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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81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69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은천검제 181화

은천검제

제181화

 

문주가 되어서일까, 아니면 보는 이의 마음이 달라져서일까.

민가에 내려선 진무린은 확실히 위엄을 갖추었고, 그것으로 모자라 엄숙함을 더한 느낌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겠냐? 마천강기가 일어날 정도로 엄청난 기운을 느꼈는데 장소를 전혀 모르겠다.”

“짐작하셨습니까?”

진무린의 짐작에 정동추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져온 천서유기와 옥환마저 네 사매에게 주었고, 정도맹으로 달리라 했다.”

정동추가 보고처럼 전한 말이었다.

“이리로 향하고 있습니다. 속도를 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시끄럽지 않은 곳으로 움직이라는 경고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놈인지 면상을 꼭 봐야겠다.”

“이곳에 계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상황에 따라 지시할 분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네가 쓰러지면 이곳에 있는 사람은 상등을 벗어나기도 전에 모조리 목이 떨어진다. 유일하게 살길은 너와 내가 나선 직후에 바로 정도맹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진무린은 일리가 있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감정을 감춘 눈으로 모려원을 찾았다.

“사매. 교주의 말씀에 따라 다오.”

실력이 부족해 진무린과 헤어져 상등으로 달렸던 모려원이었다.

겨우 다시 얼굴을 마주했는데 짐작조차 못 하는 적을 앞두고 다시 헤어져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강해져야 한다.

당장은 실력이 부족하니 마음가짐과 태도를 강하게 가져서 진무린을 도와야 한다.

“문주의 명을 받습니다.”

모려원은 지켜보는 이들이 들으라는 듯 진무린의 명을 받았다.

“사제는 사매를 따라 움직이되 문주와 섬도곤이 불편한 일을 겪지 않도록 도와다오.”

“종무헌이 문주의 명을 받습니다.”

분하기는 종무헌도 마찬가지인지 눈썹이 올라간 그가 양손을 잡아 진무린의 뜻을 받았다.

“이곳에서 정도맹을 향해 이각 정도 달리면 적당한 장소가 나옵니다. 그곳까지 함께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구나.”

진무린에게 대꾸한 정동추가 뒤를 돌아보았다.

“함께 출발하자. 우리가 멈추더라도 염려하지 말고 정도맹으로 곧장 달려.”

정동추의 뜻에 따라 모려원 일행은 준비를 위해 움직였다.

그 사이 진무린은 방으로 들어가 이안공자와 짧은 인사를 나누었고, 백면호리의 수고를 치하했다.

“나는 어떻게 할까?”

“백면호리는 이안공자를 모시고 귀혼곡으로 가 있어.”

“그럴까?”

진무린의 지시를 백면호리가 반갑게 받았다.

“상황이 급박해서 그동안 편의를 살펴줬던 루주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 합니다. 이안공자께서 대신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겠소. 부디 무탈하게 위기를 넘기시기를 바라오.”

이안공자가 포권으로 인사를 마칠 때였다.

“준비가 모두 끝났다.”

독촉하는 듯한 정동추의 말이 방으로 달려왔다.

“그럼 귀혼곡까지 살펴 가십시오.”

짧은 인사가 그렇게 끝났다.

밖으로 나온 진무린은 먼저 모려원을 향해 움직였다.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교주께서 가르침을 주셨어요. 대사형께 얻은 공력을 제 것으로 채운다고는 했는데 아직 제대로 메우지는 못했어요.”

가볍게 웃은 진무린이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일까?

설마?

놀라는 모려원을 향해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다오. 잠시 공력을 확인해보겠다.”

아무렴 진무린이 이 바쁜 순간에, 그것도 지켜보는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감정을 밝히고자 손을 잡겠다고 했을까.

혼자만의 생각이 부끄러워 볼을 붉힌 모려원이 진무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모려원은 진무린이 내민 손 위에 그녀의 손을 얹었다.

그런데 진무린의 손은 공력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꼭 쥐었을 뿐,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사형?’

‘가는 길이 험할 수 있다. 조심해.’

‘대사형, 무탈하게 돌아오실 거죠?’

고개를 끄덕인 진무린이 손을 내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출발하겠습니다.”

“앞장서면 뒤를 따르겠다.”

진무린이 발을 굴러 경공을 펼치자 정동추를 시작으로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자칫 상등에 사는 이들이 경공을 펼치는 모습에 놀랄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을 따질 때는 아니었다.

앞서서 달리는 진무린은 입술에 힘을 굳게 주었다.

먼저 은천문 제자들의 희생이 떠올랐고, 다음으로 의지를 전하는 것처럼 선 채 죽음을 맞은 엄소동의 모습이 새긴 듯 선명하게 피어나서였다.

민가로 향하며 알았다.

뿌리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한순간에 진무린을 따르기 시작했다.

‘도주할 테면 해라.’

느닷없이 나타난 기운은 그런 느낌으로 속도조차 내지 않았다.

‘공연히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다. 조용한 곳으로 가 기다려.’

또한, 진무린에게 주변을 정리할 시간마저 배려한 느낌이었다.

언제고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를 내려다보는 아이처럼 말이다.

경공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가가 사라지며 산과 들이 시야에 담겼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날이 선 정동추의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 산 어딘가에서 진무린과 정동추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이다.

산과 산의 사이로 널찍한 공간이 보이자 진무린은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정동추가 내려설 때, 진무린은 고개를 들었다.

‘멈추지 말고 가.’

모려원과 종무헌이 정도맹을 향해 달리고, 그 뒤를 운진과 섬도곤이 뒤따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짧은 순간이었다.

달리는 모려원의 눈빛에서 진무린은 양소소의 외로움을 보았다.

언제고 은천문의 동산에서 함께 지금을 추억할 날이 있을 거다. 그것이 함께일지, 혹은 모려원 혼자일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이리 오고 있냐?”

“방향이 이쪽으로 향한 것은 분명합니다.”

“천하의 정동추가 기운조차 읽지 못하고 기다릴 상대라니. 지금껏 익힌 마천강기가 동네 무관 수준이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주변을 살핀 정동추는 근처의 그루터기로 움직여 자리했다.

“앉아라.”

그는 눈빛으로 옆의 자리를 진무린에게 가리켰다.

“은천문은?”

“벽계의 서른한 명이 침입했습니다. 구주의 엄 대협이 절명하셨고, 본문의 문주와 사부, 그리고 파천신군 내외분, 양 사고께서 크게 다치셨으나 그들을 모두 쓰러트리셨습니다.”

정동추는 이제야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이 상했던 게로구나. 그래서 본보기로 너를 제거하고 다음을 진행하겠다는 게지.”

말을 했던 정동추가 묘한 미소를 그려냈다.

“삼보를 얻게 하려는 수작도 이런 의도였겠지. 강호에 피바람이 불어서 죽고 죽이다 보면 가장 강한 자가 누군지 알게 될 테고, 그들을 찾아가 죽이면 더는 반항할 자가 없게끔.”

“그렇다면 정도맹이 위험하겠군요.”

“정도맹은 괜찮을 게다. 그곳에 유능한 인재가 없으니까.”

황종관이 있음에도 정동추는 야박한 평가를 쏟아냈다.

“삼보를 빼앗지는 않겠다만, 대신 구관에 들 인물들을 노린다고 봐야겠지. 무엇보다 강호에서 가장 기대되는 아홉 명이 선발되지 않겠냐.”

정동추의 말을 들으며 진무린은 갑갑했던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너더러 숨으라고 하면 따를래?”

“피한다고 해도 저 기운은 반드시 저를 찾아낼 겁니다.”

“본교에 적당한 장소가 있다만?”

“아예 교도들을 몰살시킬 계획이십니까?”

“이참에 모두 없애버리고 새로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막힘없이 오간 대화의 끝에서 진무린과 정동추는 기가 막힌 심정에 함께 웃었다.

“그나저나 여기에서 함께 죽어버리면 이후 강호는 어쩔꼬.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니 언젠가 새로운 영웅이 태어나 벽계를 물리치기야 하겠다만, 이왕이면 본교에서 그런 인물이 나왔으면 싶다.”

말을 마친 정동추가 하늘 저 먼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방향이 짐작되는구나. 그나저나 참으로 대단하다. 마치 거대한 산이 느긋하게 다가오는 것 같지 않으냐.”

이어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진무린을 보았다.

“비굴하다는 말의 의미를 아냐?”

“어떤 의미로 묻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뜻은 알고 있습니다.”

“다시 묻자. 향후 십 년 뒤에 지금 다가오는 기운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숨어서 그 힘을 기를 의지는 있냐?”

진무린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정동추의 질문이 포함하는 범위가 너무 광범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안에 네 사매와 사제, 구대문파의 수장과 인재들, 나와 섬도곤을 포함해 모두가 죽어 나가겠지. 그걸 지켜보며 힘을 길러야 한다는 조건이다.”

진무린의 눈을 보며 정동추가 어쩐지 야비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정도문파라는 것들은 굴욕이란 단어의 의미를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지. 힘이 없고 가능성이 없다면 목숨을 던져 저항하는 것이 가장 큰 용기이며 결단이다.”

마지막 조언을 던지는 것처럼 정동추는 빛나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훗날을 기약할 능력이 있는데도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겁한 짓이다. 실력을 키우는 동안 너를 향할 손가락질과 주변 사람을 잃는 고통을 피하려는 짓,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제게 지금 피하라는 말씀입니까?”

“네가 그럴 리가 있겠냐?”

말과 달리 정동추의 눈은 분명 진무린에게 몸을 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벽계에 저토록 강한 힘을 지닌 자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당황했을 뿐, 다른 이들은 충분히 감당할 만합니다.”

정동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문에서 벽계를 감당할 검법을 수련 중입니다. 길면 석 달, 짧으면 한 달 안에 본문은 벽계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럼 길면 석 달, 짧으면 한 달만 피하면 되겠구나?”

진무린의 눈을 바라본 정동추가 느긋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둘 중 하나겠지. 내가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처럼 어떤 어려움도 뚫어내는 영웅이거나, 한때 반짝한 인물이거나. 이왕이면 네가 전자이길 바란다.”

마침내 정동추가 결론처럼 말을 마쳤다.

“봄이구나! 봄! 만물이 소생한다는 계절에 이 무슨 재미없는 대화란 말이냐.”

심지어 그는 주변을 돌아보며 엉뚱한 탄성을 내뱉었다.

정동추의 표현대로 거대한 산이 걸어오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 바싹 다가와 있었다.

서두르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소름 끼칠 정도로 일정한 속도였다.

숨을 두 번쯤 쉬고 난 뒤였다.

정동추의 몸에서 마천강기가 강렬하게 솟구쳤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낀 몸이 반응한 눈치였다.

기운은 숨통을 막는 것처럼 여유를 즐기며 천천히, 개미를 밟는 아이처럼 느긋하게 진무린과 정동추를 향해 다가오더니 지금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후.”

진무린은 정동추가 들을 정도로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직후였다.

산의 저쪽에 노인과 중년, 두 사람이 진무린과 정동추를 향해 걸어왔다.

두 사람 모두 무기를 들지 않았는데 심지어 노인은 뒷짐마저 진 여유로운 자세였다.

하얀 머리칼과 수염을 지닌 노인이 진무린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옅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진무린은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잔인한 통증에 눈가를 찌푸렸다.

오랜만이었다.

하후도에게 당했을 때 이랬고, 이후 엄소동이 중단전을 풀어줄 때도 이런 통증을 느꼈었다.

저 정도 거리에서 진무린의 중단전을 파고들 정도의 기운을 뿜어낸다면 아예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등룡창천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단전을 이용해야 하는 진무린에게는 그야말로 섬뜩한 경고와 같았다.

진무린과 정동추는 비슷하게 몸을 일으켰다.

후적후적 걷는 모습인데 노인의 발이 바닥에서 한 치 정도 떠 있어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마침내 노인과 중년인이 진무린과 정동추의 앞에 도착했다.

“너를 보고자 나선 길이었다만, 모처럼 보는 강호의 풍경이 나쁘지 않았다.”

노인은 오랜만에 손자의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넉넉한 표정과 음성이었다.

“나는 태상이라 한다. 벽계를 통솔한다고 여기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우연제라 하며 공관이라는 직책을 담당하고 있지.”

이제 너희도 소개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투로 태상이 진무린을 보았다.

“정동추란 분으로 마교의 교주십니다.”

“기개가 좋군.”

“진무린입니다.”

“흠흐흐흐.”

진무린과 정동추, 태상과 우연제 모두 포권 따위 하지 않았다.

뻑뻑한 인사가 오간 뒤였다.

“인사가 끝났으니 이제 네 목숨을 가져가겠다.”

마치 맡겨둔 것을 달라는 투로 태상이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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