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전설 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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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왕전설 88화
88화
초연의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랬다. 그녀가 늘 바라던 운명적인 사랑. 초연은 그 상대가 강무진이라고 생각했다. 죽여야 할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를 사랑하게 되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초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예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그랬으니까…….
-그의 앞에 당당히 나설 수가 없어. 내가 자신을 죽이러 왔던 살수라는 사실을 알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 할아버지가 돌아오시면……. 할아버지가 같이 조용히 살아가자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모습을 감추고 있는 거야. 훗! 내가 항상 곁에서 따라다녔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겠지.
-할아버지!
-오냐. 허허. 그래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왜 패왕성으로 돌아오지 않고 저만 따로 불러내신 거예요?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네? 그럼 아직 임무가 안 끝난 거예요?
-그래.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려무나.
-치잇! 어쩔 수 없죠. 뭐…….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뭐든지……. 그렇지. 그렇게 하는 거야.
-할아버지. 이거 해석할 수 있어요?
-응? 이게 뭐냐? 헉! 열화마결? 이, 이것을 어떻게 네가…….
-음,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허허. 정말 그를 사랑하느냐?
-응. 그 사람은… 운명적인 사랑이야. 할아버지랑 할머니처럼 말이야. 헤헤.
-허허. 녀석. 그리 좋은 게냐?
내게 있어 너는 운명적인 사랑이야. 운명적인…….
난 그걸 기다려왔던 거야. 너를 기다려왔던 거야. 그렇지?
그렇지, 무진아?
강무진은 초연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강무진을 미치게 하고 있었다. 그런 강무진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같이 죽는 거야. 그럼 외롭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그렇게 마음을 먹자 조금은 편해지는 강무진이었다. 그러자 천천히 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새로이 의형제를 맺다>
형산의 깊은 산속.
“흐아앗!”
콰콰콰쾅!
일격에 아름드리 나무 하나가 부러져 나가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 서 있는 사내는 그 정도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얼굴이었다.
“위력이 또 늘었군요.”
척경이 다가오며 하는 말에 적운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자라. 그를 이기기에는 아직 모자라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실력이 늘고 있으니 조만간 그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겁니다.”
“…….”
척경의 말에 적운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노력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정말 고운강을 이길 수 있을지는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뼈를 깎는 수련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했었고, 그만큼 무공에 자신이 있던 적운휘였다. 그런 그가 제대로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한 것이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적운휘는 갑자기 강무진이 생각났다.
자신의 마력진패강기보다 강한 그의 무공이라면 그를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드는 적운휘였다.
‘아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그는 내가 꺾어야 할 자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생각을 하다니, 나는 이렇게까지 약해져 있었던가?’
갑자기 너무나 많은 일이 생겨 스스로를 돌아볼 틈이 없었던 적운휘였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있던 아버지 적상군의 죽음,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그리고 어머니인 부용화는 패왕성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생사조차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적영령이 무사하다는 것이었다.
“훗!”
적영령을 생각하다가 그녀를 데려간 강무진을 생각하자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 적운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척경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웃음을 보이시는군요.”
“그랬던가? 왠지 그가 보고 싶군.”
“네?”
“훗!”
말없이 웃으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적운휘의 시선을 따라 척경도 얼결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허허. 미안하게 되었구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능력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오.”
“…….”
벌써 이런 말을 몇 번째 듣는 강무진이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나 목숨은 어떻게 건졌으나 팔이 문제였다. 고운강과 부딪친 이후로 망가진 팔은 더 이상 움직이지가 않았다. 감각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이에 의원이라는 의원은 모두 찾아다녀 봤지만 모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때마다 강무진은 차라리 어딘가로 가서 숨어서 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강무진은 스스로 질책을 했다. 적어도 초연의 원수만큼은 갚아야 했다.
그것이 자신을 살리고 죽어간 그녀에 대한 도리가 아닌가?
밖으로 나온 강무진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강무진은 그런 맑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젠장…….’
두르고 있던 망토로 온몸을 가리면서 길거리로 나선 강무진은 이제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의원을 찾아다니다가 이곳 악양까지는 왔지만 모두가 만나기로 한 흑룡문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로 가봤자 모두에게 짐만 될 뿐이었다.
계속 길을 가던 강무진은 대로를 벗어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왼쪽으로 꺾어지는 순간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웬 아이 하나가 후다닥 뒤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강무진은 벽에 바싹 붙어 있다가 그 꼬마가 나타나자 발로 그 아이의 발목을 후려 찼다. 그러자 꼬마가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악!”
그런 꼬마의 가슴을 발로 밟아 누르며 강무진이 무서운 얼굴로 물었다.
“왜 날 따라오는 거냐?”
“그, 그게……. 윽!”
꼬마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강무진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말하지 않으면 죽인다.”
살기를 띠며 말하는 강무진의 말에 꼬마는 하늘이 노래지면서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바, 발부터 치워요!”
그때 꼬마가 빽 소리를 지르자 강무진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꼬마의 가슴을 밟고 있던 발을 치웠다. 그러자 꼬마가 가슴을 탁탁 털어내더니 벌떡 일어나서 강무진을 노려봤다.
“씨! 하나도 안 무서워!”
강무진은 속으로 기가 막혔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꼬마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왜 나를 따라왔냐고 물었다.”
“그, 그건…….”
“다시 밟히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 아니에요! 팔 때문에 그랬어요. 아저씨 팔이요.”
꼬마를 다시 겁주려던 강무진은 꼬마가 하는 말에 멈칫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그게, 아저씨 팔 고치고 싶죠?”
“……!”
“팔을 치료하려고 의원들을 찾아다녔잖아요.”
“그런데?”
강무진이 조금 관심을 가지고 묻자 여태까지 겁을 먹고 있던 꼬마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팔짱을 착 끼고 턱을 들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흥! 그런 돌팔이들은 아저씨 팔 못 고쳐요.”
“그럼 누가 고칠 수 있단 말이지?”
“그거야 당연히 우리 아버지지요.”
“흠.”
“어? 못 믿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뛰어난 의원이라고요. 사람들이 천하제일이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천하제일?”
“그래요! 우리 아버지의 의술은 천하제일이라고요.”
“그래? 그럼 아버지한테 나를 안내해 주겠니?”
“그, 그게……. 으아아아앙!”
“뭐? 뭐야? 갑자기 왜 우는 거야?”
“으아아아앙!”
‘참내…….’
강무진은 꼬마가 계속 울자 어쩔 수 없이 꼬마를 안아서 다독여주었다. 그러자 꼬마가 좀 진정이 되었는지 울음을 그치면서 사정을 모두 강무진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꼬마는 두서없이 이야기를 막 했으나 강무진은 그것을 묵묵히 끝까지 들은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네 아버지를 흑룡문에서 잡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그 나쁜 놈들이……. 흑룡문의 대공자라는 놈은 망나니라고요. 제 아비도 어쩔 수 없는 인간 말종이래요.”
딱!
“아야! 왜 때려요?”
강무진에게 꿀밤을 맞은 아이가 강무진을 쏘아보며 화를 냈다.
“참나……. 어린놈이 그런 말은 쓰는 게 아니야.”
“쳇!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흙탕물을 먹는다고 너도 먹을래?”
“예? 그, 그건…….”
“남들이 다 한다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네…….”
강무진의 말에 꼬마가 기죽은 모습으로 대답을 하자 강무진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 다시 네 말을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흑룡문의 대공자라는 놈……. 험! 대공자라는 사람이 유가장원의 아가씨를 좋아하는데, 유가장원에서는 싫어한다. 이거지?”
“네.”
“그래서 그 대공자가 유가장원에 시비를 걸었고, 그 아가씨의 오라비 되는 사람이 나서서 결투를 하기로 한 거고?”
“네.”
“그런데 그 오라비 되는 사람의 지병을 네 아버지가 그동안 계속 치료를 해왔었는데, 그 사실을 그 대공자가 알고 네 아버지를 감금해 버렸다. 이런 이야기네?”
“네. 맞아요.”
“흠.”
‘어쩐다? 이 꼬마 말만 믿고 흑룡문으로 가야 하나? 가서 팔을 고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모두에게 짐이 될 텐데…….’
“아저씨, 부탁해요. 네? 우리 아버지 좀 구해주세요. 흑…….”
강무진은 주먹을 불끈 쥐고 울고 있는 아이를 보자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어차피 이곳까지 온 이상 모두를 만나는 것이 낫겠다. 그들에게는 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들의 도움이 있으면 더 빨리 팔을 치료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한 강무진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울지 마라. 사내는 쉽게 눈물을 보이는 게 아니야. 네 아버지 일은 내가 한 번 어떻게 해보마.”
“저, 정말이요?”
“그래. 이름이 뭐지?”
“무병이라고 해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지 말고 건강하게 크라고 무병이라고 지었대요. 무무병.”
“훗! 그래. 좋은 이름이구나. 너는 집에 돌아가 있어라. 그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응. 정말이죠?”
“그래, 정말이다.”
“응.”
무무병은 금방 뛸 듯이 기뻐하다가 곧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강무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하지만 흑룡문 사람들은 아주 무서운데…….”
“뭐야? 나를 걱정하는 거냐? 걱정하지 마라. 아저씨가 지금 한쪽 팔을 다쳐서 잘 못 쓰지만 싸움은 아주 잘해. 한 백 명쯤은 덤벼도 끄떡없지.”
“정말이요?”
“그래. 한번 볼래? 저기 저 벽을 잘 보고 있어.”
“네?”
무무병이 강무진이 가리키는 곳을 보는 순간이었다.
파파팍!
어느새 강무진의 손을 떠난 세 개의 단검이 벽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것을 보고 무무병이 놀라서 입을 헤 벌렸다.
“와아…….”
“봤지? 그러니까 이제 마음 놓고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알았지?”
“네!”
무무병이 힘차게 대답을 하고 뛰어서 골목을 나가자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강무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