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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93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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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93화

은천검제

제193화

 

운진과 섬도곤의 마음이야 정도맹을 함께 나서 반나절을 배웅하고 남겠으나 마교의 첫 번째 제자와 모산의 문주라는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 별채에서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별채를 나선 진무린은 맹주 황종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직전에 벽계의 인물을 상대한 일 때문인지 오가는 무인들이 존경의 빛을 띠거나 관심을 가득 담은 눈초리로 진무린 일행을 살피곤 했다.

집무실로 향하던 진무린은 걸어오는 황종관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출발하나?”

“그렇습니다.”

“어려운 일을 맡겼네.”

이미 긴요한 이야기는 정자에 앉아 나눈 참이었다.

진무린에게 의미 있는 눈빛을 던진 황종관이 모려원과 종무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결과가 어떻든 강호는 은천문과 진 문주, 자네들에게 큰 빚을 졌네. 강호를 대표하지는 못하나 정도 무림을 대표해 감사의 뜻을 전하네.”

말을 마친 황종관이 양손을 잡아 고개를 숙였다.

“맹주! 어찌 이리 과한 예를 하세요?”

모려원과 종무헌이 급하게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뒤에 황종관이 몸을 세우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황종관이 몸을 세우고는 모려원과 종무헌에게 단단한 눈빛을 전하는 것으로 인사가 끝났다.

“정도맹을 둘러싸다시피 모여 있네. 그나마 북문 쪽이 나가기 수월할 걸세. 담을 넘으면 평기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으니 그곳을 바로 넘어가게.”

말을 마친 황종관은 안내를 하는 것처럼 앞서 걸었다.

그 뒤를 진무린과 모려원, 종무헌이 걸었고, 다시 황가의 가신들과 정도맹의 무인들이 뒤따랐다.

분위기는 엄숙했다.

벽계의 인물이 정도맹 앞에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진무린이 아니고서는 상대할 자가 없다는 답답함이 황종관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전각들 사이를 걸은 황종관이 북문의 성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무운을 비네.”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무린 일행은 다시 한 번 황종관과 포권으로 인사한 뒤에 성곽을 향해 올랐다.

황종관의 말대로였다.

정문과 연결된 길에 앉아 있던 무인들이 고개를 빼 들었고, 그 건너편으로 작은 산이 보였다.

“출발하자.”

좌우를 돌아본 진무린이 몸을 날리자 모려원과 종무헌이 곧바로 뒤따랐다. 

퍼러럭,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새처럼 날자 앉아 있던 이들이 벌떡 일어났으나 거기까지였다.

산을 완전히 넘어선 진무린은 그대로 방향을 잡아 경공을 펼쳤다.

벽계의 최고수 태상을 상대하러 가는 길이었다.

경공을 펼치는 일에 무리해서 결과를 망치는 일은 피하는 현명함이 필요했다.

적당한 속도로 달리며 진무린은 백면호리를 노렸던 벽계의 중년 남자를 떠올렸다.

지금껏 만났던 이들은 진무린을 상대로 물러서거나 피하는 법이 없었다. 

벽계라는 자부심을 품은 까닭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 중년인은 분명 몸을 빼려 노력했고, 심지어 모여든 군중을 노렸다.

‘태상의 지시겠지.’

답은 분명했다.

태상이 모종의 지시를 내렸고, 이미 몇몇은 강호로 나와 임무를 수행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

부상을 당한 태상은 함부로 근거지를 옮기지 못한다.

그러니 자부심을 버릴 정도의 임무를 내렸고, 그와 비슷한 각오로 진무린을 기다린다고 보는 것이 현명했다.

진무린은 입을 굳게 다물고 전중방을 향해 달렸다.

 

**

 

스물세 명을 내보낸 태상은 진무린을 상대할 서른 명을 돌아보았다.

“놈이 정도맹에 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경공을 펼친다면 하루쯤 걸릴까?”

“그의 실력이라면 그리되겠으나 사매와 사제라는 것들이 동행한다면 이틀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닦은 태상은 다시 신선처럼 고고한 모습이었다.

“아픈 말을 해야 할 때로군.”

말을 내놓는 태상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부상을 당한 탓에 진무린이란 놈의 무공이 실로 버겁다. 대결을 지켜보다 놈이 우세하다고 여기면 진법을 부숴라.”

“명을 받습니다.”

가장 앞에 선 수하 한 명이 비통한 음성으로 대꾸를 내놓았다.

“놈을 이곳에 가두면 강호로 나간 이들의 안위가 그만큼 단단해질 것이요, 임무를 맡은 열셋의 행보가 또 그만큼 수월해질 것이다.”

넉넉하게 말을 건넨 태상은 앞에 선 자들을 둘러보며 보기 좋은 미소마저 그렸다.

“이제 나는 놈이 올 때까지 운기에 들겠다. 나가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든, 운기를 하든, 남은 시간들을 편하게 보내.”

말을 마친 태상은 커다란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는 가부좌로 눈을 감았다.

예를 보인 서른 명이 숨소리조차 조심하며 몸을 움직이자 잠시 후, 대전은 오롯이 눈을 감은 태상만 남았다.

진무린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을까.

운기를 하던 태상의 눈썹이 꿈틀했는데 그는 기다란 숨을 내쉬는 것으로 표정을 가라앉혔다.

 

**

 

오후 내내 달린 진무린은 저녁나절에 걸음을 멈추었다.

근처에 산이 없는 대신, 잡목과 잡풀이 우거진 평야의 한쪽에 적당한 공간을 찾았다.

노을이 안개처럼 뿌려댄 붉은빛이 말라붙은 잡목과 잡풀에 꺾여 현란한 그림자를 그려내는 시간이었다.

“대사형. 저녁은 어떻게 할까요? 만두를 가져온 게 있는데 드시겠습니까?”

“그 전에 잠시 검을 먼저 볼까 한다.”

종무헌의 질문을 받은 진무린은 검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사매는 어렵지 않을 테고, 사제는 하루면 충분할 검법이다. 초식에 현혹되지 말고 결을 찾는다는 마음으로 봐다오.”

조언을 건넨 진무린은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슬쩍 내려앉은 진무린이 왼손으로 노을을 가리키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들었다.

느긋한 춤사위를 보이는 것처럼 오른발을 내밀었던 진무린은 곧바로 몸을 돌려 뒤를 갈랐다.

검은 한동안 이어졌다.

모려원은 마른침을 삼켰고, 종무헌은 무언가를 보고 놀란 사람처럼 눈을 부릅뜬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지평선 너머로 오늘의 태양이 반쯤 가라앉은 다음이었다.

내밀었던 검을 당긴 진무린이 몸을 세웠다.

“사제가 얻은 것이 있는 모양이지?”

“묵룡검법을 본 듯하나 초식의 변화와 응용이 달랐습니다.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가 성장하여 다른 모습이 된 것과 같으니 이것이 혹시 대사형께서 말씀하신 결이 같다는 뜻입니까?”

종무헌의 감상을 들은 진무린이 참으로 오랜만에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본문의 문주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은천수호검이다.”

“대사형?”

“이미 문주와 사부께 허락을 얻어 풀어낸 것이고, 본문의 제자들이 모두 익히고 있으니 그리 놀랄 것 없다.”

모려원을 다독인 진무린은 거의 내려선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또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은천수호검을 익히는 것이 묵룡검법보다 훨씬 수월하다.”

“묵룡검법을 대성하는 것은 일종의 시험과 같았군요.”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표정의 종무헌을 향해 모려원이 입을 열었다.

“묵룡검법을 익혀야 문주가 될 자격을 얻잖아. 만약 은천수호검이 시험이라서 통과했다고 치면, 묵룡검법이 더 어려운 탓에 얻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지? 묵룡검법을 대성하지 못한다면 다음 문주에게 전할 때 원형을 유지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겨.”

뒤늦게 깨달은 종무헌이 이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다. 사매와 사제는 이 검을 함께 익혀라. 사제의 수준이라면 묵룡검법을 얻는 데 크게 도움이 있을 거다.”

이후 진무린을 따라 두 사람이 반 시진가량 은천수호검을 익혔고, 그 뒤에 세 사람은 어둠 속에서 만두를 꺼내 저녁을 대신했다.

“불을 피울까요?”

“운기를 잠시 하고 바로 출발할 생각이다. 제대로 된 휴식은 새벽녘에 하자.”

“예, 대사형.”

진무린의 뜻을 종무헌이 공손하게 받았다.

 

**

 

양소소는 이틀 전부터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지금은 말수마저 줄었다.

임운령, 전도위는 물론이고 파천신군마저 언젠가 표정을 풀겠지 하는 마음으로 모른 척했는데 지켜보기 불편한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냐?”

결국,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파천신군이 나서고 말았다.

“이거야 원. 무슨 일인지 말을 해! 네가 나처럼 갑갑해서 그런 것은 아닐 테고, 이곳에서 네 심사를 거스를 제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조여!”

직설적인 남굉모의 질책이 날아간 뒤였다.

양소소는 지금까지와 다른 표정으로 탁자에 둘러앉은 임운령과 전도위를 돌아보았다.

“신임 문주가 죽음을 각오한 것이 아닌가 싶어.”

남굉모가 곧바로 눈을 갸름하게 떴고, 임운령과 전도위는 말귀를 못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사저. 은천수호검을 제자들에게 배포하라 나섰습니다. 벽계를 상대로 대대적인 반격을 하기 위해 본문의 문주가 지닌 검법을 개방한 것입니다. 더구나 신임 문주는 새로운 검법을 책임져야 합니다.”

“답은 전 사부께 있다고 봐야지.”

양소소를 따라 임운령과 남굉모가 시선을 돌렸다.

“전 사부가 보름 만에 창안한 검법이 신임 문주가 먼저 활용했던 검법과 같아. 시간이 촉박해서 그렇지, 여유를 가진다면 분명 새로운 검법을 만들 수 있다는 증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신임 문주가 다음 대 문주로 전 사부를 생각한다는 말씀입니까?”

임운령의 질문에 양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알아듣게 설명 좀 해봐라!”

“본문을 폐쇄했어요. 안전과 시간을 둘 다 벌어준 거죠. 삼보를 얻겠다고 했거든요. 세 가지 보물을 사매와 사제에게 준다면 당장 힘을 얻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힘을 얻어서 벽계의 근거지를 셋이서 친단 말이냐?”

아직 믿기지 않는다는 남굉모를 향해 양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임 문주, 전 사부, 외조부, 외조모까지 모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요. 신임 문주가 은천령을 내리면 이곳에 가만히 계시겠어요?”

“그럴 수는 없지!”

“보세요. 신임 문주는 그것까지 계산했을 거예요. 은천검법이 강호에 풀린 것을 대신해 은천수호검을 배포했고, 본문이 다시 힘을 기를 동안의 시간을 벌어준 것이지요.”

“함께 지내며 힘을 키우면 더 좋지!”

“아니요.”

남굉모의 의견을 밀어낸 양소소가 임운령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강호가 어려운 순간에 문을 닫고 외면한다면 이후 어떤 문파도 본문을 존경하지 않겠지? 또한, 벽계가 강호를 삼킨 뒤에 나서면 어려움이 더욱 클 테고.”

임운령은 애달프고 참담한 표정이었다.

“본문을 이끌어 달라고 당부한 것이 신임 문주에게는 너무 큰 짐이 되었나 봅니다. 신임 문주가 없을 때도 본문이 벽계를 감당하게 만들겠다던 의미가 이런 것인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을 열 방법이 있어?”

“어렵습니다. 진법을 담은 장 노대가 오지 않고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암연을 통해 급하게 연락을 해서 문주나 장 노대를 찾아보는 건?”

“당장 연락해 보겠습니다.”

답을 마친 임운령이 손을 잡아 보이고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정말 신임 문주가 그 짧은 순간에 이런 계산을 했다고 보느냐?”

“그런 사람을 한 명 더 알아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본문의 안위와 명예를 위해 검을 들었던 사람을요.”

양소소의 답에 남굉모는 아픈 신음을 터트렸다.

 

**

 

진무린은 일정한 속도로 전중방을 향해 달렸다.

달이 떠오른 뒤부터는 공력을 풀어내 모려원과 종무헌의 경공을 도왔는데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무를 밟고, 바위를 디디며 달리는 길이었다.

이 길의 끝에 벽계의 근거지가 있고, 태상이라는 엄청난 적수가 진무린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기울인 자세로 달리던 세 사람이 높다랗게 떠오르자 둥그런 달이 세 사람의 윤곽을 선명하게 담았다.

이 길이 죽음을 담보하더라도 후회는 없다.

다만, 더 오래 함께하지 못할 수 있다는 아쉬움은 가슴 속에 있었다.

절벽을 뛰어내린 세 사람은 차례로 바위를 밟으며 속도를 줄였다.

달이 머리 위로 확연히 오른 시간이었다.

“사매!”

나직하게 모려원을 부른 진무린이 절벽의 끝에 내려섰다.

이어 모려원과 종무헌이 간발의 차이로 도착해 세 사람은 어둠에 싸인 산과 들을 내려다보았다.

“내일 정오면 도착한다.”

진무린의 말이다.

그렇다면 정오에 도착하리라.

“이곳에서 운기하고, 내일 오전과 전중방에 들어설 때 한 번 더 운기할 생각이다. 사양할 것 없다. 어서 기운을 채워라.”

진무린의 지시에 두 사람은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았다.

달빛이 은은한 절벽에서 모려원과 종무헌을 돌아본 진무린은 은천문이 있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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