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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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92화
은천검제
제192화
별채로 돌아온 진무린은 안쪽에 조성된 작은 정원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뒤였다.
“대사형?”
대청의 문을 통해 나온 모려원이 진무린에게 다가섰다.
“사제 때문에 그러세요?”
모려원 역시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어서 진무린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의 기를 잡아주며 느낀 바로는 세 가지 보물의 효능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사제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테고.”
“마교의 잠력대법처럼 폭주하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더 문제지. 벽계를 상대할 때 사제를 붙들어줄 틈이 없을 테니까.”
“세 가지 보물의 효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 대사형의 잘못이 아니에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진무린은 종무헌이 있는 별채의 건물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대사형. 소매와 사제를 구할 방법을 고민하시는 거라면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그 직후에 모려원이 평소와 다른 음성으로 뜻을 전했다.
“대사형의 희생으로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 소매에게는 지옥과 다를 바 없어요. 사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소매와 사제를 무인으로 당당하게 서게 해주세요.”
모려원의 당부가 끝났을 때였다.
진무린은 무언가 다가오는 느낌에 시선을 들었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대사형?”
“벽계다!”
한 마디를 남긴 진무린이 별채의 담장 위로 몸을 날렸고, 모려원이 그 뒤를 따랐다.
삽시간에 두 사람은 정도맹을 가로질러 정문의 성곽 위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문을 지키던 무인이 도를 거꾸로 들고 물을 때, 성곽 앞쪽에 늘어선 이들은 진무린과 모려원을 살피느라 고개를 빼 들었다.
한낮이었다.
정수리에 올라선 태양이 열기를 쏟아내고, 그 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물길처럼 무인들이 늘어서 있었다.
“적이 달려오고 있소. 경계를 높이고 무엇보다 앞에 있는 이들을 피하게 하시오.”
“저들은 맹주의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무인은 아직 진무린이 전하는 경고를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문 앞에 모여든 군중이 웅성댈 때였다.
먼 하늘에서 깨알처럼 보이는 사람의 형태 두 개가 지붕을 밟고 높다랗게 떠올랐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지붕을 밟은 두 개의 모습은 벌써 형체를 또렷하게 알아볼 정도였다.
진무린은 단박에 성곽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진 대혀-업!”
백면호리의 애달픈 고함이 터진 직후에,
퍼어-억!
멀리서 북을 때리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백면호리를 향해 중년 남자가 꽂히듯 내려앉았고,
쉐에에엑!
그를 향해 진무린이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른 진무린은 몸을 뒤틀며 백면호리를 낚아챘다.
날렵하게 몸을 비튼 진무린이 객잔의 지붕에 올라섰을 때였다.
쉐에엑! 쉑! 카앙! 쉐엑!
진무린을 뒤따르던 모려원이 달려드는 벽계의 인물을 향해 연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웅성대는 군중들 위에서 진무린은 백면호리를 안았고, 그 곁을 모려원이 지켰는데 벽계의 인물은 당황한 듯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그는 진무린과 모려원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몰랐던 눈치였다.
“네놈이 혹시 진무린이냐?”
“본문의 문주께 그 무슨 망발이냐!”
모려원의 당찬 대꾸를 받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내내 외치더니 너를 찾았던 모양이구나. 이것도 정해진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진무린은 벽계 인물의 시선 앞에서 백면호리의 혈도 몇 곳을 급하게 눌렀다.
중년 남자를 향해 시선을 놓지 않은 모려원이 백면호리를 받았을 때였다.
“세 분은 어디에서 오신 분들이오?”
지켜보던 이들 중 한 명이 훌쩍 담장을 밟은 뒤에 지붕 위로 올라섰다.
“본인은 시류천성 주도배라 하오.”
“위험합니다. 내려가십시오.”
“강호에 살며 어찌 어려운 순간이 없겠소?”
진무린의 당부를 외면한 그가 한껏 여유를 부리며 양손을 맞잡았을 때였다.
“맹주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성곽 위에서 황종관의 모습이 보였다.
성곽 위를 박찬 맹주가 지붕을 밟으며 중년 남자의 뒤편으로 움직일 때였다.
“인사나 나눕시다.”
주도배가 벽계 인물의 앞으로 움직였다.
말릴 틈이 없었다.
막아줄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몸을 날린 주도배가 벽계의 인물 앞에 내려서는 순간이었다.
쉬이익! 퍼어-억!
귀찮다는 듯 휘두른 중년 남자의 손짓에 얻어맞은 그가 길게 날아가 모여 있는 이들 사이로 떨어졌다.
“어찌 인사하자는 사람을 이리 대하느냐!”
놀라서 지르는 고함, 주도배가 죽었다고 외치는 소리, 이쪽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의 질문이 요란하게 정도맹 앞을 뒤흔들었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중년 남자의 눈빛이 바뀌는 순간, 진무린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쉐에에엑! 쉐엑!
군중을 향해 몸을 날리려던 중년은 진무린의 검에 막혀 몸을 뒤로 빼냈다.
달려들면 쉽다.
그러나 길게 늘어선 군중들 틈으로 빠져나가려는 중년 남자를 막아야 하기 때문에 단번에 승부가 나지 않았다.
“어딜 가려 하는가!”
상황을 눈치챈 황종관과 모려원이 세모꼴로 사내를 막아서 퇴로를 막은 다음이었다.
쉐에에엑!
진무린의 검이 햇살에 번득이며 중년 남자의 목 아래를 갈랐다.
하나의 빛줄기 안에 일곱의 변화가 담겨 중년 남자가 헛되이 뻗은 손은 검을 막지 못했다.
무릎을 꿇듯이 주저앉은 남자가 기울어지더니 퍼석, 소리와 함께 기와지붕 아래를 향해 널브러졌다.
벽계라 해도 피는 같은 것인가.
그가 뿜어낸 붉은 피가 비처럼 기와를 타고 흘러 아래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검을 수습한 진무린은 백면호리를 향해 움직였다.
코와 입가에 피가 번졌고, 낯빛이 시커멓게 죽었으나 숨은 붙어 있었다.
“진 대협…….”
진무린이 다가서자 억지로 눈을 뜬 그가 갈퀴 같은 손아귀로 소매를 붙들었다.
“정아를 부탁하이.”
애절한 백면호리의 요청에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고통이 심할 거야.”
“아픈 것도 모르겠어.”
“혈도가 막혔어. 이대로 두면 정말 정아를 못 보게 돼. 공력을 통해 막힌 혈도를 뚫을 텐데 다른 방법이 없어.”
“내가 산다고?”
“죽고 싶을 거야.”
기력이 하나도 없는 백면호리의 눈에서 초점이 흐려질 때였다.
진무린은 오른손을 그의 단전에 올렸다.
우우우웅.
공력을 일으키자 먼저 검이 울었고, 이어 칼에 찔린 것처럼 백면호리가 눈과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끄윽! 끅!”
우우우우웅!
“죽여! 차라리 죽이라고!”
처참한 비명이었다.
공력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토록 고함을 지르고 입을 열어도 되나 싶었는데 진무린은 만류하지 않았다.
“커흑!”
진무린이 손을 떼자 한껏 뒤틀렸던 백면호리의 몸이 축 늘어졌다.
“어떤가?”
“워낙 무리한 경공을 펼친 데다, 등에 장을 맞아 혈도의 두 곳이 막혔었습니다. 잠시 쉬고 나면 괜찮을 겁니다.”
다가온 황종관이 물었고, 진무린이 나직하게 답했다.
“시류천성은 이미 사망했네.”
지붕 아래를 내려다본 황종관이 통보처럼 알려준 내용이었다.
“우선 백면호리를 안으로 옮기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가볍게 백면호리를 든 진무린은 그대로 몸을 날렸고, 모려원이 한 마리 제비처럼 뒤따라 성곽에 도착하자 지켜보던 이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무위들은 시류천성의 시신을 수습해라!”
탄성을 꾸짖는 것처럼 터진 황종관의 지시를 뒤로 한 채 진무린과 모려원은 곧장 별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게 무슨 일이오?”
“눕히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별채에 당도한 진무린은 운진의 질문을 뒤로 한 채 머물던 방으로 백면호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
마교의 본산으로 돌아간 정동추는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처형한 팔십 셋과 가까운 백여 명을 추가로 붙들어 광장에 꿇렸다.
“우리는 죄가 없소!”
“내 목을 노리고자 속닥거린 놈들이 이제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다니! 한 번 더 주둥이를 놀린다면 네 주변의 자들까지 모조리 목을 자를 테니 알아서 해라!”
광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저놈들의 목을 쳐라.”
“명을 받습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도가 번쩍일 때마다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버둥대는 몸뚱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잘린 머리와 널브러진 몸뚱이를 내려다보던 정동추가 몰려든 이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너희 중에 아직 반심을 품은 자가 있더냐!”
마천강기를 끌어올린 정동추가 꾸짖자 모여들었던 교도들이 일제히 바닥에 몸을 조아렸다.
“강함을 숭상하는 것은 본교의 근본이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본교의 미래가 될 젊은 인재가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은 오늘로 끝내겠다!”
마천강기를 끌어올린 정동추 앞에서 교도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후임자의 발전이 있다 해도 하극상은 금한다! 이후 하극상을 벌이는 자는 친족과 배우자, 배우자의 가족까지 모두 참살할 테니 이를 반드시 명심해라.”
“교주의 명을 받습니다!”
우렁찬 답을 들은 정동추는 잠시 숨을 고른 뒤에 몸을 돌렸다.
그가 와병을 핑계로 자리를 보전하던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무리한 모양이었다.
“풋!”
상태가 호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천강기를 끌어올렸던 정동추는 올라온 피를 거칠게 뱉어내고는 집무실을 향해 걸었다.
**
운진과 섬도곤에게 상황을 설명한 직후에 종무헌이 운기에서 일어났고, 잠시 뒤에 백면호리가 의식을 찾았다.
“잠시만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진무린이 방으로 들어섰을 때, 시커멓게 죽었던 백면호리의 낯빛이 반쯤 돌아와 있었다.
“이걸 전해주라 하더군.”
백면호리는 전에 없이 기가 꺾인 얼굴로 허리에 감았던 헝겊을 꺼냈다.
물건을 받아든 진무린은 백면호리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이안공자가 전해달라는 물건이야. 그것이 있다면 벽계의 근거지로 진입할 수 있다고.”
설명을 들은 진무린은 묶지 않은 헝겊을 천천히 펼쳤다.
먼저 모양은 흑판과 비슷했다.
그런데 살펴보면 볼수록 색이며, 형태가 흑판과 거의 동일했다.
“이걸 전하기 위해 그리 달렸어?”
“벽계라는 곳이 귀혼곡은 물론이고, 그 안에 있던 이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말을 하는데 어떻게 가만있어?”
“사용법은?”
“벽계가 설치한 진법 앞에서 펼치면 된다고 하던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진무린은 헝겊을 다시 감쌌다.
“귀혼곡은 무사할 거야.”
“정아는?”
“그곳에서 여고수가 되겠지.”
아픈 얼굴로 웃는 백면호리 앞에서 진무린은 받아든 기물을 품에 넣었다.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출발하자.”
모려원과 종무헌을 향해 지시를 건넨 진무린은 운진을 향해 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진 문주. 반드시 다시 뵙시다. 그래서 천산에 꼭 다녀옵시다.”
“그리하겠습니다.”
답을 전한 진무린은 섬도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좋은 술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구관이 열리면 반드시 그곳에 들어.”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모려원과 종무헌의 손을 잡고 아쉬움을 전하는 운진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진무린이 몸을 돌려 출입문으로 향했다.
포권으로 섬도곤에게 인사한 모려원과 종무헌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