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77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4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7화
은천검제
제177화
아직 바깥에서는 토굴 안의 상황을 모른다.
“조금 전에 문주께서 상대한 것은 토황패를 대신해 우리가 모셨던 기물입니다. 결국, 우리 손으로 요물을 불러들여 대접한 꼴이고, 그로 인해 애꿎은 아이들이 희생된 것이네요.”
마흔이 되어 보이는 성주는 바깥을 살핀 뒤에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문주와 바깥의 무인을 보며 강호의 혈사를 위해 흑판을 사용하겠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보물을 손에 넣은 뒤에 흑판을 돌려주겠다던 약속을 잊지 마세요.”
말을 마친 성주는 처음으로 운진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유광은 모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노도가 비록 힘이 부족하나 유광이 부르면 언제고 찾아와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소.”
“그 약조를 믿습니다. 이제 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젊은 무인이 이곳에 오게 됩니다.”
성주의 말이 떨어지자 아직 눈물을 지우지 못한 여인 둘이 다가와 운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노도는 그저 작은 기술을 보였을 뿐, 아이를 살린 것은 성주의 배려 덕분이라오. 부디 아이들과 편안하게 지내시오.”
여인들에게 덕담을 건넨 운진이 고개를 들었고, 성주는 어서 가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검을 맡긴 종무헌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성주. 노도의 작은 힘이 필요할 때면 언제고 불러주시오.”
“문주께서 대업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양손을 잡아 보인 운진이 토굴을 나섰다.
그 직후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황토색 흙이 토굴을 가렸고, 상황에 놀란 종무헌이 단박에 운진 앞으로 달려왔다.
“문주!”
“종 소협!”
진무린과 청강이 돈독했다면, 종무헌과 운진 역시 그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서로의 안위를 염려하던 할아비와 손자가 다시 만난 것처럼 운진은 종무헌의 손을 잡고 팔을 다독였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야기가 복잡하다오. 가시면서 말씀합시다.”
운진이 돌아보았을 때, 토굴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뿌연 흙먼지만이 가득 피어올라 있었다.
**
마교 교주 정동추와 정도맹주 황종관이 떠난 상등의 민가는 생기를 잃은 나무처럼 축 늘어진 느낌이었다.
아직 오후의 해가 한 뼘쯤 남은 시간에 백섭광과 설란을 대동한 원예가 민가에 들어섰다.
아무리 귀혼곡의 사람들만 지낸다고 해도 이안공자가 대청에 나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원예가 섬도곤이 사용했었던 방으로 곧장 움직이자 백섭광이 문을 열었다.
“오신 지가 꽤 됐는데 이제야 뵙네요.”
“귀혼곡의 삶이 그렇지 않으냐. 앉으려무나.”
거대한 갓을 벗지 않은 이안공자가 권하는 대로 원예는 탁자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저와 있을 때는 갓을 벗으셔도 괜찮아요.”
“벗고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이리 있는 것이 편해.”
설란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꼿꼿하게 앉은 원예와 이안공자 앞에 차를 놓아주었다.
“잠시 자리를 비워주게.”
이안공자의 요청이었다.
고개를 숙여 보인 백섭광과 설란이 조용하게 방을 나섰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직접 나선 것을 보면 중한 소식이 있는 모양이지?”
“구주의 마지막 고리인 두 분이 절명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원예가 전하는 소식에 꽤 놀란 모양이었다.
이안공자의 갓이 움찔한 뒤에 천천히 들렸다.
“은천문의 입구에 신도황 장보가 모두 서른 명을 인솔해 도착했는데 우득보 공의 머리를 들고 있었답니다.”
침묵하는 이안공자를 향해 원예는 냉정함을 잃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엄소동 공께서는 신도황 장보를 참살하시고, 그 자리에서 절명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흐음.”
마치 비수에 찔린 사람이 내는 신음처럼 이안공자는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은천문은?”
“진 공자께서 나타나 스물이 넘는 벽계의 인물을 모조리 도륙했다는 보고였어요.”
“분명하냐? 누가 도움을 주었는지도 알아보았고?”
갓을 높이 들어 모습을 드러낸 두 개의 얼굴이 원예를 바라보았는데 확실히 놀라고 당황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 해결하신 것으로 알아요. 등룡창천을 대성하였는데 멀리서 목격하기로는 검에서 빛줄기가 쏟아져 나와 용의 형상을 그렸다는 보고였어요.”
“믿을 수가 없구나. 강호의 무인이 벽계의 인원 스물을 홀로 도륙하다니. 그것도 엄 공께서 절명할 정도로 강한 이들을 상대로.”
말끝을 흐린 이안공자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가장을 출발한 교주가 내일 오전이면 이곳에 돌아올 거예요. 진 공자께서 홀로 은천문에 도착한 것을 보면 모 소저 또한 이곳을 향하고 있을 게 틀림없고요.”
“보물을 얻었다는 게지?”
“그렇게 보고 있어요.”
원예의 답을 들은 이안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산의 문주와 함께 간 종 소협이 보물을 가져온다면 진실로 세 가지 보물에 한자리에 모이는 게로구나.”
“결단을 내리셔야 할 순간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원예의 의견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안공자는 그를 외면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전중방을 통해 벽계로 통하는 진법이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들었다. 그쪽 소식은?”
“많은 무인들이 그 주변에 잔뜩 모여 있어요. 별도로 정도맹의 무인들이 외곽에서 지켜보는 중이고요. 그 외 특별한 기척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렇구나.”
이안공자의 턱없는 답이 있은 뒤였다.
“이미 진 공자께서 홀로 벽계를 상대할 수준에 올랐어요. 더 망설이다가 귀혼곡이 기대하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말을 마친 원예가 차가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모처럼 만나 살가운 대화가 오갈 법도 했는데 원예는 그 길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진 공자를 놓쳤다고 여기는 모양이지? 그래서 저리 화가 난 거고?”
원예가 나간 뒤에 갓 안에서 우안이 질문했고, 좌안은 기다란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
엄소동의 시신을 수습하고, 은천문의 입구를 정리하는 데만 꼬박 한 시진이 넘게 걸렸다.
검에 의지해 최후를 맞은 엄소동이었다.
그를 위한 제단을 마련하는 동안 일행은 상처의 치료를 뒤로한 채 자리를 지켰고, 그 끝에서 함께 분향했다.
“제자가 지키겠습니다. 몸을 살피십시오.”
“그보다는 본문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관한 의논이 먼저다.”
진무린의 권유를 거절한 임운령은 먼저 남굉모와 나탑사에게 치료를 권했다.
나탑사와 양소소는 실제로 부상이 심했고, 남굉모는 은천문의 일에 직접 관여할 위치가 아니라 세 사람은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침상을 마련한 객당으로 향했다.
“문주와 사부께서도 몸을 살피십시오.”
조금 덜하다뿐이지 임운령과 전도위 역시 위급한 상황인 것은 분명해서 진무린의 마음이 급했다.
“나는 은천령을 발동한 뒤라 문주의 직을 수행하기 어렵다. 본문이 또다시 위기에 빠졌을 때를 생각하면 이는 사사로이 시간을 끌 문제가 아니다.”
낯빛을 회복하지 못한 임운령은 힘겨운 얼굴이었다.
“나는 이미 네게 은천수호검을 전했다. 그러니 이제는 네가 본문을 이끌어.”
상황은 이해한다.
그러나 아무리 위급하다고 해도 진무린이 어떻게 이런 지시를 냉큼 받을까.
“본문의 이름이 강호에 드러난 마당이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문파와 집단이 많을 텐데 너만큼 강호를 활보한 이가 본문에는 없다.”
참담하고 송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진무린을 향해 전도위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말 한마디를 한 것으로 숨을 골라야 할 정도로 상태가 위급했다.
“어려운 시기다. 너에게 명예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문주께서 짊어졌던 짐을 맡으라는 의미이니 본문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나서.”
“급히 결정할 일이 아니라 우선 운기를 하시고, 내일 오전에 다시 의논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선뜻 문주를 받기 어려운 진무린이 반나절의 시간을 청했다.
누구보다 진무린을 잘 아는 두 사람이었다.
전도위를 돌아보았던 임운령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자 진무린은 들어라.”
비록 기운이 빠져 있다고 하나 문주의 위엄이 가득 든 음성이어서 진무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마주 잡았다.
“제자 진무린이 문주의 부름을 받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너는 문주를 맡아 본문을 이끌어라. 벽계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어려움이 있으나 누구보다 위기를 잘 헤쳐나가리라 믿는다. 부디 본문의 안위를 위해 지닌 바 역량을 발휘해다오.”
고개를 깊숙이 숙인 진무린은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이 없는 것은 능력 없는 문주의 명 따위 이제 듣지 않겠다는 뜻이냐!”
대답이 없는 진무린을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던 임운령이 한계를 이기지 못했다.
“푸훗.”
“문주!”
피를 토하는 임운령을 진무린이 놀라 불렀다.
“명을 우습게 여기는 제자의 걱정 따위 필요 없다! 우리 두 사람이 운기에 들었을 때 벽계가 다시 온다면 어쩔 참이냐? 운기에 든 우리를 깨울 생각이냐?”
완강한 임운령의 태도를 보며 진무린이 더 버티기는 어려웠다.
비록 부상이 심하다 하나 여태 은천문의 기둥으로 버티던 임운령의 자리를 탐하는 제자가 된 것 같은 송구함에 진무린은 더욱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제자 진무린. 문주의 명을 받습니다.”
답을 들은 임운령은 그제야 눈을 풀었고,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표정으로 임운령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곁에 있던 전도위 또한 비슷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임 문주는 문도를 이끌어 본문을 수호하는 데 최선을 다해주시오.”
임운령이 먼저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고,
“대사부 전도위가 신임 문주를 뵙소.”
전도위가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몸을 숙였다.
문주와 사부가 올리는 읍을 받는 자리였다.
몸을 세운 임운령은 진무린을 보고는 입술에 힘을 꾹 주며 올라오는 감정을 눌렀다.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진무린의 진심에 마음이 울컥한 까닭이었다.
“등룡창천을 대성한 신임 문주가 저리 마음이 약해서야 본문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이오.”
임운령과 진무린의 감정을 알아챈 전도위가 적당한 시기에 농을 건넸고,
“지금만 그렇지,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문주의 직을 잘 수행할 것이라 믿습니다.”
얼른 감정을 추스른 임운령이 그에 걸맞은 대꾸를 내놓았다.
“문주는 이만 몸을 세워.”
임운령의 자상한 음성에 진무린이 여태 숙이고 있던 상체를 바로잡았다.
“문주는 이제 몸을 세워.”
임운령의 지시에 진무린이 몸을 세웠다.
“아직 희생된 제자들의 넋을 기릴 기간이 남았고, 또 오늘 엄 대협의 아픔이 있어 신임 문주의 취임식은 뒤로 미루겠다. 다만, 잠시 뒤에 신임 문주에 관한 내용을 공포하고, 암연에도 이 내용을 전하겠다.”
“제자는 뜻에 따르겠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내일 오전에 나누는 것으로 하자.”
말을 마친 임운령과 전도위가 눈짓으로 제자들을 불렀다.
침상으로 움직이기조차 힘겨울 정도로 두 사람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의미였다.
**
진무린과 헤어진 모려원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
진무린과 있을 때는 몰랐다.
그러나 홀로 달리며 깨달은 것이 있으니 진무린과 함께 달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공력의 손실이 엄청났고,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등룡창천을 이룬 덕분에 공력이 쉬 떨어지지 않는가 했더니 진무린이 곁에서 도움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어둠에 싸인 세상이 어슴푸레 밝아올 때쯤 모려원은 지친 걸음을 멈추었다.
더 무리했다가는 상등에 닿기 전에 쓰러질 일이라 잠시나마 운기가 필요했다.
모려원은 밝아오는 세상 속에서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았다.
진무린은 지금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아직 은천문에 닿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진무린이 염려되어 모려원은 숨을 길게 뱉었다.
지금은 운기를 해서 공력을 보충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래야 진무린이 당부한 보물을 상등에 무사히, 그리고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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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무헌 일행 역시 한순간도 쉬지 않은 채 경공을 펼쳤고, 새벽녘에야 걸음을 멈췄다.
“차라리 죽고 말지.”
경공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백면호리가 둥그런 바위에 눕다시피 널브러져서 헉헉거렸고, 운진 역시 체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운진과 백면호리 모두 알았다.
종무헌 역시 한계에 다다라 낯빛이 변해 있다는 점을 말이다.
“운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잠시 하지 말고 좀 길게 해. 길게. 사람이 충직한 것도 좋은데 종 소협은 너무 직선이야. 직선.”
백면호리의 타박을 외면한 채 종무헌은 바위의 앞에 앉아 눈을 감았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뭐가 있어요?”
“종 소협의 모습이 좋아서 이리 보고 있다오.”
종무헌이 들을 것을 염려해 말로 표현하지 못한 백면호리가 검지와 중지를 세워 눈앞으로 가져갔다.
눈썹이 이렇게 올라간 종무헌이 보기 좋다는 뜻이냐, 그런 의미였다.
“노도가 말년에 복이 터져 진 대협을 뵙더니 이제는 종 소협과 마음을 나누었소.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소.”
아예 졌다는 투로 고개를 흔든 백면호리가 다시 바위에 축 늘어진 자세로 눈을 감았다.
운기를 하지 못하는 그가 취하는 독특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휴식이었다.
백면호리가 늘어진 바위 곁에 앉은 운진이 눈을 감고 명상에 들면서 기다렸다는 것처럼 사위가 뿌옇게 밝아왔다.
“강호를 지키겠답시고 이 고생한 것을 누가 기억이나 할까? 다들 평화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제 몫을 챙기겠다며 나설 것 아니냐고.”
늘어진 백면호리가 탄식과 같은 말을 뱉고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