면 기운이 먼저 느껴진 후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 맞으련만, 지금 부르는 남자는 음성 뒤에 기운을 풍겼다.
옅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그러나 강렬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날이 좋지 않더니.”
양소소는 소쿠리를 내려놓은 주방 안쪽으로 팔을 넣어 손잡이까지 쇠로 된 낫을 들었다.
“무슨 일로 홀로 사는 여인의 집을 방문하십니까?”
“이미 짐작하는 모양이오?”
“나이 든 여인의 목을 탐내시다니. 취향이 독특하십니다?”
“그것이 어디 취향 탓이겠나. 자네가 선 곳과 내가 몸담은 곳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지.”
“본녀가 서 있는 곳은 은천문의 그늘인데, 객이 몸담은 곳은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벽계일세.”
검을 든 남자가 눈을 치켜뜰 때, 양소소의 눈 역시 아래쪽이 하얗게 빛났다.
“지숙이라 하네. 명을 받아 자네의 목을 가져갈 참이니 너무 원망치 말게.”
“쉽게 드릴 마음이 없으니 본녀의 손이 매섭다 탓하지 마세요.”
안부를 주고받듯 대화가 지나간 뒤였다.
양소소는 외포와 치맛자락을 잡아 오른쪽 허리에 말아 넣었다.
천에서 불어오는 바람과는 별개로 심사장의 안쪽에서 피어난 두 사람의 기운 탓에 낡은 문이 힘겹게 삐걱거렸다.
지숙은 천천히 검을 꺼내 들었다.
평범한 체형이고, 진중한 인상에 수염을 잘 가꾸었는데 검을 꺼내는 별것 아닌 동작을 보며 양소소는 오늘의 방문객을 처리하기 쉽지 않으리라 여겼다.
‘벽계가 이 정도였던가?’
평범한 무인은 알아차리기 어렵겠으나 지숙이 검을 꺼내는 동작은 마치 하나 더 있는 팔을 내놓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강호의 대종사를 보는 느낌이었다.
말대로 쉽게 목을 줄 마음은 없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끌어올린 양 소소가 손에 들린 낫에 기운을 전하는 순간이었다.
후아아악-.
예상하지 못했던 기운을 뿜어낸 지숙이 흐릿해 보일 정도로 빠르게 달려들었다.
쉐에에엑!
곧바로 하늘을 가르는 것처럼 매서운 소리가 울려 나왔고,
쉐엑! 카아앙!
양소소가 사선으로 올려친 낫과 검이 부딪치며 요란한 불꽃과 충돌음이 동시에 터졌다.
쉐엑! 쉑! 쉐에엑!
번쩍번쩍, 하루를 마감하는 햇살을 받아 주홍색으로 빛나는 검과 낫이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데 어찌나 공수가 빠른지 주홍색 반딧불 떼가 두 사람을 뒤덮은 것처럼 보였다.
쉐엑! 쉐엑! 쉑! 쉑쉑!
검은 위엄을 갖췄고, 낫은 화려했다.
낮게 앉은 양소소의 낫을 지숙은 다리를 들어 피했고,
쉐에에엑!
허리를 노리는 지숙의 검을 양소소는 팽이처럼 몸을 돌려 피했다.
이때쯤 지숙과 양소소 모두 알았다.
지숙이 꾸준하게 피워내는 기운이 거미줄처럼 양소소를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한순간, 지숙의 눈이 번득했다.
양소소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쉐엑! 쉑! 쉑쉑!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양소소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맺힌 것이 그 증거였다.
쉐에엑! 쉐엑! 쉐에에엑!
그 직후부터 지숙의 검이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몸에 이상이 생겨 피를 토하거나 쓰러지기 전에 당당하게 목을 자르겠다는 의지처럼 보였다.
‘동정 따위 바라지 않는다. 은천문의 제자로 당당하겠다!’
쉐엑! 쉐에엑!
양소소는 눈에 독기를 담고 지숙에게 달려들었다.
상처라도 남겨 양소소의 이름값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무공은 바람이나 독기로 넘어서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쉐에에에엑!
지숙의 검이 세차게 날았고,
카아앙! 쉑! 퍼억!
검에 담긴 기운을 이기지 못한 양소소의 낫이 매섭게 날아가 대청의 기둥에 박혔다.
“이제 목을 가져가겠네.”
“휴우.”
지숙의 잔인한 통보를 들었음에도 양소소는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넘기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야 뵈러 갑니다.’
그녀는 이미 기울어져 핏빛 여운만 남긴 노을을 향해 작은 미소를 그렸다.
오랜 세월이었다.
어쩌면 이런 날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미소를 그리는 양소소가 의아한 눈치였으나 지숙은 임무를 잊지 않았다는 투로 검을 비틀었다.
양소소의 삶이 끝나려는 찰나였다.
퍼러러러러럭!
지붕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번득하고 양소소의 앞에 엄소동이 내려섰다.
두 걸음을 물러난 지숙이 의아한 듯 고개를 비틀었고, 죽음을 모면한 양소소는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숨을 내쉬었다.
침묵의 끝에서였다.
엄소동을 노려보던 지숙이 확연하게 놀란 투로 입을 열었다.
“구주에서 오셨소?”
“엄소동이라 한다.”
“정검왕?”
엄소동은 고개만 끄덕였다.
“구주가 나섰단 말이오?”
엄소동은 또다시 고개로 답을 대신했다.
팽팽한 긴장의 끝에서 양소소는 나타난 이가 구주의 사람으로 정검왕 엄소동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말로만 듣던 벽계와 구주의 대결이었다.
스으응.
마침내 엄소동이 검을 꺼내 들었다.
쉐엑!
지숙이 독한 표정으로 검을 뿌렸고, 엄소동이 달려들었다.
쉑! 쉐에엑! 쉑! 쉑!
이미 핏빛 노을은 산 아래로 수그러든 시간이었다.
달과 별이 빛을 발하기 전의 어둠 속에서 허공을 가르는 검 소리가 터질 때마다 애꿎은 심사장의 담과 문이 속절없이 뜯기고 갈라졌다.
결정적인 순간이 몇 차례 지난 뒤였다.
쉐에에엑!
이전과 다른 소리가 지숙의 검에서 터지며 어둠 속에서 번쩍 빛이 피어났고,
쉐엑! 쉐에에엑!
그 빛줄기를 향해 엄소동의 검이 세차게 날았다.
소리가 요란한 만큼 이어진 침묵은 깊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크흑.”
검을 늘어트린 엄소동 앞에서 지숙은 주군을 뵙는 수하처럼 바닥에 찍은 검에 의지한 채 왼편 무릎을 꿇어 무너지는 몸을 버티고 있었다.
“과연 정검왕인가.”
지숙은 핏물을 머금은 얼굴을 들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주를 감당하지 못하는 벽계의 한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
입에서 나온 핏물이 방울방울 그의 수염을 타고 떨어지는 사이, 그의 왼편 목에서부터 오른쪽 허리 사이에서 배어 나온 피가 허리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구주와 정검왕이 아니어도 벽계는 이 강호를 차지하지 못한다.”
“그건 어떤……, 이유요?”
천천히 고개를 내린 지숙의 눈이 진심으로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진무린.”
거기까지였다.
더는 버티지 못하겠는지 앞으로 기울어진 지숙의 몸이 털썩, 소리를 내며 마당에 엎어졌다.
지숙의 숨이 끊긴 것을 확인한 엄소동은 몸을 돌렸다.
“은천문이 위험하네.”
인사조차 없이 다짜고짜 전한 말이었다.
“그곳으로 가야 할 텐데 홀로 있을 자네를 벽계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 함께 가세. 당분간은 그곳에 있는 게 좋을 걸세.”
“본문이 위험하다면 먼저 나서세요. 본녀는 잠시 짐을 꾸린 뒤에 출발할까 해요.”
“지병이 있는 게로군.”
지숙보다 조금 더 빠르게 엄소동은 양소소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잠시 고통이 있을 텐데 조금만 견딘다면 훨씬 좋아질 걸세.”
말을 마친 엄소동은 오른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양소소의 왼편 가슴 윗부분을 세차게 때리고 이어 엄지와 검지로 목덜미와 목 아랫부분을 빠르게 눌렀다.
“끄응.”
이를 악문 양소소가 비명을 토해낼 때,
“엄살이 심한 편인가?”
엄소동의 냉정한 평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