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전설 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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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왕전설 97화
97화
강무진은 소리 죽여 속으로 울음을 삭였다. 그리고 노인은 세상을 다 산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한참이나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노인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을……. 내 잘못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아이를 살수로 키웠으니……. 모두가 내 불찰이지…….”
“아닙니다, 어르신. 제가 부족해서 생긴 일입니다. 모두가…….”
“그만 하게.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아이한테 모두 들었네. 이리 보니 생각보다 못생겼구먼. 어찌 그 아이가 자네한테 넘어갔는지 모르겠군. 허허…….”
“어르신…….”
“됐네. 그래. 그 아이는 어디에 묻었는가?”
“나중에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강무진의 말에 노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노인이 바로 초연의 할아버지인 노극부였다. 패왕성의 살수집단인 패왕비영대의 대주이며 무영살검이라 불리는 이가 바로 이 노인이었던 것이다.
초연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할아버지인 노극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었다. 강무진의 곁에서 늘 강무진을 지켜봐 왔던 초연이었기에 강무진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강무진을 지켜줄 수 없게 되자 할아버지가 그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만큼 강무진을 생각하며 사랑한 초연이었다.
“그 아이는…….”
노극부가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고 입을 닫았다. 그러나 강무진은 노극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에 초연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죽을 때까지의 일을 하나하나 조용히 이야기했다. 노극부는 그런 강무진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으면서 가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강무진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노극부가 다가와 강무진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한 번의 인연이 그리 길었구먼. 허허. 자네가 왠지 남 같지가 않아. 자, 안으로 들어가세나.”
“네, 어르신.”
노극부가 강무진의 손을 잡고 두드리면서 오두막으로 향하자 강무진이 그 뒤를 따랐다.
악양에서 최고를 다투는 문파 중의 하나인 흑룡문에 전에 없이 무거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며 여기저기 짜증을 내고 다니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바로 흑룡문의 소문주인 관옥상이었다.
“에잉, 모두들 약을 처먹었나. 오늘은 다들 왜 저러는 거야?”
전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유난히 문내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자 관옥상은 자꾸 짜증이 치솟았다. 그때 앞쪽에서 시비 두 명이 얼굴을 굳힌 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 그게 사실이니?”
“그렇다니까. 이제 곧 이곳이 없어질 거래.”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지?”
“그러게 말이다. 휴……. 지금 문주님이 사람들과 대청에 모여 의논을 하고 있으니 나중에 뭔가 언질이 있겠지.”
시비들이 나누는 말에 관옥상은 인상이 구겨졌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시비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금 뭐라 그랬어?”
“어머? 소문주님…….”
“아니, 저… 그것이 아니고…….”
시비들은 흑룡문이 사라질 거라는 말을 함부로 한 것이 걸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관옥상은 그것보다 아버지인 관평대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자신이 몰랐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방금 아버님이 돌아오셨다고 했냐?”
“네? 아, 네. 문주님은 지금 대청에 계십니다.”
“이익!”
관옥상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자신이 문내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지만 자신은 흑룡문의 소문주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출타했던 문주인 아버지가 돌아왔는데 아무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는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시비의 말을 들어보면 흑룡문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의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관옥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을 간신히 누르면서 대청으로 향했다. 그가 그렇게 씩씩대면서 대청으로 들어서자 한창 의논을 나누던 모두의 시선이 관옥상에게로 쏠렸다. 그곳에는 흑룡문의 중요 인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관옥상은 그들을 노려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주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인 관평대의 한마디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뭐 하느냐? 왔으면 어서 와서 앉지 않고.”
“…….”
관평대의 말에 가까스로 화를 누르며 관옥상은 한쪽에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다시 사람들이 분분히 자신들의 의견을 꺼내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관옥상이 들어보니 대충 두 가지 의견이 대립을 하는 것 같았다.
하나는 흑룡문의 간판을 내리고 대성상단에 완전히 복속하여 실리를 챙기자는 의견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찬성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대성상단과 패왕성에 맞서 싸우자는 의견이었는데, 곧기로 소문난 우 장로와 그를 따르는 두세 명만 그 의견에 찬성을 하고 있었다. 이에 우 장로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모두들 그런 우 장로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모두들 굵고 짧게 살기보다는 가늘고 길게 사는 길을 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주인 관평대는 마른 체격에 키가 컸다. 그리고 눈매가 날카로워서 사람을 쏘아보는 것같이 보였는데, 지금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좌중의 모든 사람들을 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 장로를 중심으로 대성상단과 패왕성에 항복하자는 의견을 내는 사람들은 그런 관평대의 눈길을 받을 때마다 몸을 흠칫 떨었다.
한참을 말없이 그렇게 시선만 던지고 있던 관평대가 가만히 관옥상을 바라봤다. 관옥상은 뭐가 못마땅한지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그런 관옥상을 유심히 보던 관평대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모두 조용히들 하시오.”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던 관평대가 한마디 하자 좌중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여지 네 생각은 어떠냐?”
관평대가 딸인 관여지를 보며 묻자 관여지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여지 역시 여태까지 관평대와 마찬가지로 한마디도 없이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었다.
“여인의 좁은 소견이라 생각지 말고 귀담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흑룡문에서 관여지의 말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주인 관평대 다음으로 실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바로 관여지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모든 면에서 오라비인 관옥상보다 뛰어났다. 특히 그녀의 지혜로움은 모두가 인정을 하고 있었다. 이에 흑룡문의 다음 대 문주는 비록 여자지만 관여지가 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잠시 좌중을 한 번 쓸어본 관여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서 대성상단과 맞설 수는 없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우리와 함께 고락을 같이했던 사람들인데 우리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그들에게 검을 겨눈다면 강호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겁니다.”
“검은 그들이 먼저 겨누지 않았소?”
우 장로가 탁자를 한 번 탕 소리치며 분개해서 소리치자 관여지가 고개를 저었다.
“우 장로님도 알다시피 그들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도 패왕성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겁니다. 그래서 문주님이 직접 상단의 단주를 만나고 온 겁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그리로 귀속된다는 것이 그리 달가운 일만은 아닐 겁니다. 그들이 우리를 통제할 자신이 없을 테니까요.”
“음…….”
관여지의 말에 대청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관여지가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러니 제 생각에는 지금 무리하게 패왕성에 맞서서 그들과 싸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지금 패왕성이 혼란스러워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나 패왕성은 패왕성입니다. 남쪽에서 그들의 힘을 무시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그들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대신에 대성상단에서 우리의 자리를 굳건히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를 절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면 비록 지금 흑룡문이라는 간판은 내리지만 우리는 그들 안에서 흑룡문의 간판을 다시 올릴 수 있을 겁니다.”
“흠.”
관여지가 말을 끝내고는 좌중을 한 번 훑어본 후에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관평대가 이번에는 관옥상을 보며 말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관옥상은 순간 관평대가 다른 사람에게 묻는 줄 알았다. 여태까지 이런 자리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생각을 물어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잠시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곧 헛기침을 몇 번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험! 험!”
그곳에 모인 사람들 역시 전에 없던 일이라 의아해하며 관옥상을 주목하고 있었다.
“제 생각은… 당연히 까부셔야지요. 아주 혼쭐을 내줘야 합니다. 대성상단부터 아작을 내야 합니다. 대성상단의 그 구정무 놈은 제 아비의 힘만 믿고 날뛰는데 그놈부터 아주 반 죽여놔야 합니다. 그래서 패왕성에서 덤벼들면 그놈들도 상대하면 될 거 아닙니까? 무서울 게 뭐 있습니까? 덤벼들면 덤벼드는 족족이 깨 부셔서…….”
“에잉.”
“이보시오, 소문주! 생각을 좀 하고 말을 하시오.”
“지금 그걸 의견이라고 내놓은 것이오?”
“쯧쯧.”
관옥상은 갑자기 주위에서 질타가 쏟아지자 속으로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이에 사람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럼 싸워보지도 않고 개새끼처럼 꼬리를 내리고 들어가자는 말이오?”
“헉! 개… 개 뭐요?”
“허! 저런 망발을…….”
“아니, 지금 그게 소문주로서 할 말이오?”
“젠장! 이럴 때만 소문주냐? 언제 당신네들이 날 소문주로 대접해 줬단 말이냐? 그리고 여지 말대로 대성상단에 가면 우리가 기 펴며 살 수 있을 것 같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죽는 게 두려워서 꼬리 말고 온 놈을 누가 대단하게 봐? 무시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거지도 제 앞마당에서는 서 푼을 먹고 들어가는 법이야!”
쾅!
“말을 가려서 하시오, 소문주!”
듣다 못한 서 장로가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외치자 주위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관옥상에게 뭐라고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 질세라 관옥상도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니 좌중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관여지는 조용히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관평대 역시 그들을 말릴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에선가 한순간에 좌중을 압도하는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감히 내 형님을 무시하는가?”
그 목소리에는 깊은 내공이 담겨 있어 순식간에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두 눌러버렸다. 이에 사람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굉장한 고수라고 생각하면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대청의 입구에 평범하게 생긴 젊은이가 한 명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방금 뭔가를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방금 목소리에 실린 내공은 저렇게 젊은 사람이 지닐 수 없는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