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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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87화
은천검제
제187화
바로 일어설 생각이었으나 진무린은 화산의 풍광을 보며 잠시 더 자리에 머물렀다.
진무린과 함께 있는 시간이 그저 좋은 표충량은 언제 일어날지를 묻지 않은 채 함께 있는 시간에 감사한 눈치였다.
무엇을 해야 할까.
진무린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산, 그리고 그 두 개가 마주친 곳을 바라보며 앞으로 일을 정리했다.
태상이 큰 부상을 입은 지금, 벽계의 근거지를 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정동추는 두 번에 걸친 큰 내상으로 시간이 필요하고, 은천문의 전도위와 임운령, 심지어 파천신군마저 당장은 힘을 쓰기 어려웠다.
문제는 역시 태상이었다.
그의 가슴을 베었으나 단둘이 마주한다면 진무린은 절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
진무린은 고개를 돌려 표충량을 돌아보았다.
십 년쯤 뒤라면 가능할까.
재능이 있고, 부단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표충량이 제대로 성장한다면 벽계를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시선을 하늘로 돌린 진무린은 옅게 웃었다.
표충량이 스물의 나이가 된다면 진무린은 임운령이나 엄소동처럼 한 걸음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십니까?”
“답답한 일이 있는데 쉬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진인께 여쭤보면 답을 주시지 않을까요?”
청강 진인이 신선이 되었으리라 장담한 터라 진무린은 부러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미 숙부의 고민을 알고 계실 거다. 적의 근거지를 짐작하고, 최고수라는 자의 가슴을 베었으나 함께할 인물이 부족하니 이점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대화의 끝에서 진무린은 갑갑한 점을 실제로 설명했다.
“답을 주십니까?”
“진인께서도 고민하시는 모양이다.”
희한한 일이었다.
표충량과 함께 앉아 막막한 점을 털어놓고 나자 마음이 한결 후련했다.
잠시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소질이 도움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표충량의 나직한 음성이 진무린을 깨웠다.
이 아이가 도움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한다?
진무린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꽉 막힌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도 있었다.
만약 진무린이 표충량의 입장이라면 어떠할까?
임운령, 전도위, 정동추라면?
강호에 살며 검을 든 자의 숙명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진무린은 먼 하늘을 보며 뜻을 굽히지 않고 마지막까지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던 엄소동을 떠올렸다.
죽음을 직감하면서도 벽계와 마주친 그가 전해주고자 했던 것은 승리가 아니라 굴하지 않는 정신이었을 거다.
“정도맹으로 향해야 할 시간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진무린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언제 또 숙부를 뵙습니까?”
“조만간 보게 될 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표충량의 어깨를 진무린은 가볍게 다독여주었다.
“가자.”
이어 진무린이 낙안봉 정상을 향해 치솟자 표충량이 얼른 그 뒤를 따랐다.
**
정도맹 앞으로 몰려드는 무인들의 숫자는 한겨울의 폭설처럼 불어나 정문 앞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정도맹과 맹주는 삼보의 처리 방법을 밝히시오!”
누군가 고함을 지르면 각종 무기를 든 무인들이 뒤따라 함성을 질렀다.
정도무림맹이었다.
사파에 속한 고수들까지 몰려와 공정한 처리를 요구하는 것이 우습기는 했는데 욕심이 앞선 탓에 누구 한 사람 다른 말을 내지는 않았다.
점심을 앞둔 시점에 황종관은 마침내 정도맹의 정문으로 향했다.
“맹주께서 나오십니다!”
위병들이 내공을 담아 외쳤고, 맹주를 상징하는 깃발이 줄줄이 정문의 위로 올라간 뒤에 황종관이 정문 성곽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에서 이리 몰려왔을까.
정도맹 앞의 길을 따라 무인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물결을 보는 것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맹주 황종관이오.”
내공에 실린 황종관의 음성이 바람결처럼 멀리 이어졌다.
“삼보를 확보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정도맹의 소유가 아니라 은천문의 소유요.”
황종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마철 개구리울음처럼 정도맹 앞에 웅성대는 소리가 크게 피어났다.
“은천문은 소문만 무성한 곳이 아닙니까!”
누군가의 고함이 달려온 다음이었다.
“흑사련과 마등을 상대한 곳이 은천문이오! 또한, 은천문은 삼보의 활용에 관해 본맹에 전권을 위임하겠다고 했으니 그 방법을 결정하는 대로 다시 알려드리겠소!”
황종관의 답이 떨어지자 또다시 소란이 크게 일었다.
“삼보에는 무공이 있다 들었소! 은천문이 무공을 모두 빼돌릴 시간을 버는 것은 아닙니까!”
또다시 고함이 들리자 황종관은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뉘신지 밝히신 뒤에 말씀을 듣겠소.”
황종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몰려 있던 무인 중 한 사람이 몸을 솟구쳐 정도맹 앞의 다점 지붕 위로 올라섰다.
“본인은 시류천성 주도배라 하오.”
그가 양손을 맞잡고 신분을 밝히자 재차 웅성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과 사의 중간쯤에 걸쳐 움직이며 한 자루 부채를 판관필처럼 사용하는데 위기 때면 부채살을 날려 승기를 잡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시류천성을 이리 뵙다니 반갑소. 답변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물읍시다. 시류천성은 내가 하는 말을 신뢰하시오?”
“그야 들어보고 판단할 일이 아닌가 하오.”
참으로 건방진 대꾸였는데 황종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의 직과 내 이름값을 내세운다면 믿겠소?”
황종관의 다부진 질문에 주도배는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은천문이 무공을 빼돌리지 않는 것에 맹주의 직과 내 이름값을 걸겠소. 또한, 하루 이틀이면 은천문의 문주가 맹을 방문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으니 조만간 삼보를 어떻게 활용할지 밝히겠소!”
황종관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삼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멀리서 고함이 들렸다.
“은천문의 문도가 본맹에 머물며 소지하고 있소!”
“구경이라도 해야 믿을 것 아닙니까?”
황종관의 답변에 꼬리를 문 것처럼 질문이 있었다.
“그대가 누구기에 감히 맹주인 나의 이름값을 가벼이 여기느냐!”
우르릉!
지금껏 잘 대꾸하던 황종관이 느닷없이 고함을 버럭 지르자 정도맹의 앞에 급한 침묵이 자욱하게 깔렸다.
“내 이름값으로도 믿기 어렵다는 자가 있다면 나서라! 정도무림을 대표하는 맹주의 자격으로 상대하마!”
또다시 황종관이 고함을 질렀으나 아까 질문을 던졌던 이는 대꾸가 없었다.
황종관은 확인하는 것처럼 아직 지붕 위에 서 있는 주도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천성이 나서기를 좋아해서 그렇지, 주도배는 황종관의 적수가 되기에 부족함이 많았다.
“본인은 맹주께서 하신 말씀을 믿소.”
그가 양손을 잡아 뜻을 밝히자 더는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이틀이면 충분할 것이오! 그 안에 삼보에 담긴 무공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밝힐 테니 여러분은 이만 물러가 주시오!”
양손을 잡은 황종관이 좌우로 크게 몸을 돌리는 것으로 소란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황종관이 내려가고 나서도 흩어지는 무인들은 몇 되지 않았으니 이틀을 정도맹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
태상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싼 뒤에 환약을 삼켜 치료를 마친 태상은 침상을 거절하고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가라앉은 눈과 이전과 다른 숨소리로 보아 그는 상처보다 진무린에게 당했다는 치욕을 감당하기 어려운 눈치였다.
그가 앉아 있는 앞으로 구대문파와 세가를 방문하고 돌아온 이들이 속속 보고를 마쳤다.
“소림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백팔나한이라는 것들이 나섰으나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였습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소식에 태상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릴 때였다.
상체를 숙인 자가 양손을 맞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태상. 화산에 파견했던 송방이 진무린이란 자에게 당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내내 잘 견뎠다.
분노를 조절했고, 화를 이겨내던 태상은 그 보고를 들은 직후에,
“푸훅!”
커다랗게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입가와 수염에 피를 담뿍 묻힌 태상은 더할 수 없이 분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진무린이란 놈이 어떻게 그곳에 있단 말이냐.”
누군들 지금 태상의 말에 답을 할 수 있겠나.
또한, 태상이 당혹해 하는 것 이상으로 앞에 선 수하들 역시 놀라는 심정이었다.
“기가 막히는구나. 하후도를 겨우 상대하던 놈이 그사이 성장해서 내게 검을 들이대고, 계획을 모두 망쳐놓다니.”
태상은 혼잣말을 늘어놓은 뒤에 대전의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벌써 놈에게 당한 인원이 오십을 헤아린다. 구주를 경계하며 보낸 지난 세월이 끝나는 시점에 어찌해서 하늘은 그런 놈을 내려 보내 수백 년 염원을 외면하시는가.”
혼잣말을 마친 태상이 고개를 떨구자 대전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조만간 결단이 있으리라.
태상의 앞에 선 이들은 태상이 내릴 결단을 기다렸다.
**
점심이 지난 시간이었다.
황종관은 무거운 얼굴로 거빈각의 별채로 향했다.
모려원과 종무헌은 운기를 마쳐 대략 기운을 수습한 얼굴이었고, 운진과 섬도곤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점심들은 했나?”
“좀 전에 해결했어요. 문주와 섬도곤은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아 방에서 머물고요.”
모려원의 답이 있은 뒤였다.
황종관은 틈을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진 문주가 화산에 있는 모양이네.”
“그게 정말인가요? 교주는요?”
“우선 진 문주에 관한 보고가 전부일세. 당장 짐작하는 건 화산만큼은 참극에서 빠져나간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지.”
내내 진무린에 대한 염려를 안고 있던 모려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종무헌을 돌아보았다.
“바깥은 어떤가요? 맹주께서 내공을 담아 말씀하신 덕분에 대강 짐작은 하는데 그렇더라도 이틀 뒤에는 답을 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소란은 줄어들었네만 대부분 자리를 지키고 있지. 손에만 넣으면 세상을 흔들 무공을 얻는다는 세 가지 보물이 아닌가. 무공을 익혔던 자는 모두 영웅이 되는 꿈을 꾸게 하지.”
바쁜 시기였다.
그런데도 황종관이 찾아와서 한가한 소리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일이었다.
황종관을 살핀 모려원은 궁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와 사제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세요?”
질문을 받은 황종관은 먼저 확인처럼 창을 돌아보았다.
“이틀 뒤까지 진 문주가 맹에 도착하지 않으면 삼보를 걸고 영웅대회를 개최할 생각이네.”
“맹주의 뜻이 그렇다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진 문주의 의견을 듣지 않아도 되겠나?”
“이곳으로 향할 때 이미 맹주의 지시에 따르라는 말씀이 있었어요. 도착하자마자 삼보를 드렸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구요. 맹주께서 판단하세요.”
“고맙네.”
모려원은 흔쾌한 답을 들은 황종관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은천문과 진 문주가 있어 정말 다행이네.”
그가 혼잣말처럼 말을 건넸으나 모려원은 답을 내지 못했다.
지금은 진무린이 무탈하다는 소식이 그 어떤 말보다 반가운 까닭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집무실로 돌아가지.”
반가운 소식을 전한 황종관이 별채를 나간 다음이었다.
“문주께서 화산에 가실 정도라면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닙니까?”
입을 닫고 있던 종무헌이 반가운 얼굴로 질문을 건넸다.
“그랬으면 좋은데 문주의 성품으로 봐서 부상이 있더라도 가셨을까 봐 그 점이 걱정이지.”
모려원의 현명한 대꾸에 종무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에 관한 보고가 없다는 것은 문주 홀로 화산에 가셨다는 말과 같아. 필시 교주의 부상이 심하다는 뜻으로 봐도 되고.”
그제야 종무헌은 진무린 역시 부상을 입었으리란 짐작을 하는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최후를 염려할 정도의 적을 상대하고도 화산을 향했을 정도라면 아마 결단을 내려서 이리 오실 거야. 사제도 각오를 단단히 해 둬.”
“예, 사저.”
모려원의 짐작에 종무헌이 단단하게 답을 냈다.
**
화산을 벗어난 진무린은 곧바로 정도맹으로 향했다.
고민할 것 없다.
방법도 정했다.
은천문과 화산에 진중탈구검을 전했으니 더는 걸릴 것도 없었다.
무모할 것 같지만, 태상이 부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되는 일이었다.
진무린은 무서운 속도로 산을 가로지르며 정도맹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룡창천을 깨달은 모려원이 있고, 은천문 그 누구보다 용맹한 종무헌이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계획이었다.
‘이번에 끝낸다.’
진무린은 의지를 담뿍 올린 눈으로 앞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