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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79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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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9화

은천검제

제179화

 

모려원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민가의 밖에서 날아든 암연의 기운이었다.

“잠시 나갔다 와야겠어요.”

“편할 대로 하려무나.”

암연인 것을 눈치챈 모양으로 정동추는 상관없다는 투의 대꾸를 내놓았다.

모려원은 그야말로 힘겨운 상태였다.

은천문은 무사할까?

진무린은 과연 도착했을까? 다친 것은 아닐까?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무엇보다 기다리던 은천문의 소식이라 모려원은 급한 걸음으로 민가를 나섰다.

강호에 불어올 혈사를 짐작하지 못하는 이들이 바삐 하루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두렵고 걱정스러운 염려를 품은 모려원은 소능산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돌계단을 오른 모려원이 사당 앞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서른 중반의 남자가 사당 뒤에서 나타났다.

“장 노대께서 모 소저께 급한 전갈이 있습니다.”

장 노대를 언급한 것과 함께 암연의 독특한 기운을 풍기는 터라 나타난 이의 신분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본문은 어떤가요?”

“벽계의 인원 서른한 명이 침입했으나 모두 참살했습니다.”

모려원은 참았던 숨을 조심스럽게 뱉었다.

침입한 인원의 규모도 놀라웠지만, 그들을 모두 참살했다는 결과는 그보다 더 놀라웠다.

당연하게 희생이 따랐으리라.

어떤 소식이라도 당당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로 모려원은 이어질 소식을 기다렸다.

“엄소동 대협께서 사투 끝에 절명하셨고, 문주와 대사부, 양 사고, 파천신군 내외분이 중한 내상과 외상을 입으셨습니다.”

엄소동의 소식은 불행했으나 서른한 명의 벽계 인물을 상대로 그만하면 굉장한 성과였다.

그리고 진무린의 소식은 없었다.

숨을 내쉰 모려원은 진무린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하긴, 날아가지 않는 한 당도하기 어려운 거리이기도 했다.

“그 사투에서 진 대협께서는 스물의 적을 베었고, 오늘 새벽 문주 직에 오르셨습니다.”

스물을 베고, 문주가 되었다고?

모려원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눈만 끔벅였다.

“상황이 어려운지라 취임식은 훗날로 미루었고, 장로회의의 의결은 문주께 드리는 인사로 대신하였습니다.”

“대사형이 도착하셨다는 건가요? 적 스물을 베고 오늘 새벽에 문주의 직에 오르셨다, 그렇게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모 소저.”

언젠가 문주의 자리에 오를 날이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그러나 이런 순간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기쁘고, 놀라운 한편으로 진무린이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가 염려되어서 모려원의 표정이 복잡했다.

“조만간 문주께서 상등으로 출발할 테니 모 소저께서는 이곳에서 기다리셨으면 한다는 장 노대의 전갈입니다.”

“그렇게 할게요. 사제의 소식은요?”

“오늘 중으로 상등에 도착하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흑판을 얻었나요?”

“워낙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어서 그것까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상등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린다면 결과 역시 긍정적이라.

모려원은 내심 예상하는 바가 있어 고개를 주억였다.

“다른 말씀은요?”

“더는 없습니다.”

“암연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양손을 잡아 인사하는 모려원에게 비슷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 남자가 사당의 뒤로 움직였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직 종무헌의 성공 여부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예상대로라면 삼보를 모두 손에 넣었다.

긴장이 풀린 모려원은 느닷없이 덮치는 피로를 털어내는 것처럼 호흡을 조절하며 잠시 상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무린이 은천문의 문주 자리에 올랐단다.

사실 은천문에 속한 모든 이가 다음 대 문주는 당연히 진무린이리라 예상했었다.

어쩌면 특별할 것 없는 소식이었으나 임운령이 진무린에게 문주의 직을 넘긴 것은 은천문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상징과 같은 일이었다.

진무린이 이끄는 은천문은 어떤 모습일까.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모려원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

 

밖으로 나갔던 진무린이 객당에 돌아온 것은 임운령 일행이 아침으로 죽을 먹고 난 뒤였다.

“사매에게 전갈을 넣고 돌아왔습니다. 사제는 오늘 중으로 상등에 도착할 것이라 봅니다.”

“그렇다면 삼보를 모두 얻었다고 보아도 되겠구나?”

“제자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네가 서둘러 상등으로 가야 한다는 뜻도 되는구나.”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임운령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은천수호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겠다는 결심에 변함이 없느냐?”

“벽계를 상대로 문도들을 지키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다면 은천수호검을 풀고자 합니다.”

진무린의 뜻은 분명했다.

등룡창천을 대성한 제자요, 문주가 된 진무린의 뜻이 확고한 만큼 더는 망설일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내상을 입었다고 하나 은천수호검을 가르치는 것은 충분히 감당한다. 내게 맡겨다오.”

마침내 임운령이 마음을 굳히고 진무린의 뜻을 받았다.

“이미 본문의 검법이 유출된 상황이라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수순이라 생각했다. 진중탈구검을 얻기는 했다만, 벽계의 무공을 파훼하기 위한 검법이라는 단점도 고민했겠지.”

상처를 가득 안은 임운령이 그답지 않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이해한다.”

진무린의 상황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남굉모가 툭 끼어들었고,

“검법이 유출된 불리함도 은천수호검으로 메울 수 있소. 은천수호검을 아직 견식하지 못했으나 내가 급하게 만든 검법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은 충분히 짐작하오.”

전도위가 나서 넉넉하게 임운령을 다독였다.

은천수호검에 관한 의논이 정리된 다음이었다.

“진법을 문주가 지닐 생각은 아닐 테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니?”

양소소가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내놓았다.

“제자는 장 노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대를?”

고개를 갸웃했던 양소소가 눈빛을 빛내며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는 생각에 방심했었네. 몸을 감추거나 이동하는 일에 장 노대만큼 일가견을 가진 인물이 본문에 드물지. 또 암연을 통해 진을 풀어야 할 때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 수 있을 테고.”

“거참. 그 짧은 순간에 장 노대까지 생각해 내다니. 너는 아예 문주가 될 순간을 짐작했던 것 같지 않으냐?”

또다시 남굉모가 끼어들었으나 양소소는 아예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렇다면 오늘 중으로 장 노대의 몸에 진법을 심으마.”

“사고께 수고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큰 짐을 짊어진 문주에게 이 정도밖에 도움을 주지 못해 오히려 미안하다. 다행인 것은 외조부의 말씀대로 오랫동안 준비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문주의 판단이 날카로우니 그 점이 반갑고 기쁘다.”

양소소의 말을 끝으로 상황은 대강 정리되었다.

“문주는 언제 출발할 생각이니?”

“사고께서 장 노대에게 진법을 맡겨주시면 바로 출발할까 합니다.”

“강호가 어려우니 그래야겠지.”

“사고.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혹여 내공이 고강한 자가 진법을 부수려 들어도 본문이 안전합니까?”

진무린은 마지막으로 걸리는 점을 질문했다.

“그런 식으로 진법을 열 수는 없어. 다만, 벽계의 인물 서른이 공력을 모아 일제히 달려든다면 왜곡될 수는 있을 거야.”

“왜곡된다면 어떤 모습입니까?”

“진법이 왜곡되어 벌어지는 현상이 워낙 다양해서 그건 나도 뭐라고 말하기 어려워.”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진무린이 양손을 잡아 양소소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이 질문에서 일행은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벽계의 다수가 방문했을 때 저들이 마음 놓고 공력을 모으지 못하도록 막아서야 한다는 점이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구나. 삼보를 얻었다고 하나 구관을 여는 것부터 들어갈 인물을 결정하기까지 어려움이 한둘이 아닐 테고, 은천문은 새로운 검법을 익혀야 하니 참으로 어렵고 어렵다.”

남굉모의 말이 함께 있는 이들의 심정과 현재 상황을 완벽하게 대신했다.

 

**

 

어지간해서는 대전을 벗어나는 법이 없던 태상이었다.

신도황과 서른 명의 몰살 소식을 들은 그는 꽤 충격이 컸던 모양으로 잠시 침묵한 뒤에 몸을 일으켜 대전을 나섰다.

훌쩍 몸을 날린 태상은 햇살이 따사로운 절벽에 올라 뒷짐을 진 채 멀리 펼쳐진 산과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강호의 것과는 확연하게 차이 나는 크고 긴 소매가 그의 등 뒤로 길게 늘어졌고, 빛나는 하얀 머리칼과 수염을 지닌 데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인상이라 밖으로 나선 태상은 마치 신선이 세상에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일각쯤 먼 곳을 바라보던 태상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놈의 검에서 용이 보였다고 했었지?”

“분명하게 확인한 사실입니다.”

앞에 펼쳐진 산과 절벽에 질문을 던졌는데 답은 뒤에서 나왔다.

 “구주의 몰락을 확인한 순간에 믿기지 않는 무공을 지닌 놈이 나타나다니. 하늘이 과연 어떤 결말을 바라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군.”

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시선을 든 태상이 하늘의 이쪽과 저쪽 끝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벌써 마흔을 넘게 잃었어.”

“소신을 보내주십시오.”

뒤에서 요청이 들렸으나 태상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시간을 보낸 뒤였다.

“적수를 만날 때마다 성장한 게지. 그러고 보면 하후도부터 신 장보까지 놈이 성장할 발판을 깔아준 셈인데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야 되겠나.”

숨을 크게 내쉰 태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위치를 알아오게. 은천문이 아닌 곳으로.”

“명을 받았습니다.”

지시를 내린 태상이 독한 눈빛을 띄우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삼보를 얻었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구관에 들어가리라 예상되는 강호의 인물을 추려. 그리고 그들의 목을 가져와.”

“태상의 명을 받습니다.”

지시를 마친 태상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나를 나서게 하는 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투로 태상은 고개를 저었다.

 

**

 

민가로 돌아온 모려원은 먼저 식사를 해결했고, 다음으로 운기에 들었다.

모려원이 운기에 들고 이각쯤 지난 뒤였다.

대청에 있던 정동추가 모려원이 있는 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벽계라는 것들이 아니라면 당장 목을 자르고 싶을 정도로 성장이 빠르구나.”

농담처럼 낸 말이었으나 정동추의 눈매는 매서웠다.

“이런 순간을 위해 그토록 내실을 다지려 애썼건만, 속이 시커먼 놈들 때문에 본교는 퇴보한 꼴이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탄식을 뱉어낸 정동추가 시선을 마당으로 돌렸다.

“구관이 열리면 네놈을 그곳에 넣을 참이다. 만약 빈손으로 나온다면 네놈의 머리를 부술 테니 그리 알아.”

“예, 사부님.”

섬뜩한 정동추의 경고를 섬도곤은 시원하게 받았다.

이각쯤 지난 뒤였다.

정동추가 소능산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잠시 후에 마당으로 세 사람이 내려섰다.

“다녀왔소.”

운진이 대표로 정동추에게 말을 건넸다.

종무헌은 기혈이 엉킨 것처럼 낯빛이 좋지 못했고,

“아이고. 죽겠다.”

백면호리는 마당의 한쪽에 주저앉았으며, 운진은 체력이 바닥나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우측 방은 운기 중이니 좌측 방으로 들어가 기운을 추스르게.”

“교주의 배려에 감사하오.”

운진이 역시 답했고, 종무헌은 가벼운 예만 보인 채 방으로 들었다.

남은 것은 백면호리였다.

정동추는 마당 한쪽에 주저앉은 백면호리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왜 노려보냐며 따졌을 백면호리건만, 상대는 마교 교주 정동추였다.

시선을 느낀 백면호리는 애꿎은 담벼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정동추를 외면했다.

“네놈도 그러고 있지 말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평소라면 정동추를 피해 달아나 보겠다.

그런데 지금 어쭙잖은 짓을 했다가 정동추나 섬도곤이 손을 쓴다면 몸을 빼낼 기운이 없었다.

힐끔 시선을 돌렸던 백면호리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고,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공자에게 부탁해서 대혈을 모두 만져달라고 해라. 아니면 너는 오늘 중으로 피를 토하고 죽는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협박이야?

백면호리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본 다음이었다.

“네놈은 분명 심법이라는 것을 책으로 익혔을 게다. 혈도의 그림에 찍힌 혈도를 기억하며 그대로 운기했겠지.”

“힉?”

“타고난 몸뚱이 덕에 견뎌온 모양이다만, 그것이 쌓이고 쌓였다가 이번에 올라온 게다. 마음 같으면 괘씸한 눈알을 파내라고 시키고 싶다만, 진무린과의 관계와 흑판을 가져온 공로를 생각해 조언한 것이다. 그러니 어서 내 앞에서 사라져.”

정동추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아서 천하의 백면호리가 얌전해진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정동추는 점점 독기가 솟구치는 눈빛이었다.

그래서인지 진득한 마기마저 풍겨 나왔다.

어디엔가 적이 있을까.

섬도곤이 혹시 몰라 대청의 바깥을 빠르게 둘러보고는 다시 정동추를 살폈다.

그 직후였다.

“벽계의 수장이라도 나타나려나.”

섬도곤이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정동추가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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