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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86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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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86화

은천검제

제186화

 

침입자의 시신을 치우고, 쓰러진 제자들을 수습하라 지시한 다음이었다.

방문객을 대접하는 공간이 분명하게 있으나 은혼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진무린을 장문인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차를 권한 은혼은 진무린이 목을 축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문주의 직에 오르셨습니까?”

“문주와 사부께서 강권하시는 바람에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현실이 어려운 탓에 축하를 입에 올리기는 어려우나 은천문의 발전을 미리 보는 것 같아 그 점이 무엇보다 반갑습니다.”

은혼이 양손을 잡으며 새로운 문주가 된 진무린에게 덕담을 건넬 때 아침 식사가 들어왔다.

화산의 검소한 아침을 함께 드는 동안, 진무린은 그동안 은천문과 강호에서 있었던 일을 쭉 설명했다.

“진 문주. 다른 점은 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납득 가지 않는 일이 있으니 량아와 관련된 일입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뒤에 은혼이 궁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본파는 량아를 구관에 보낼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미 정도맹에도 그렇게 의견을 내었는데 어떻게 벽계가 량아를 정해 달려왔는지 그 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구관에 들어갈 정도의 인재라 이해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정도맹의 전임 비월단주가 벽계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량아에 관한 내용은 그렇게 넘어갔으리라 짐작합니다.”

“정도맹의 비월단주를 지냈던 자가 사리사욕에 휘둘리다니 참으로 혼란한 시기입니다.”

은혼의 탄식에 진무린은 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무거운 숨소리가 흐른 뒤였다.

“장문인. 벽계의 무공을 파훼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중탈구검을 량아에게 전할까 합니다.”

진무린의 제안에 은혼이 놀란 듯 시선을 들었다.

“장문인과 량아에게 먼저 전할 테니 이후 화산의 제자들이 익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벽계를 상대할 검법을 누군들 이토록 쉽게, 그리고 사심 없이 풀어낼 수 있을까.

은천문과 진무린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바라지도 생각지도 못할 일이어서 은혼은 할 말을 잊은 얼굴이었다.

“괜찮으시다면 바로 시작할까 합니다.”

“화산은 은천문과 진 문주께 참으로 큰 은혜를 입습니다.”

“모든 것이 청강 진인께서 맺어놓은 인연 덕분입니다. 선한 씨앗은 선한 열매를 얻는 법. 장문인과 제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본문과 화산은 앞으로도 가족처럼 지낼 것입니다.”

진무린이 의지를 밝힌 뒤에 두 사람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장소는 어느 곳이 적당하겠습니까?”

“어차피 문도들에게 모두 전하려는 검법입니다. 지켜보는 제자들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렇다면 수련장으로 향하시면 되겠습니다.“

진무린과 함께 집무실을 나선 은혼은 뒤따르던 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량아를 수련장으로 불러라.”

은혼과 진무린이 먼저 수련장에 도착했다.

오전에 위기가 있었으나 이대와 삼대 제자들은 무탈해서 수련장은 이미 제자들로 가득했다.

진무린과 은혼을 본 제자들이 분분히 자리를 비울 때 표충량이 전각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철은 들었으나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호랑이처럼 표충량은 듬직한 걸음에도 어딘지 모를 귀여움을 담았다.

“제자 표충량이 사부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진 문주께서 검법을 가르쳐 주실 게다. 너는 나와 함께 그것을 익혀야 한다.”

“예, 사부님.”

아직 어린 호랑이 표충량이 화산의 기품을 몸에 담아 의젓하게 답했다.

답을 들은 은혼은 제자들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은천문의 진 문주께서 벽계라는 적을 상대할 검법을 전해주신다. 나와 량아가 먼저 익혀 전해줄 참이니 너희는 최선을 다해 진 문주의 검을 눈에 담아라.”

“장문인의 명을 받습니다.”

가뜩이나 진무린을 동경하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듬직하게 답하고 행여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진무린이 검을 꺼내 기수식을 취하자 은혼과 표충량이 그 뒤를 따랐다.

쉐엑. 쉑. 쉐엑.

진무린은 초식명과 함께 진중탈구검을 차례로 펼쳤다.

은혼과 표충량이 함께 검을 휘둘렀는데 같은 초식을 보고 따라 하는 동작이련만 두 사람이 그려내는 검은 그 느낌이 달랐다.

은혼은 연륜과 경험이 묻었고, 표충량은 숨길 수 없는 재능이 담겼다.

쉐엑! 쉑!

엄소동이 남긴 검법은 또 이렇게 새로운 갈래로 그 뜻을 전하는 모양이었다.

 

**

 

소림의 보우는 천불전 앞의 돌계단에 기대 피를 게워냈다.

자랑하던 백팔 나한은 강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널브러졌고, 소림의 백 년을 빛나게 하리라던 제자는 이미 숨이 끊어져 그 중간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벽계라는 이름이 이토록 위험한 것이던가.

이 끔찍한 광경을 만든 장본인은 벽계에서 왔다는 한 명의 노인이었다.

늘 강호의 선두에 섰고, 중재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은천문과 정도맹주 황종관이 그토록 경고하던 벽계의 실체는 소림이 감히 근접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고작 이런 수준으로 강호의 주인을 자처했다니.”

고개를 저은 침입자가 훌쩍 몸을 날리도록 그를 막아설 제자는 소림에 없었다.

헛된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한 응징이리라.

자만하고 방심했던 지난 세월에 대한 벌이요, 다른 이의 진심 어린 충고를 외면한 것에 대한 처참한 징계였다.

허탈한 보우의 눈에 소림의 전각 기와 사이로 펼쳐진 하늘이 담겼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늘이 오늘 다르게 보이는 것은 보우의 심정과 소림의 현실이 묻은 탓이리라.

“진인이 옳았소.”

그는 다른 이가 알지 못할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

 

정동추는 천산의 동굴에 도착해서야 겨우 의식을 차렸다.

그는 먼저 냉기를 품은 바위 위에 올라가 엉킨 기혈을 다스렸고, 한 시진이 지난 뒤에야 눈을 떴다.

수신호위들은 그때까지도 자세를 낮춘 채 앞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놓친 뒤에 있었던 일을 말해봐라.”

수신호위에게서 진무린의 일을 들은 정동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교가 제 모습을 지키기만 했어도 이토록 비참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을, 개 같은 것들의 욕심이 백 년 만의 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들었구나.”

한숨에 뒤이어 탄식을 뱉어낸 정동추는 아직 하얀 낯빛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본교로 돌아가겠다.”

수신호위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조아렸다.

“벽계의 최고수를 물리친 참이다. 구대문파든, 본교든, 단 한 곳이라도 제 모습을 지켰다면 지금이 벽계의 근거지를 칠 가장 중요한 순간일 텐데 이 강호에 단 한 곳도 제 본분을 지킨 문파가 없다.”

몸을 일으킨 정동추는 마치 강호 전체를 꾸짖는 것처럼 말을 쏟아낸 뒤에 걸음을 옮겼다.

동굴을 나서자 거센 바람이 그를 휘감았으나 그는 뒷짐을 진 채 멀리 보이는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정리하란 놈들은 어찌 되었냐?”

“모두 여든셋이 죽는 것으로 기강을 바로잡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정동추는 픽 웃었다.

“잘났다고 설치던 놈들 모두 죽어 나가고, 미련해서 경쟁자에도 넣지 않았던 섬도곤만이 자리를 지켰으니 세상사는 참으로 알 길이 없구나.”

말을 마친 정동추가 훌쩍 몸을 옮기자 수신호위가 재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

 

진중탈구검을 전한 진무린은 표충량과 함께 낙안봉으로 향했다.

모처럼 포근한 날이었다.

“운기를 해야 하는데 적당한 장소가 있을까?”

“숙부께서 말씀입니까?”

시선을 내린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내상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한 참이라 실제로 운기가 급했다.

“바로 아래 절벽에 널찍한 바위가 있습니다. 사부님과 몇 분을 제외하면 도달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이라면 더할 수 없이 좋다. 네가 먼저 앞장서라.”

진무린의 말에 표충량은 망설임 없이 절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진무린은 일부러 표충량이 발을 디디는 곳을 밟으며 뒤를 따랐고, 삽시간에 말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좋구나. 반 시진 정도 운기할 테니 호법을 부탁하마.”

“소질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냐.”

진무린은 그렇게 앉아 눈을 감았다.

반갑다, 어찌 지냈느냐의 말을 하지 않아도 표충량은 진무린이 전하는 깊은 정을 알아챘다.

아무렴 화산에 장소가 없어서 표충량에게 장소를 묻고, 호법을 설 인재가 없어 앞을 지키라 했을까.

촌각을 다툴 정도로 바쁜 와중에도 모처럼 찾은 화산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픈 진무린의 배려라는 것쯤 영특한 표충량은 익히 알았다.

화산의 이름을 앞세우고, 청강 진인의 검을 칭송하며 적을 베는 진무린의 모습이 어찌나 눈부시던지.

그런 뒤에도 거만한 모습 하나 없이 은혼을 향해 고개 숙이는 진무린의 태도는 또 어떻고.

‘숙부의 모습을 반드시 배우고 익혀 따를 것입니다.’

표충량이 어린 마음에 의지를 담을 때였다.

진무린의 몸에서 익숙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기운이 품어주는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었고, 청강 진인과 은혼의 등에 있을 때처럼 든든한 기분이었다.

조용하게 숨을 갈무리한 표충량은 생각을 접고 소주천을 시작했다.

마르던 땅에 단비가 내리는 것처럼 진무린의 몸에서 솟구친 기운이 표충량의 몸에 스며들었다.

 

**

 

정도맹은 날이 밝으며 화마에 휩싸인 것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정도맹은 삼보를 어떻게 처리할지 밝히시오!”

사파의 고수부터 외모만 봐서는 백 년은 은거했으리라 짐작되는 인물까지, 정도맹 앞은 몰려드는 각양각색의 무인들로 가득했다.

황종관은 또 달라서 새로운 비월단주 염기가 가져오는 정보를 받을 때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구관에 들어가기로 했던 구대문파의 재능들이 간밤에 모조리 피살되었다는 소식에 이어 남궁세가와 하북팽가가 역시 아끼던 후인을 잃었다는 비보가 연신 날아들었다.

“벽계가 노린 것이 이것이었나.”

황종관은 눈과 눈 사이를 누른 뒤에 시선을 들었다.

“삼보를 얻기 무섭게 구관에 들기로 했던 재능들이 피살되었습니다. 벽계가 삼보를 강호에 뿌린 이유가 이것이라고 여겨지고 다음으로는 전임 비월단주가 명단을 작성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윤고성의 행방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분을 삭인 황종관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강호의 미래를 책임질 후인들을 잃은 것은 아프고 쓰리지만, 이번 일을 통해 구대문파가 조금이나마 각성했으면 싶군.”

황종관이 바람을 토해낼 때 바깥에서 함성이 커다랗게 들렸다.

“삼보의 처리를 밝히라는 요구가 거셉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몰려드는 이들의 숫자도 급격하게 불어나서 어떤 식으로든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점심이 지나면 내가 나가볼 테니 우선은 그대로 두게.”

“예, 맹주.”

황종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염기가 몸을 돌렸다.

“정도맹은 삼보의 처리를 밝히시오!”

염기가 나간 직후에 누군가의 고함이 창을 타고 들어왔다.

“전중방이라는 통로를 알아냈는데도 힘이 없어 벽계를 공략하지 못하다니. 이제 기대할 것은 은천문과 진 문주밖에 없는 건가.”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는 것처럼 황종관은 고개를 들어 정도맹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

 

반 시진쯤 뒤에 눈을 뜬 진무린은 먼저 고개를 돌려 표충량을 찾았다.

“숙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내상을 어느 정도 치유했다.”

“다행입니다.”

처음 보았을 때도 표충량은 애늙은이 같은 면모를 지녔었다.

은혼과 잠시 헤어질 때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놀라고 당황하면 평범한 아이처럼 반응하기도 했는데 그렇더라도 표충량은 여느 아이와는 다른 점잖은 면이 있었다.

진무린은 이때 표충량이 품은 기운을 읽었다.

이대로 십 년만 성장한다면 강호에서 감히 화산과 이 아이를 상대로 나설 이가 없겠구나 싶을 정도의 발전이었다.

“이제 장문인을 뵙고 돌아갈 참이다. 혹시 무공을 익힐 적에 갑갑한 점이 있었다면 지금 말해라.”

“숙부. 진심으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아는 대로 일러주마.”

“진인께서는 정말 신선이 되셨을까요?”

표충량의 엉뚱한 질문에 진무린은 보기 좋은 웃음을 먼저 그렸다.

“이곳에 오기 전에 말이다. 정도맹으로 향해야 할지, 화산으로 향할지를 놓고 잠시 고민했었다. 보다시피 기혈이 엉켜 제대로 경공을 발휘하기도 어려웠고.”

“숙부께서는 기혈이 엉킨 상태에서 침입자를 상대하셨습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진인의 음성이 들리더구나.”

초롱초롱한 표충량의 눈이 애타게 진무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 대협. 염치없지만, 노도의 청을 외면하지 말아주시오.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진인께서는…, 정말 신선이 되신 것입니다.”

“지금도 너를 보고 계실 것이다. 이렇게 울먹이는 모습을 보시면 실망하시지 않을까.”

진무린의 말에 표충량은 소매로 눈가를 쓱 문질렀다.

“소질은 울지 않았습니다.”

무공을 익히는 일은 외롭고 고달프다.

타고난 재능에 청강의 뜻과 은혼의 은혜를 알아 매진하고 있으나 표충량의 작은 가슴에 담긴 외로움이 얼마나 클지 진무린은 익히 짐작했다.

진무린은 넉넉하게 웃으며 표충량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저 하늘 어딘가에서 분명히 보고 계신다고 이 숙부가 장담하마. 너는 화산의 정신을 올곧이 세우는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하여 청강 진인의 뜻을 전하는 화산의 제자가 돼다오.”

손을 세워 표충량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무린은 시선을 하늘로 들었다.

숨 막힐 정도로 바쁜 순간이지만, 지금 보내는 이 여유로운 시간이 표충량에게 얼마나 위로 되는지 아는 탓에 일각쯤 더 앉아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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