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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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94화
은천검제
제194화
달은 휘영청 밝아 은천문과 주변을 은빛으로 물들이는데 임운령은 뒷산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석상인 양 은천문을 내려다보던 임운령이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사제와 같지 않을까.”
양소소는 임운령의 곁으로 움직여 은천문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을 달릴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
“소제도 그렇습니다.”
“사제의 눈가에 연륜이 달렸는데 전각이며, 달이며, 새롭게 잎을 매단 나무까지 이곳은 정말 변함이 없네.”
“소제는 어렸을 적에 사저가 가장 무서웠습니다.”
“사제가 속을 썩이기는 했지.”
대화의 끝에서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암연은 연락이 없었지?”
“신임 문주와 려아, 무헌이가 정도맹을 출발했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동행한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봐서 사저의 예상대로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전각들을 둘러본 임운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은 짐을 문주의 어깨에 얹었습니다. 전중방을 향하는 문주의 심정이 어떨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숨이 쉬어지질 않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임운령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제 욕심 탓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문주의 뜻에 반하더라도 본문의 제자들을 이끌고 전중방으로 향한 뒤에 죄를 청하고 싶습니다.”
“본문의 문도는 문주의 뜻을 따를 의무를 지녔다. 사제의 생각이 옳다는 이유로 문주의 뜻을 저버린다면 앞으로 누가 있어 본문을 이끌 수 있겠니.”
양소소는 안타까운 눈으로 임운령을 보았다.
“문주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사제와 나는 평생 지금의 죄를 가슴에 담고 살 테니 그것이 벌이라 여겨야겠지.”
별이 움직였고, 달이 조금씩 위치를 바꾸었는데 양소소의 말을 끝으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누워도 잠이 들지 못해 괴로워할 테니 차라리 이렇게 날을 밝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
먼동이 터올 때까지 달린 진무린은 다시 산의 중턱에서 멈춘 뒤에 모려원과 종무헌에게 운기하라 일렀다.
두 사람이 운기를 마친 뒤였다.
반 시진에 걸쳐 은천수호검을 살핀 진무린은 마침내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멀리 밝은 빛이 피어나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렸을 때였다.
“앞으로 펼칠 경공의 끝에 전중방이 있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더라고 속이 비어서는 적을 상대하기 어려우니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가겠다.”
가볍게 몸을 날려 산을 내려선 진무린은 길을 따라 걸었다.
아침을 맞은 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고, 작은 새순이 물기를 한껏 머금은 확연한 봄날의 아침이었다.
모려원은 눈부신 아침을 오래도록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호에 나선 이후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귀혼곡에서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특히, 사제가 반걸음을 돌아온 것에 감사한다는 말을 해주던 순간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늘 매섭던 표정의 종무헌이 순한 양과 같은 얼굴로 쑥스럽게 웃었다.
객잔은 얼마 가지 않아 나왔다.
탁자에 자리한 진무린은 아침치고는 거한 느낌으로 다섯 가지의 요리와 죽, 만두, 그리고 술 한 병을 청했다.
당연하게 술이 가장 먼저 나왔다.
“이대로 가는 것은 서운해서 주문했다. 한잔뿐이나 이 술에 사형제의 우의를 담을 테니 사매와 사제는 내 마음을 받아다오.”
진무린이 두 사람의 잔을 채워준 뒤였다.
“소매가 답례로 대사형께 소매의 마음을 드릴게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 모려원이 진무린의 잔을 채워주었다.
“소제는 대사형과 사저의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그곳이 어디이든 끝까지 따를 것입니다.”
종무헌의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양손으로 든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동시에 비웠다.
여유가 길지 못한 것을 알아서 더 잔잔하고 애틋한 아침 식사였다.
반 시진 가량 식사한 세 사람은 셈을 마친 뒤에 객잔을 나섰다.
오가는 이들의 눈을 피할 겸 잠시 걸었는데 일각쯤 지나자 산이 앞에 놓였다.
“출발하겠다. 두 시진 후에는 전중방에 도착한다.”
“예, 대사형.”
훌쩍 몸을 날리는 진무린을 모려원과 종무헌이 곧바로 뒤따랐다.
**
실제로 하루를 꼬박 운기에 매달렸던 태상은 오전의 중간쯤에 눈을 뜨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온다.”
어느 틈에 앞을 지키고 있던 수하 넷이 궁금한 눈으로 태상을 바라보았다.
“이 괴물이 더 늘었구나! 이제는 홀로 나를 감당할 수준이다!”
지켜보던 수하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반드시 놈을 이곳에 가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밖으로 보낸 이들은 절대로 뜻을 이루지 못해. 또 하나. 놈이 가르친 자들을 찾아 반드시 제거해라. 뿌리부터 모조리 잘라야 우리의 희생이 빛을 피울 수 있다.”
혹여 정신이 혼미해진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상은 허공을 향해 혼잣말 같은 지시를 중얼거렸다.
“흠흐흐. 와라. 어서 와. 이곳이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말을 마친 태상은 허공에 두었던 시선을 내렸다.
실제로 광기가 묻은 그의 눈이 어찌나 매섭게 빛나는지 수하들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
세 사람은 오전의 중간을 쉼 없이 달렸다.
고사리 같은 손에 목검을 들었던 날이 엊그제 같았다.
그런데 지금 진무린은 강호 최고수라 해도 손색이 없었고, 모려원은 은천문의 숙원이던 등룡창천의 대성을 앞에 두었으며, 종무헌은 그토록 바라던 묵룡검법의 길을 분명하게 보았다.
점심나절이었다.
멀리 평야가 보이는 곳에서 진무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곳에 전중방이 있다. 적을 마주하기 전에 마지막이다. 사매와 사제는 여유를 지니고 충분히 운기해.”
달려오는 과정에서 진무린이 얼마나 공력을 부어주었는지 모려원과 종무헌은 피곤함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진무린의 지시에 따라 자리를 골라 앉아서 눈을 감았다.
이 운기를 통해 몸 안에 담긴 기운을 갈무리하고 자칫 흥분할 수 있는 감정을 다독인다.
이 각쯤 운기한 뒤였다.
모려원이 먼저 조용하게 눈을 떴다.
내내 모려원을 보고 있었던가, 아니면 운기를 마친 것을 알아서 고개를 돌렸을까.
모려원을 향해 진무린이 세상 그 어떤 산보다도 더 듬직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대사형. 운기하셔야죠?’
걱정스러운 모려원의 눈빛에 진무린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의미로 보였다.
모려원은 진무린의 곁으로 움직였다.
저 멀리 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봄날의 햇살이 온 세상을 화려하게 비추었다.
두 사람이 전중방이 있을 방향을 향해 시선을 두었을 때였다.
운기를 마친 종무헌이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은천수호검을 점검하겠다.”
검을 꺼내는 진무린을 따라 오른쪽에 모려원, 왼편에 종무헌이 서서 자세를 잡았다.
쉐에엑! 쉐엑!
초식을 펼치는 검을 따라 주변이 점점 더 은천문의 뒷산으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진무린은 푸릇푸릇했고, 모려원은 이제 막 아이 티를 벗었으며, 종무헌은 앙증맞았다.
왼손을 내밀며 천천히 몸을 돌린 세 사람은 동시에 검을 뻗었다.
쉐엑!
이어 자세를 낮춘 세 사람이 다시 세 번의 변화를 위해 검을 흔들었다.
쉑! 쉐에엑! 쉑!
햇살을 머금은 검이 반짝이며 은천수호검의 초식이 모두 끝났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검을 넣는 진무린과 모려원 앞에서 종무헌이 검을 거꾸로 앞에 들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사제가 그렇게 하니까 내가 무례한 것 같잖아.”
모려원이 장난기 묻은 대꾸를 건넨 뒤였다.
“사저. 남은 반걸음을 마저 돌아와 모시게 된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제는 대사형과 사저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나 아무것도 갚은 것이 없습니다. 부족한 소제는 그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말없이 다가간 모려원은 검을 거꾸로 잡은 종무헌의 팔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함께 있어 준 것으로 사제는 기쁨이었어. 대사형을 모셨고, 사제를 얻어 한 번도 원망하거나 서운한 적 없었고. 이 길을 함께할 수 있는 사제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
모려원이 감정을 전한 뒤였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다.”
말없이 지켜보던 진무린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단숨에 야트막한 산을 내려선 세 사람은 평야의 중간쯤에서 속도를 줄이고 비장한 표정으로 걸었다.
“저들은 벽계라는 자부심을 버렸고, 개개인의 자존심을 내던졌다. 그만큼 치졸하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수법을 내세울 거다.”
걷는 도중에 진무린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조용하게 알려주었다.
“상황에 따라 태상을 내가 감당할 수도 있다. 그때의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움직여주었으면 한다.”
나직한 당부를 끝으로 평야의 저 끝에서 외롭게 서 있는 무관이 눈에 들어왔다.
“전중방이다. 이 길을 따라 십 리를 더 가야 호곡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올 정도로 주변에 몸을 감출 것이 없어 우리와 같은 방문자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지.”
전중방을 향해 걷던 진무린이 옅게 웃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
진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진무린은 그 안쪽에 숨은 기운마저 읽는 모양이었다.
점점 더 뚜렷해지는 전중방을 향해 세 사람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
태상은 거대한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왔다!”
그는 앞에 선 수하들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는 진무린을 상대하기 어렵다. 그를 내게 맡기고 진을 부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태상의 명을 받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태상이 앞에 놓인 세 개의 계단을 내려섰고, 이어 대전의 문을 향해 걸었다.
부서진 조형물의 흔적을 지나친 그는 대전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안을 돌아보았다.
“한낱 강호의 무인 따위에게 이런 수모를 받을 줄 알았다면 그 긴 시간을 이리 보내지 않았으련만,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겠지.”
대전을 향해 중얼거린 태상은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의 바깥은 널따란 평지였다.
거대한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처럼 평지 곳곳에 세 개, 혹은 네 개의 가옥이 모여 있는 것을 제외하면 삭막한 풍경이었다.
대전을 빠져나간 태상은 가옥들의 중간에서 뒷짐을 진 채 걸음을 멈추었다.
뒤편에서 따르던 서른 명의 수하들이 전에 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태상의 뒤를 받쳤는데 그들 주변으로 자욱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
전중방의 앞에 도착한 진무린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낡은 건물이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담 아래로는 잡풀이 피어났고, 반쯤 열린 문과 안쪽 역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진법을 통과할까?
모려원과 종무헌이 진무린을 돌아볼 때였다.
전중방의 담을 타고 걸어오는 사람의 형체가 보이더니 낯익은 얼굴이 앞에 섰다.
“장 노대!”
영특한 모려원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믿기지 않는 등장이었다.
“문주를 뵙습니다.”
“홀로 이곳에서 고생이 많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그저 문주의 말씀을 따랐을 뿐입니다. 또한, 몸을 감추기에 이보다 적당한 곳이 없었습니다.”
“전중방의 사람들은 어찌하고 있습니까?”
“문주께서 진법 안으로 들어가시면 피신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진법은요?”
“문을 들어서신 뒤에 뒷마당으로 가시면 작은 사당과 같은 건물이 나옵니다. 그곳에 있는 향료를 당기면 통과한 것 같은데 다른 것이 필요한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답을 들은 진무린은 장 노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노대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어려운 임무를 너무도 잘 수행해 주셨습니다.”
“이 늙은 몸을 중히 여기셔서 임무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본문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기가 막힌 모려원과 종무헌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장 노대가 담장을 따라 다시 뒤로 몸을 돌렸다.
“진법을 몸에 담을 때 당부드렸던 일이다. 윤고상이 이곳을 드나들었다면 반드시 출입구가 있으리라 짐작했었지.”
모려원을 향해 설명처럼 말을 이은 진무린이 걸음을 옮겼다.
“대사형. 혹시 장 노대 역시 진법에 몸을 감춘 건가요?”
“그것은 암연과 문주만 알아야 하는 일이니 답을 주기 어렵다.”
말을 마친 진무린이 걸음을 옮기며 세 사람은 전중방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