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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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89화
은천검제
제189화
모려원과 종무헌의 입장에서는 느닷없는 재회였다.
밤이 깊어가는 시각에 진무린이 들어서자 급하게 몸을 일으킨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제자 모려원이 문주를 뵙습니다.”
“제자 종무헌이 문주를 뵙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두 사람이 에둘러 선택한 축하 인사였다.
진무린은 두 사람을 향해 보기 좋은 얼굴로 웃었다.
“인사는 그 정도면 됐다. 이렇게 만났는데 그 무슨 불편한 모습이냐?”
두 사람이 고개를 든 뒤였다.
“양 사고께서 문주를 대할 때도 사저와 사제의 호칭을 사용했는데 너희 두 사람은 어째서 간격을 두지? 내가 싫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전에 없이 넉넉한 진무린의 태도였다.
비록 문주가 되었더라도 사형제 간의 우애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같았다.
모려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사형. 몸은 괜찮으세요?”
“화산에서 운기할 시간을 얻은 덕분에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두 사람 모두 고생했다.”
말을 마친 진무린은 고개를 돌려 방을 보았다.
“문주는 유광을 다녀온 뒤에 바로 달린 여독이 꽤 남은 모양이에요. 섬도곤은 부상의 여파가 남았고요.”
모려원의 설명에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앉자.”
셋이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진무린은 먼저 태상과의 싸움, 정동추를 수신호위에게 당부한 일, 마지막으로 화산에서 보고 느꼈던 일들에 관해 두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이 기회를 노릴 생각이다.”
말끝에서 진무린은 생각하고 있던 바를 꺼냈다.
“전중방을 통하면 벽계의 근거를 찾을 거라 짐작한다. 지금이 태상을 잡을 가장 적기라 생각한다. 그가 몸을 회복하고 나면 또 어떤 희생을 감당해야 할지 알기 어렵고.”
“대사형께서 태상을 상대하는 동안 남은 벽계의 인물을 감당해 줄 필요가 있는 거네요.”
“그렇지.”
맥을 짚어내는 모려원을 향해 진무린은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매가 등룡창천을 얻었으니 벽계의 인물 하나둘을 상대하리라 본다.”
“남은 벽계의 인물이 얼마나 되리라고 짐작하세요?”
“쉰 명쯤 되지 않을까?”
진무린이 답을 내었을 때, 종무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 중요한 순간에 묵룡검법조차 대성하지 못해 도움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주는 자괴감을 이기기 어려운 눈치였다.
“사제.”
“예, 대사형.”
“그래서 방법을 바꿀 생각이다. 내가 먼저 태상을 제외한 인물들을 모조리 쓰러트릴 참이지.”
“그리하면 태상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사제가 사매와 함께 태상을 맡아라.”
어쩌면 터무니없게 들릴 지시를 진무린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었다.
놀라운 것은 또 종무헌의 답이었다.
“소제의 몸이 갈가리 찢기고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대사형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섶을 지고 불길로 들어가라는 지시와 다를 바 없는 명을 받았음에도 그는 한 치의 고민 없이 독한 각오를 내놓았다.
“세 가지 보물에는 각기 효능이 있다. 알고 있냐?”
“소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종무헌이 솔직하게 답한 다음이었다.
“사매는 알고 있지?”
“옥환은 기운을 차게 하는 성질이 있으며, 냉기를 돌게 하는데 착용하면 상단전을 개방하는 효능이 있다고 들었고.”
설마, 옥환을 사용하라는 말씀일까?
종무헌이 놀라고 기대하는 심정에 마른 침을 삼켰는데 모려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흑판은 내공을 증폭시키는 것은 물론, 호신강기와 같은 효능을 하고. 마지막으로 금편은 검기를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고 들었어요.”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종무헌을 돌아보았다.
“세 가지 보물을 이용해 힘을 얻어. 그리고 내가 벽계의 다른 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할 때까지 사저와 함께 태상을 막아다오.”
“소제 종무헌, 대사형의 명을 받습니다!”
최후의 결전에서 빠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종무헌의 음성에는 힘이 가득했고, 또 목소리 또한 높았다.
그 탓일까.
문이 열리며 운진이 바깥으로 나섰다.
“진 문주!”
“일어나셨습니까?”
“무탈하셨구려!”
가식이라고는 터럭만큼도 담기지 않은 표정과 음성으로 달려온 운진이 진무린의 손을 잡았다.
“정말 괜찮은 게요?”
“그렇습니다. 모두 문주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노도의 염려 따위가 어찌 도움 되셨겠소?”
한바탕 반가운 인사가 지나간 다음이었다.
다시 옆의 방이 열리며 섬도곤이 나섰다.
“형님!”
“아우는 몸이 어떠냐?”
“당장 목을 뽑을 자가 있다면 이름만 알려주십시오!”
“사제가 독한 각오를 내세우더니 아우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구나.”
달려온 섬도곤에게 진무린은 정동추의 일을 가감없이 전해주었다.
“위태로운 상황이기는 하나 천산으로 향한다 했으니 교주께서 몸을 일으키는 데는 지장이 없을 테니 너무 근심하지 마라.”
“사부님께서는 반드시 교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하셨다면 반드시 절치부심 복수를 계획하실 분입니다. 당장 벽계의 잔당을 직접 처리하시려 들 테고, 그러려면 교의 힘이 필요합니다.”
우직하고 강직하게만 보이던 섬도곤의 날카로운 추리였다.
그렇게 합류한 운진과 섬도곤을 위해 진무린은 다시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는 것은 천추의 한이 될 일이다. 남은 것은 전중방을 통해 벽계로 들어가는 통로를 확보하는 일이라 하루나 이틀 여유를 보며 세부적인 계획을 세울 참이다.”
의논은 대강 그쯤에서 끝났다.
진무린은 모려원을 향해 아쉬운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둘만의 시간을 잠시라도 가졌으면 싶은데 한숨 자고 나온 운진과 섬도곤은 아예 일어설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종무헌은 이때 진무린과 모려원의 시선이 이전과 다름을 알았다.
‘그렇구나!’
고개를 떨구고 슬며시 미소를 짓는 종무헌을 보며 진무린과 모려원이 또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대사형. 이제 운기를 하셔야 하지 않아요?”
마침내 기회를 노린 모려원이 권했고,
“이런! 노도가 반가운 마음에 너무 시간을 끌었구려! 어서 몸을 추스르시오, 진 문주.”
그제야 운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진무린을 재촉했다.
“대사형. 소제가 사용하는 방이 조용합니다. 소제가 호법을 설 수 있으니 그리 모시겠습니다.”
“그럼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편히 하시구려, 진 문주.”
“나중에 뵙겠습니다, 형님.”
종무헌의 권유를 받은 진무린이 방으로 들어가면서 운진과 섬도곤도 다시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간 진무린은 실제로 침상 옆의 적당한 곳을 골라 가부좌로 앉은 뒤에 검을 다리에 걸쳤다.
정도맹의 별채이고, 사제 종무헌이 호법을 서주는 참이라 편하게 운기하기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대사형.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무슨 일이냐?”
바닥에 앉은 진무린은 시선을 들었다.
“소제가 먼저 운기하는 바람에 사저도 운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 기회에 사저도 대사형과 함께 운기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진무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는 앞에서 종무헌은 평소 보이지 않던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려냈다.
“대사형과 사저가 운기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소제는 문 앞에서 호법을 서겠습니다.”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려는 종무헌의 노력을 진무린은 가벼운 웃음으로 받았다.
양손을 잡아 보인 종무헌이 나가고 나서였다.
잠시 뒤에 모려원이 방으로 들어섰다.
반갑고, 기쁜 마음에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진무린은 가까이 다가온 모려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뒤에 진무린은 모려원을 가볍게 당겨 조심스럽게 안았다.
모려원 또한 팔을 들어 진무린의 가슴을 안아서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서로를 느끼며 시간을 보냈다.
“사제의 눈치가 제법이다.”
“소매가 대사형을 보는 눈빛이 너무 표시 났을까요?”
“나는 내가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운기하세요. 소매도 옆에서 함께할게요.”
“그러자.”
가볍게 웃은 두 사람은 바닥에 자리하고 운기에 들었다.
**
요정을 다시 본 백면호리의 기쁨은 이루 말할 것이 없었다.
잘못된 운기 탓에 다리를 절었던 요정이 지금은 백면호리조차 깜짝 놀랄 경공을 펼칠 정도로 성장했고, 심지어 고수의 기운마저 뿜어내는 것이 아닌가.
“수련이 힘들지는 않아?”
“아빠가 이렇게 만들어준 거잖아. 나는 복이 많은 거 같아.”
“무슨 복?”
“진 숙부, 모 이모, 종 숙부를 뵙고, 귀혼곡에 와서 영약도 먹었고, 사부님께 소수음공도 익혔잖아. 사실 아빠가 다 만들어준 거라 내 가장 큰 복은 아빠 딸로 태어난 거야.”
말을 하고는 허리를 안는 요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면호리는 어울리지 않게 눈시울을 붉혔다.
요정이 펼치는 소수음공을 본 백면호리는 경공을 발휘할 때 느꼈던 점을 아낌없이 전해주었다.
피가 섞여서 그럴까.
요정은 특히 바위를 올라 건너편으로 내려설 때 소리조차 나지 않는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조금 전에 들은 요령을 터득하겠답시고 요정이 멀리 달려간 참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다가왔다.
“이안공자요.”
“이 밤에 어쩐 일인가?”
“의논할 것이 있어 왔소.”
의심스러운 눈빛을 먼저 보인 백면호리가 마당에 놓인 나무 탁자를 가리켰다.
“아까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소.”
“무슨 말?”
“마른 장작은 불을 피우기 전에 주라는 말 말이오.”
“그걸 뭘 계속 신경 써? 하지 마! 잊어!”
어쩐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을 알아챈 백면호리가 손을 저어가며 이안공자를 만류했다.
“전중방에 벽계로 향하는 진법이 있다는 말을 들었소. 이것을 진 대협에게 전해주시오.”
백면호리의 반응을 익히 보고서도 이안공자는 소매에서 헝겊으로 싼 주먹만 한 물건을 내놓았다.
“이게 뭔가?”
“전중방에 있는 진법이 진정 벽계의 것이라면 이 물건이 그 진법을 와해시킬 거요.”
시선을 내려 헝겊을 본 백면호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나더러 이걸 진 대협에게 전해주란 말인가? 자네를 안다시피 하고 죽어라 달려서 오늘 귀혼곡에 도착한 나더러?”
“미안하게 되었소.”
“안 가. 못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에 이안공자는 말없이 헝겊을 잡아 다시 품에 넣었다.
“누가 뭐래도 귀혼곡은 안전할 거잖아. 바깥은 그들대로 알아서 하겠지. 그러니 자네는 모두 잊고 귀혼곡에서 편하게 지내. 알았지?”
“벽계는 구주를 눈엣가시로 여기오. 진 대협이 진중탈구검을 퍼트리는 통에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졌을 테고. 그런 자들이 강호를 손에 넣으면 이 귀혼곡이 무사하겠소?”
“이곳이 왜? 강호를 휘두르기도 바쁠 그들이 뭐 얻을 것이 있다고 귀혼곡을 노려?”
“나와 루주는 구주의 후예요.”
딸꾹질이 나온 사람처럼 백면호리는 멈칫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벽계가 강호를 손에 넣으면 정아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게요. 사부가 구주의 사람인 데다 귀혼곡에서 무공을 익혔으니 저들이 보기에는 구주의 사람이라 여기지 않겠소?”
“이게 무슨…….”
“진 대협이 은천문의 문주가 된 모양이오. 백면호리의 말씀대로 지금이 마른 장작을 감출 것인지 내놓을 것인지를 결정할 순간이오.”
백면호리의 말이 떨어졌을 때였다.
느닷없이 달려온 요정이 나무로 만든 담장을 훌쩍 넘어 탁자 앞에 내려섰다.
“우리 정아의 경공이 이제는 부친을 능가하는구나!”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이제는 정말 강호에 나서도 되겠다.”
이안공자의 칭찬이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백면호리에게 다가간 요정이 쑥스럽게 웃었다.
“그럼 나는 이만 일어나겠소. 새벽에 일찍 길을 나설지 모르니 그리 아시오.”
“어딜 가려고?”
“어쩌겠소? 뒤늦게나마 깨달았으니 지금이라도 바로잡을밖에. 어차피 귀물이 이곳에 있어서 귀혼곡으로 돌아왔어야 할 참이었소.”
“그 몸으로 혼자 나서겠다고?”
“성이를 데리고 갈 생각이오.”
말을 마친 이안공자가 몸을 일으켰다.
“정아야. 이만 간다.”
“네. 조심해서 가세요.”
“오냐.”
넉넉하게 미소 지은 이안공자는 정말이지 미련조차 남지 않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마른침을 삼킨 백면호리는 돌아서 가는 이안공자의 뒷모습과 요정을 번갈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이안공자의 모습이 담장을 돌기 직전이었다.
“거기서!”
백면호리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아빠?”
놀란 요정이 백면호리를 부른 다음이었다.
“정아야. 아빠가 강호를 구할 보물을 진 대협께 가져다줘야 하거든. 그걸 할 사람이 이 강호에 아빠밖에 없네.”
“그럼 아빠가 강호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 거야?”
“그런가? 그렇지! 그렇게 되지!”
연신 고개를 끄덕인 백면호리가 어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담장 앞에 선 이안공자를 바라보며 백면호리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쩐지 절대 나서면 안 되는 일에 발을 디딘 것 같은 불길함이 백면호리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