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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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56화
은천검제
제156화
모려원은 몸을 일으켜 침상에서 내려섰다.
무엇보다 운진이 만류하지 않았고, 진무린이 판단하기에 기의 흐름에 나쁘지 않아서 굳이 만류할 이유도 없었다.
정동추가 눕도록 침상 정리를 당부한 일행은 대청의 탁자에 앉았다.
“대사형. 전중방을 어떻게 할까요?”
“사매의 말대로라면 반드시 찾아봐야지. 우선 암연에 연락해서 현재 전중방의 상태를 살피는 게 우선일 것 같다.”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였다.
참으로 오래 기다렸던 기운이 담장 바깥에서 민가를 향해 넘어왔다.
‘엄소동?’
엄소동의 기운인 것을 진무린은 바로 알아차렸으나 다른 이들은 알기 어려웠다.
모려원과 정동추가 놀란 눈으로 담장 바깥을 보았고, 겨우 치료를 마친 섬도곤이 방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진무린은 이 기운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교주. 구주입니다.”
“나타나기는 하는 모양이다. 혼자 가도 되겠냐?”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이곳으로 직접 들어왔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 지금 민가에 있는 정동추나 섬도곤, 모려원은 벽계의 일원이나 엄소동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진무린은 엄소동쯤 감당할 만하다는 말까지는 굳이 하지 않았다.
“혹여 위기가 있거든 기운을 내라.”
“그러겠습니다.”
“이 고비를 감당할 인물이 너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
정동추의 독한 눈빛에 답한 진무린은 걸음을 옮겨 민가를 나섰다.
골목을 걸은 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로 나선 진무린은 당연한 것처럼 소능산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스무 걸음쯤 걸었을 때, 엄소동이 곁으로 다가왔다.
검을 든 무인 둘이 걷는 길이었다.
더구나 진무린을 알아보는 이가 많은 상등이었다.
사람들이 길을 피하면서도 시선을 돌려 진무린과 엄소동을 살폈다.
마흔 후반으로 보이는 나이에 눈썹과 눈매, 코, 입가, 턱에 고집이 달라붙었고, 외통수라 할 정도로 고지식해 보이는 모습까지 엄소동은 변함이 없었다.
외모는 그렇더라도 팔십이나 되었다는 하후도를 아이라 표현할 정도라면 훨씬 더 나이가 많다는 뜻이니 실제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진무린과 엄소동은 덤덤하게 계단을 올랐고, 그렇게 소능산에 올라 사당 앞에 도착했다.
“오늘은 좀 더 위로 올라가세.”
어쩐 일인지 엄소동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사당의 뒤편을 향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어려운 일 아니다.
두려운 상대는 더더욱 아니어서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진무린은 엄소동을 따라 일각쯤 소능산의 뒤편 언덕을 올랐다.
“이곳일세.”
미리 봐둔 장소였던 것처럼 언덕의 중간에 서너 사람이 앉을 정도로 편평한 장소가 있었다.
오래된 그루터기에 앉기 좋았고, 사당의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만큼 상등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장소였다.
“앉게.”
진무린에게 자리를 권한 엄소동은 서너 걸음 떨어진 그루터기를 택해 자리했다.
진무린이 앉은 다음이었다.
“자네가 사령을 감당할 거라 짐작하지 못했네.”
“그 싸움에서 죽었을 거라 여기신 듯한데 벽계가 그토록 준동하였는데 어째서 침묵하셨습니까?”
죽을 고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켜만 보았다는 뜻인가?
엄소동의 말이 실망스러운 만큼 진무린의 대꾸는 부드럽지 않았다.
“많이 서운했나?”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몸을 감췄다면 그 정도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던 건 있습니다.”
“흐음.”
“벽계는 이미 구주가 나서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은천문과 양소소를 노리는 모양이다. 더불어 자네도.”
의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소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무린의 몸에서 기운이 솟구쳤다.
휘이이이-.
바닥에 널렸던 잔돌과 흙가루, 썩은 이파리와 부러진 가지들이 진무린을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바깥으로 굴렀다.
“이 정도였나?”
“그보다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본문과 사고를 노린다고 들었습니다.”
“자네를 노리는 것은 왜 빼나? 그것도 사방신이라고 넷이나 되지.”
진무린의 기운을 확인하는 것처럼 바닥에 쓸리는 썩은 이파리와 잔돌을 내려다보았던 엄소동이 고개를 들었다.
“구주는 없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내분으로 몰락했다고 보면 적당하겠지. 그 싸움에서 밀려난 세력이 만든 곳이 귀혼곡이고. 내가 유일하게 남은 구주의 후손이라고 보면 될 걸세.”
“말씀은 다음에 하십시오. 저는 당장 사고를 찾아뵈러 가겠습니다.”
“그쪽은 내가 맡아주마.”
엄소동의 말투가 단호하게 바뀌어 있었다.
“구주는 아홉 개의 무공이 하나로 이루어지는 천라구합진으로 벽계를 눌러왔다. 삼보에 구관을 숨긴 이유도 한 사람이 욕심을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고.”
분노 가득한 진무린의 눈을 보며 엄소동은 고개를 저었다.
“양소소는 내가 반드시 지켜주마. 그렇지만, 양소소를 지키고 나면 벽계도 우리가 천라구합진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다.”
“천라구합진이 없는데 어떻게 벽계의 인물을 상대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개개인의 무공은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 문제는 태상과 삼왕이지. 그들을 감당할 유일한 방법이 천라구합진이다.”
말을 마친 엄소동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은천문은 특별한 진법이 있고, 문주와 전도위 대사부, 제자들이 있으니 크게 염려할 것 없다. 양소소는 또한 약속한 대로 내가 지키겠다.”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진무린을 향해 말을 이었다.
“너는 최대한 서둘러 구관을 얻어라. 동료들을 나누어도 좋고 너 홀로 몸에 담아도 나쁘지 않다.”
엄소동은 경계하는 투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너를 지키겠다고 하면, 너는 필시 양소소에게 가겠지. 그런 이유로 내가 양소소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겠노라 말한 것이다. 사방신이 너를 노린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벽계와 구주의 근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궁금했는데 은천문과 양소소가 위험하다는 형국에 시간을 끌기는 더욱 어려웠다.
“사고를 부탁합니다.”
“사방신은 쉽지 않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위기의 순간이 오면 지금 보여주는 검을 기억해라.”
자리에서 일어선 엄소동은 왼손에 들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굳이 사당의 위편으로 올라가자 하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검을 내는 엄소동을 보며 진무린은 의아한 생각이 떠올랐다.
벽계가 은천문과 진무린, 양소소를 노린다는 것을 엄소동은 어떻게 저토록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
“벽계에 계셨군요.”
검을 꺼내던 엄소동이 눈빛을 번득 준 뒤에 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니다. 양소소를 지키는 순간, 그 친구 역시 목숨을 잃게 될 확률이 높다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나와 그 친구가 감당해야 할 몫이겠지.”
답을 내놓은 엄소동은 검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상광초향, 이선묘현, 고중침이.”
이후 그는 초식명을 부르며 검을 움직였는데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검의 특성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진무린은 의아한 심정에 휩싸였다.
은천수호검과 결이 비슷한 검법이었다.
대략 일각쯤 지났을 때 엄소동의 시범이 끝났다.
“자질이 부족해 모두 담지 못했습니다.”
엄소동은 쓰다, 달다, 한마디 없이 곧바로 검을 다시 움직였다.
확실했다.
보면 볼수록 은천수호검과 결이 같았다.
“진중탈구검이라 불린다. 이 검법을 사용하면 능히 벽계의 인물들을 감당할 것이다. 운기는 네가 지금 지닌 기운을 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혹시 벽계의 무공을 파훼하는 검입니까?”
“바로 그렇다.”
엄소동은 고개마저 끄덕이며 진무린에게 답을 주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벽계는 구주의 몰락을 확신하게 된다. 너는 서둘러 구관을 열되, 지금 전한 검법을 구관을 통과한 이들에게 전해 벽계를 상대해라.”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것처럼 엄소동은 고개를 크게 들어 널따랗게 펼쳐진 상등의 하늘을 돌아보았다.
그의 모습이 어쩐지 운진과 비슷해 보인 탓에 진무린은 혹시 하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죽음을 예정하고 달려드는 적은 두렵지 않습니다. 원하는 최후의 계획이 죽음이라면 그것이 어긋났을 때,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동추가 운진에게 건넸던 말이었다.
픽 웃은 엄소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살아서 보자는 말을 참 어렵게 하는구나. 시간이 촉박하니 이만 가보마. 너의 어깨에 짐이 너무 올라가는 듯해서 미안하나 지금은 다른 대안이 없다.”
검을 넣은 엄소동이 몸을 돌렸다.
“명심하게. 벽계의 태상과 삼왕이 직접 나서면 지금의 자네는 결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해. 유일한 대안이 구관임을 명심하게.”
또다시 말투를 바꾼 그가 훌쩍 발을 굴러 소능산의 위를 향해 솟구쳤다.
세상 참.
진무린은 허탈한 심정으로 상등을 돌아보았다.
모려원의 술법이 완전히 풀렸고, 전중방의 진법을 통해 벽계와 소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이었다.
혈교의 우두머리 납타이를 제거해 벽계가 사용할 방법 하나를 완전히 꺾은 것은 물론이요, 복수를 마무리한 날에 구주가 몰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무린은 홍화루를 물끄러미 보았다.
‘위험해요.’
구주에 관해 물었을 때 원예가 내놓은 답이었다.
몰락했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다는 뜻이었을까.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는 것처럼 진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 은천문의 위기를 서둘러 알려야 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진무린은 지닌 내공을 모조리 쏟아내듯 암연을 부르는 기운을 뿜어냈다.
**
화산으로 들어선 은혼은 의복을 정리한 뒤에 먼저 원시천존과 사조들의 위패에 예를 보였고, 이어 사제인 문혼을 불렀다.
“량아는 어찌 지냈나?”
“최근에 사질들의 무공을 보아주며 함께 수련하는데 그사이 또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은혼의 표정은 무거웠다.
“왜 그러십니까, 사형?”
“혹여 녀석이 사질들을 가르친다 해서 교만하지 않던가?”
“그 점이라면 안심하셔도 될 듯합니다. 나이 많은 사질들을 워낙 깍듯하게 대하고, 어찌나 겸양하는지 오히려 사질들이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흐음.”
사제의 말을 듣고서야 은혼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사형. 량아를 가르칠 능력이 소제에게는 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이틀 전 검을 점검하기 위해 비무를 하였는데 놀랍게도 은은한 매화 향을 피워냈습니다.”
은혼이 놀란 눈으로 사제를 보았다.
“벌써 매화검수의 수준에 도달하였는데도 마치 마른 땅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무공을 습득하는 터라 소제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혹여 과장이 있는 것은 아닌가?”
“당장 불러 점검하시면 알게 되실 일에 과장은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사제 문혼의 표정을 살핀 은혼은 반가움과 염려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발전이 너무 빨라 염려되십니까?”
은혼의 염려를 바로 알아차린 사제의 질문이 있었다.
“량아의 심성을 모르십니까? 향후 이 화산의 이름을 빛낼 인재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사형.”
“적어도 사제의 마음만큼은 붙든 모양이군?”
“소제뿐이 아닙니다. 겸양을 갖춘 태도, 놀라운 무공, 해서 제자들 모두 량아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은혼은 당장 표충량을 불러 그 반가운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혹여 수련을 방해할까 싶어 그는 미소로 그리움을 대신했다.
**
진무린은 사당이 있는 장소로 내려와 엄소동이 보여주었던 진중탈구검을 되새겼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지 반 시진이 조금 안 돼서 서른 중반의 남자가 진무린 앞에 나섰다.
“진 대협. 찾으셨습니까?”
“급한 일입니다.”
진무린은 먼저 엄소동에게서 들은 내용을 전했고, 이어 모려원에게 남았던 술법을 완전히 풀었다는 말과 전중방에 진법이 있다는 내용을 빠르게 전했다.
“본문의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말씀을 급하게 전해주십시오.”
“예, 진 대협.”
진무린이 당부하는 말에 서른 중반의 남자는 곧바로 사당의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급한 볼일을 마쳤으나 진무린은 소능산에 앉아 잠시 더 시간을 보냈다.
구주에게 얻은 것은 진중탈구검과 엄소동이 전부인 셈이었다.
진중탈구검은 진무린 정도의 기운을 담아야 벽계의 검을 파훼할 수 있고, 엄소동과 같은 무인이 아홉이 있어야 천라구합진을 펼친다는 말이었다.
결국, 현실은 삼보를 세상에 내놓는 것 외에는 답이 없는 모양새였다.
‘벽계가 삼보를 핑계로 강호를 혼란에 빠트리려 했는데?’
그런데 말이다.
왜 벽계는 굳이 삼보를 강호에 꺼내놓으려 애썼을까?
구관이 개방되면 가장 불리한 것이 벽계인데?
당장 답을 얻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교주, 사매와 의논해 볼 일이다.’
마음을 정한 진무린은 몸을 일으켜 민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