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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206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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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206화

은천검제

제206화

 

나무 아래 노인 한 명과 중년 남자 한 명, 그리고 중년 여인이 있었다.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데 운진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벌써 셋이나 희생됐소. 이대로는 의미가 없을 듯하니 각자 세가로 한 명씩 들어가는 게 어떨까 싶소.]

[태상의 말씀은 끝까지 버텨보라는 것이었는데 괜찮을까요?]

노인의 말에 중년 여인이 질문을 건넸다.

진무린은 느긋하게 펼친 기운으로 세 사람이 나누는 전음을 들었다.

[남은 인원이 열 명이니 세가에 한 명씩 지원하는 것으로 합시다. 전중방의 통로를 통해 진무린이 나선 마당에 공연히 그의 손에 희생되느니 훗날을 노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오.]

노인의 말에 중년 남녀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한 대로 태상의 명령으로 밖으로 나온 인물이 있었다.

새롭게 안 사실도 있어서 살아남은 열 명이 한 명씩 지원하자는 말로 미루어 세가 또한 열 곳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대강 내용을 확인한 진무린은 운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직후에 운진이 세 장의 부적을 입으로 훅 불었다.

[전중방은 어떻게 할까요?]

[그곳에 화산의 장문인이 도착한 모양이나 특별하게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오. 그들을 몰살한 뒤에 세가로 몸을 숨기면 더욱 득이 되지 않겠소?]

[그럼 이 자리에서 결정된 사항을 바로 전달하고, 세가를 지원하는 방법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세 사람이 일어설 때였다.

연기로 흩어진 부적 세 장이 그들을 향해 날았다.

어두운 밤이었다.

진무린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연기가 세 사람을 향해 스며들 때 노인이 날카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함께 있던 중년의 남녀가 주변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노인을 향해 돌렸다.

[내가 너무 예민해진 모양이오.]

[우리의 기를 속이고 몸을 숨길 사람은 진무린 밖에 없습니다. 향후 십 년, 이십 년 뒤에 그는 분명 우리 손에 죽을 테고 이후에 강호는 우리 손에 있을 것입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 남녀가 바로 몸을 날렸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 노인은 진무린과 운진이 있는 나무 위로 시선을 들었다.

‘진 문주?’

진무린은 놀라는 운진을 향해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안심하시고 그대로 계십시오.’

아무리 노인이 벽계의 인물이라 해도 진무린의 기운을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예상대로 시선을 아래로 내린 노인이 훌쩍 앞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문주. 아직 입을 열지 마십시오.’

진무린은 검지를 들어 입 앞에 세웠다.

기운을 감추는 것과 말소리를 내는 것은 전혀 달라서 자칫 벽계의 인물이 들을까를 염려한 탓이었다.

잠시 뒤에 진무린은 옅게 웃었다.

마지막에 출발한 노인이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이제야 제대로 경공을 펼친 까닭이었다.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진무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멀리 갔습니다. 자리가 불편하니 잠시 내려가겠습니다.”

운진의 팔을 잡은 진무린은 벽계의 인물들이 있었던 자리로 몸을 날렸다.

뒤쪽은 나무라 어설픈 이들이 다가선다면 가지 밟히는 소리와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가 울릴 테고, 앞이 멀리 보이는 곳이라 경계하기에 좋았다.

“부적은 붙이셨습니까?”

“들킨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붙였소, 진 문주. 세 사람에게 하나씩 붙였으니 그들이 있는 장소를 찾거나 현재 모습을 보는 것도 가능하다오. 다만.”

잠시 말을 끊은 운진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언젠가 양묘가 진 문주를 살피다가 들킨 적이 있는 것처럼 저들의 내공이 뛰어나다면 우리가 들여다보는 것을 알 수도 있소.”

“당장 직접 볼 일은 없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찾고자 하는 이를 정해 부적을 날리면 된다오. 부적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터라 따라가기 벅차니 근처에 몸을 숨겼을 때 그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오.”

“멀리 있을 때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도가 도력을 펼치면 방향은 짐작할 게요.”

말을 마친 운진은 어쩐지 반가운 얼굴이었다.

“혹시 제가 알지 못하는 기쁜 일이 있으십니까?”

“세 사람을 찾을 때까지는 노도가 진 문주와 함께할 것이 아니오? 그것이 반갑고, 진 문주의 일에 힘이 된다는 사실이 기뻐서 속없이 표정이 밝은 모양이오.”

운진을 향해 가볍게 웃어준 진무린은 고개를 들어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귀혼곡으로 향해 이안공자를 만나는 일과 전중방으로 달려가 화산을 돕는 일, 어느 쪽을 선택할까.

진무린은 헤어지기 직전에 보았던 정동추의 눈과 그의 음성에 담긴 의지를 믿기로 했다.

정동추라면 분명 은천문의 진법을 열고 진무린의 당부를 전해주었으리라.

“귀혼곡으로 향할까 합니다.”

“진정 쉬지 않으셔도 되겠소?”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도착해서 편하게 운기할 생각입니다.”

“나야 기운을 완전히 되찾은 참이니 염려 말고 원하는 대로 결정하시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말을 건넨 진무린은 귀혼곡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라도 쉬고 싶었다.

일각쯤이라도 운기해서 지친 몸을 추스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외롭고 갑갑하게 기다릴 모려원과 종무헌을 생각하면 몸이 힘겨운 것이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월등히 속 편한 일이었다.

‘기다려라.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낸다.’

새벽의 달 아래에서 진무린은 운진과 함께 매섭게 달렸다.

 

**

 

세상이 어스름하게 밝아질 때, 모려원과 종무헌은 짧은 운기에서 깨어났다.

혹여 진무린이 진법을 열었을 때 지난번 종무헌과 같이 깊은 운기에 들었다면 곤란한 일이어서 이후로는 소주천 외에는 운기에 들지 않았다.

밝아지는 세상에도 아직 빛을 잃지 않은 별들이 모려원과 종무헌에게 밤을 기약하는 인사를 전하고, 내려앉은 습기에 젖은 기와가 잠시 뒤에 떠오를 태양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모려원과 종무헌은 함께 민가를 나서 묵룡검법의 초식을 펼쳤다.

느리게 한 번, 제 속도로 한 번.

모려원을 따라 검을 내며 종무헌은 묵룡심법의 내공을 제대로 운용하는 법을 익히느라 애썼다.

이런 수련은 언제고 적을 함께 상대할 때 검의 호흡을 맞춰주는 효과를 얻는다.

검법을 두 번 펼쳤던 모려원은 검을 집어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남은 삶을 이곳에서 마칠지 모른다.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때쯤 진무린을 볼지도 모르고.

나이 든 진무린은 어떤 모습일까?

정동추처럼 고집 센 인상일까, 아니면 파천신군 남굉모처럼 투박하고 무뚝뚝할까? 임운령처럼 중후하고 자상할 수도 있겠고, 전도위처럼 묵직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

가볍게 웃는 모려원을 종무헌이 슬쩍 살폈다.

“대사형이 나이 든 모습을 생각해 봤어. 내 머리칼이 하얗게 변하고 주름 가득해질 정도로 나이 먹어서 뵙는 대사형의 모습을.”

모려원의 말에 종무헌은 오히려 감동적인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해?”

“일대종사를 떠올렸습니다. 검황이나 검신이라 불리는 대사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확실히 종무헌은 모려원과는 다른 느낌으로 진무린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고작 이틀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을 이런 상상으로 보내야 호호 할머니가 될까.

‘진법을 깨지 못한다면 소매와 사제는 잊으셔도 돼요. 소매와 사제가 이곳에 남은 것은 절대 대사형 잘못이 아니에요.’

모려원이 밝아지는 하늘을 향해 당부를 전하는 순간이었다.

‘기다려, 사매. 내가 반드시 구한다.’

마치 진무린의 대답처럼 오늘의 태양이 지평선 저 너머에서 솟아났다.

하루가 지난다는 의미가 이토록 절절할 수 있을까.

기다림보다 무서운 것은 불현듯 덮치는 그리움이었다.

진무린의 음성, 모려원을 향해 보여주는 웃음, 진중한 눈매에 대한 그리움이 비수처럼 심장을 파고들 때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염려보다 더 두렵다.

‘소매는 잘 있어요, 대사형.’

행여 태양이 눈치챌까 봐 모려원은 억지로 미소를 그렸다.

마치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운진과 함께 귀혼곡에 도착한 진무린이 부러진 나무 아래의 돌을 몇 차례 두드린 뒤였다.

앞쪽이 흐릿해지면서 섭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어요?”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혹여 다친 사람은 없냐?”

“우선 들어오세요.”

진무린과 운진을 맞은 섭성은 기인촌으로 향하는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나중에 다시 밖을 살폈을 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위험하게 그걸 뭐하러 살펴? 혹여나 벽계의 인물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서 먼저 물을 잔뜩 뿌렸어요.”

섭성의 설명이 끝날 때쯤 세 사람은 기인촌에 도착했다.

다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기인촌은 온통 약 냄새로 가득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맹주 황종관이 누워있는 장소였다.

그의 침상 옆에서 거대한 갓을 쓴 이안공자가 진무린과 운진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왔나?”

한눈에도 황종관은 부상이 심했다.

“애쓰셨습니다.”

“가신들과 맹의 단원들을 희생하고 살아난 것이 무슨 자랑이겠나. 자네가 알려준 진중탈구검과 공자의 의술이 아니었다면 아마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걸세.”

마침 이안공자가 있는 자리였다.

진무린은 벽계의 세상에서 태상을 상대한 일부터 귀혼곡에 도착할 때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최소 이십 명이 강호에 몸을 숨겼단 말이 되는군.”

“그렇습니다.”

황종관은 진무린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구관을 열면 그들이 방해하기 위해 나설까?”

“십 년, 이십 년 후를 벼르던 것으로 봐서 힘을 완전히 갖췄을 때 모습을 드러내리라 봅니다.”

“그렇군.”

황종관의 질문에 답한 진무린은 이안공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자. 전중방에 있는 진법을 살펴주시겠습니까?”

“모 소저와 종 소협이 갇혀 있다니 어찌 도움을 드리지 않겠소? 그 전에 확인할 것이 있는데 전에 보내드린 기물이 현재는 은천문에 있다고 보면 되겠소?”

“아마도 본문을 여는 데 이용했을 것입니다.”

“구주의 보물로 벽계의 숨겨진 문을 찾는 기물이니 가는 길에 가져갔으면 하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무린이 답을 한 직후였다.

“내 모습이 특이해서 맹주만 직접 치료하고 다른 분들은 섭성과 상하일체가 대신 치료를 맡았소. 또 우리 촌의 몇 사람은 동굴에서 지내고 있으니 참고하시오.”

행여나 말이 새나갈 것을 염려한 것처럼 이안공자가 나직하게 언질을 주었다.

“윤고상의 일은 어찌 된 것입니까?”

진무린이 질문을 던지자 황종관은 침상 옆에 두었던 비수 두 자루를 잡아 진무린 앞에 놓았다.

“가신들이 회수한 비수일세.”

“이것이……?”

놀랍게도 반응을 보인 것은 운진이었다.

“아시는 바가 있소?”

“잠시 살펴도 되겠소, 맹주?”

“편히 하시오.”

황종관의 허락을 들은 운진은 곧바로 한 자루를 집어 손잡이와 날을 살폈다.

“비수 세 자루를 땅에 꽂았다고 하시고, 중간에 옥으로 만든 형상을 놓았다고도 하셨는데 혹시 그 형상이 사람의 모습 아니었소?”

“확실하지는 않으나 무술을 하는 모습인 듯싶었소. 하늘로 손을 뻗친 모습, 중단전, 그리고 하단을 막는 자세였소.”

황종관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운진은 눈가를 좁힌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무슨 일입니까, 문주?”

“맹주의 말씀대로라면 백여 년 전에 있었던 진법과 술법을 동시에 부리는 묘진인데……. 그렇구나! 양묘, 이놈이 벽계의 하수인이었구나!”

말이 달려가는 바람에 황종관을 돌아보았던 진무린이 얼른 운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되었소, 진 문주! 이 검과 양묘를 이용하면 벽계의 갇힌 문을 열 수 있겠소!”

“오!”

반가운 탄성을 지른 황종관이 진무린의 표정을 보고는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눈가를 좁혔다.

“자네는 왜 그런가? 사매와 사제를 찾을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왜 얼굴이 어두워? 혹 내가 모르는 다른 문제가 있나?”

나직하게 숨을 내쉰 진무린은 운진을 향해 먼저 시선을 주었다.

“문주. 양묘가 죽게 된다면 문주 또한 무사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목숨을 버려 사매와 사제를 구하시겠다는 것이라면…….”

“그리하면 숨은 벽계의 인물들을 어찌 찾겠소? 염려 마시오, 진 문주. 이 비수 두 자루가 부러질 뿐 노도는 무탈할 것이외다.”

운진의 답을 들은 진무린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반가운 표정을 얼굴 가득 담았다.

“자네가 그토록 밝게 웃을 때도 있구먼.”

황종관이 던진 농에도 진무린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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