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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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5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91화
은천검제
제191화
황종관과 헤어져 별채로 돌아온 진무린은 세 가지 보물을 앞에 두었다.
“사제는 명심해라.”
평소 진무린답지 않게 무거운 표정과 음성이어서 모려원, 종무헌은 물론이고, 운진과 섬도곤마저 긴장한 채 지켜보았다.
“세 가지 보물이 무공을 증진시켜 준다고 하나 이것은 잠시 빌리는 것이지 절대 사제의 것이 아니다. 노력 없이 얻는 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와 같다. 또한, 이 세 가지 보물은 사제에게 반드시 대가를 받아내려 할 것이다.”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는 모양으로 듣고 있던 섬도곤이 먼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혹여 부질없는 욕망이나 충동이 일어난다면 사제는 그 즉시 세 가지 보물을 버려라. 혼을 판 승리보다 올바른 정신을 남기는 것이 내가 진정 바라는 사제의 모습이다.”
“대사형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진무린이 무겁게 조언했고, 종무헌이 진중하게 답했다.
“사제는 가부좌로 운기 해라. 내가 공력을 전하며 보물의 기운을 조절해주마. 다시 말하지만, 견디기 어렵다면 욕심내지 말고 그 순간 중단해라.”
“명심해서 절대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대사형.”
의자에서 내려선 종무헌은 적당한 공간에 가부좌로 앉아 눈을 감았다.
진무린은 걸음을 옮겨 뒤로 가서 앉았고, 조심스럽게 종무헌의 등에 손을 얹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위엄과 기운이 진무린에게서 뻗쳐 종무헌을 감싼 후였다.
“사매는 먼저 흑판을 건네 다오.”
진무린이 요구했고, 모려원이 조심스럽게 흑판을 들어 종무헌에게 다가갔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흑판은 얇은 철판의 형태처럼 딱딱한 재질이었다.
모려원은 흑판을 종무헌의 뒷덜미 아래에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딱딱하던 흑판이 종무헌의 목덜미 아래에 닿기 무섭게 부적처럼 유연하게 변하더니 문신을 한 모양으로 달라붙었다.
변화는 바로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운진이 느끼기에도 종무헌의 몸에서 또렷하게 기운이 뻗쳐나온 까닭이었다.
“흥분하지 마라. 이는 잠시 빌리는 것뿐이니 맨손이던 사제가 다른 이의 검을 빌리는 것과 같다.”
일각의 시간이 흘렀다.
“옥환을 다오.”
진무린의 말에 모려원이 옥환을 집어 종무헌의 오른손 검지에 걸었다.
모려원이 한 걸음 물러났는데도 금편과 같은 기운을 뿜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직후에 종무헌의 정수리에서 아지랑이와 같이 기운이 또렷하게 피어났다.
“사매.”
진무린이 곧바로 모려원을 불렀다.
의미하는 바를 짐작한 모려원이 마지막으로 금편을 잡아 종무헌의 오른손 팔뚝에 감았다.
“정신을 집중해. 세 가지 보물은 날뛰는 세 마리의 야생마를 얻은 것과 같아서 반드시 그 힘을 길들여야 한다.”
진무린은 제법 오래도록 종무헌의 등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얼굴이 붉게 물들었던 종무헌은 잠시 뒤에 심하게 아픈 사람처럼 창백해졌다가 이후 원래의 혈색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때쯤 진무린은 종무헌의 등에 올리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어찌 되었소? 종 소협은 무탈하시오?’
걱정하는 운진의 시선을 향해 진무린은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귀혼곡을 빠져나오기 전부터 찜찜했던 백면호리였다.
‘위험해. 좋지 않아.’
백면호리 특유의 감이 계속해서 경고를 던지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잠시 걷기라도 했을 텐데 백면호리는 귀혼곡을 나서기 무섭게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목표는 정도맹이었다.
아무리 백면호리를 노리는 자가 있다고 해도 감히 정도맹에 들어서지는 못할 테고, 설혹 그런다고 해도 진무린과 황종관이 있는 한,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귀혼곡을 빠져나온 직후에 백면호리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아래로 내달렸다.
바닥에 내려선 그가 앞쪽 산을 향해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섬뜩한 기운이 뒤에 붙었다.
‘히익!’
겁이 덜컥 난 백면호리는 죽을 힘을 다해 내달렸다.
멈추란 경고 따위 없었다.
그러면서도 강렬한 기운은 백면호리를 잡으려 드는 맹수처럼 따라붙었고, 한 걸음도 멀어지지 않았다.
‘이익!’
진무린조차 인정했던 백면호리의 경공이었다.
천부적인 재능에 잘못 익힌 내공을 더한 터라 통상 무인이 발휘하는 경공과는 궤가 달랐다.
그런 백면호리가 죽음을 피하고자 악착스럽게 달리는 참이었다. 그런데도 따라붙은 강렬한 기운은 한 치도 멀어지지 않았다.
‘귀혼곡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달리며 백면호리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만약 평소처럼 걸었다면 이미 백면호리는 시체가 되어 그 앞에 널브러져 있을 일이었다.
강호가 벽계의 손에 넘어가면 귀혼곡은 말할 것 없고, 요정 또한 살아남지 못한다고 이안공자가 말하지 않던가.
이 정도로 따라붙을 정도라면 벽계말고는 짐작 가는 곳조차 없었다.
따라붙는 자의 정체를 짐작한 백면호리는 그야말로 한 마리 새처럼 달렸다.
늘 조심해서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는 법이 없던 그였으나 지금은 지나간 자리마다 흙가루가 허공으로 피어났고, 나무와 풀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꺄아!’
백면호리는 절벽을 뛰어내리며 신음을 삼켰다.
이렇게 요란하게 달리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콰직!
그러나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어서 밟은 자리의 나무가 부러질 정도로 바쁘고 거칠게 내달렸다.
산과 산 사이의 공터를 내달려 다시 위로 오르는 순간,
휘이이익!
그의 뒤편에서 무섭게 솟구치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귀신인 줄 알았다.
백면호리를 향해 솟구치는 모습이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잡히면 죽는다.
이를 악물고 달리며 달리는 백면호리의 코에서 마침내 피가 번져 나왔으나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진 대협! 나 살아야 해!’
살면서 이 정도로 독하게 달려본 적 없는 백면호리가 떠올린 마지막 희망은 진무린이었다.
저토록 무서운 무인을 감당할 사람은 이 강호에 진무린밖에 없다.
**
지켜보던 진무린이 옅게 웃은 다음이었다.
마침내 종무헌이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종무헌은 먼저 진무린을 향해 깊게 몸을 숙였다.
“대사형께서 바로 잡아주시지 않았다면 소제는 분명 기운에 사로잡혀 근본을 잊었을 것입니다. 빌린 것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소제의 힘으로 이 경지를 얻겠습니다.”
“이제는 방에 들어가 운기를 한 번 더 하도록 해. 그 뒤에 출발하겠다.”
“예, 대사형.”
답을 한 종무헌은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
“사제의 운기가 끝나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진 문주. 노도가 함께하는 것은 어렵겠소? 비록 보잘것없는 실력이나 노도의 술법이 도움 되는 일이 없는지 다시 살펴봐 주시오.”
“형님. 소제도 데려가 주십시오.”
벽계의 근거지를 찾아가는 일의 어려움을 짐작한 운진과 섬도곤이 진무린에게 매달렸다.
“문주께서는 벽계가 발호했을 때, 맹주와 구대문파에 힘을 실어주셔야 합니다. 아우는 교주를 모셔야 하는 위치이니 감정에 휩쓸려 판단하지 마라.”
진무린은 두 사람의 요청을 각기 다른 이유로 거절했다.
“벽계를 무너트리고 돌아온 뒤에는 문주를 모시고 본문에서 천산까지 유람을 떠나볼까 합니다. 문주와 함께 천산을 방문하면 교주와 아우가 극진한 대접을 해주지 않겠습니까?”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럽시다, 진 문주. 우리 꼭 강호를 돌아보며 함께 시간을 보냅시다.”
“형님이 오신다면 제가 천산의 모든 음식과 술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교주의 마천강기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냐?”
“소제는 맷집이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도 섬도곤은 밝게 대꾸했고, 진무린과 운진, 지켜보던 모려원마저 밝게 웃었다.
“형님. 그럼 소제는 천산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그도 나쁘지 않겠다. 교주를 뵙거든 내 인사를 대신 전해다오.”
“그리하겠습니다.”
우직한 섬도곤의 인사에 진무린은 넉넉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
황종관은 책상에서 매섭게 눈을 들었다.
“분명 윤고성 전임 단주라는 보고입니다. 비월단 여섯이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새벽이라 했나?”
“닭이 울기 직전에 전중방을 나섰다는 보고였습니다. 홀로 나왔고, 그 직후에 의심스러운 기운을 느끼기는 했으나 눈으로 확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윤고성은 어디로 향하고 있나?”
“뒤따른다는 보고 뒤에 추가로 들어온 연락이 없어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황종관은 눈매를 매섭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비록 윤고성이 향하는 방향을 알아내지 못했으나 전중방에서 새벽에 일어난 일을 점심 직전에 보고하는 것만으로도 비월단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전중방은?”
“이전과 변함없습니다. 이미 몰락한 방파인 데다 제자들마저 하나둘 사라져 몸져누운 방주의 식솔 여섯과 노복 둘, 시비 한 명이 전부입니다.”
황종관의 시선을 받은 염기가 얼른 입을 열었다.
“지금껏 지켜본 바로 전중방은 진법이 있음을 아예 모르는 눈치입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맹주께서 명을 주신다면 저 역시 전중방이 모르게 진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황종관의 질문에 염기는 망설이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대화가 얼추 끝났을 때였다.
부관이 조심스럽게 집무실로 들어섰다.
“진 문주께서 맹주를 뵙고자 합니다.”
“그래? 어서 모시게. 자네는 이만 가보고 관련된 보고가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알려줘.”
“예, 맹주.”
부관과 함께 염기가 나가고 곧바로 진무린이 들어섰다.
“앉게.”
자리에서 일어난 황종관은 집무실 안쪽에 놓인 탁자를 가리켰다.
“세 가지 보물을 사제가 갈무리했습니다.”
“부작용은 없던가?”
“제가 운기를 도왔는데 아직 특별한 이상은 없었습니다.”
“문주가 나섰다면 내가 공연한 질문을 했던 게지. 얻은 것은 있었나?”
말을 돌렸던 황종관이 결국 궁금하던 질문을 은근슬쩍 내놓았다.
“기의 흐름이 평소보다 굉장히 빨랐고, 상단전의 개방을 돕는 느낌은 받았습니다. 다만, 사제가 홀로 상단전을 개방한 적이 없어 효능은 검을 내봐야 알 것 같습니다.”
“흐음.”
진무린의 답을 들은 황종관은 먼저 답답한 심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궁금해서 다시 물어보네.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만 얻어도 강호를 울린다고 하지 않았나. 문주가 보기에 어떤가. 혹여 문주의 무공이 너무 높아 세 가지 보물이 주는 효능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닌가.”
“사제의 경지는 구대문파 문주의 윗길 정도입니다. 솔직히 기대한 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당장 보기에는 그다지 큰 효능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진무린은 과장하지도 않지만, 얻은 것이 있는데 숨길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난 세월 세 가지 보물을 얻기 위해 그토록 많은 이들이 죽은 이유가 헛된 소문에 휘말려서란 말인가?”
“적을 만나 실제로 무공을 발휘하는 것을 봐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답을 한 진무린은 품에서 세 가지 책을 꺼내 황종관에게 내밀었다.
“고맙네. 구대문파와 의논해서 진 문주와 은천문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함세.”
책자를 받은 황종관은 염기에게 들은 보고를 진무린에게 전해주었다.
“맹주. 태상의 부상이 가볍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결사항전을 벌이거나 시간을 벌고자 나설 텐데 어떤 목적이든, 반드시 강호에서 중요한 이들을 노릴 것입니다.”
“그렇게 보아야 할까? 보고에 나선 이가 없다고 되어 있는데?”
“벽계의 인물들이 마음먹는다면 비월단의 눈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문주의 조언을 가슴에 두고 조심 또 조심하지. 출발은 언제로 할 참인가?”
“점심을 먹고 바로 하겠습니다.”
진무린을 보며 황종관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오전에 정자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이미 짐작했다.
벽계를 향하는 진무린의 의지가 어떤 것인지를 말이다.
죽음을 각오하는 길에 나서며 이토록 덤덤하고 차분한 인물이 강호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태상과 벽계의 근거지를 무너트리고 돌아오면 오전의 그 정자에서 나와 다시 한 번 차를 나눠주게.”
황종관의 청을 들은 진무린은 보기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런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술을 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군! 내 생각이 짧았어! 그렇다면 내 강호에서 가장 좋은 술을 구해 기다리지.”
황종관은 과장된 음성으로 진무린의 대꾸를 받았다.
“좋은 술을 준비하시리라 믿고 일어서겠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끝에서 진무린이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