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전설 1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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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왕전설 113화
113화
‘나는 극강한 고수인 아무개한테 당했다.’고 말해도 듣는 사람이 ‘그가 너무 강하니 당연한 일이지.’라고 말할 정도의 명성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끙……. 나는…….”
“…….”
‘누구냐?’
“나는…….”
“…….”
‘그래! 누구냐고?’
“몰라.”
“허걱!”
강무진의 대답에 황랑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때 강무진의 눈의 초점이 좀 흐린 것을 발견하고는 옆에 있는 부하를 슬쩍 당겨 귓속말로 물었다.
“저놈 상태가 좀 이상한데. 눈이 살짝 맛이 간 것 같지?”
황랑의 부하가 조심스럽게 슬쩍 강무진을 한 번 훔쳐보자 그의 말대로 눈이 살짝 풀려 있는 것 같았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저 정도 고수라면 눈빛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완전히 풀려 있잖습니까? 살짝 맛이 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속닥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벙해 보이는 사내가 황당하게도 황랑을 향해 질문을 해왔다.
“나는 누구지? 나 누구야?”
‘이런 젠장……. 네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러나 속마음이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 당신은…….”
“내가 누구냐니까!”
갑자기 어벙해 보이던 사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 사나운 기세가 주변으로 확 번져갔다.
“헉!”
이에 근처에 있던 사내들이 그 기세에 자신들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 부두목…….”
“응? 부두목? 내가 부두목이야?”
‘누구냐? 어떤 놈이 저런 헛소리를…….’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황랑이 당황하며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러자 사람들 틈에 있는 덩치가 큰 산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벙해 보이는 사내를 이곳까지 데려온 산적들 중의 한 명으로, 그들에게 조장이라고 불리던 그 사내였다. 이름은 왕면박으로 산적 생활 10년 만에 겨우 부하 네 명을 거느리는 조장이 된 사내였다.
왕면박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신이 부두목이라 말한 것은 옆에 있던 부두목을 부른 것이었는데 때마침 강무진의 기세에 눌려서 모두가 입을 다무는 바람에 그 소리가 크게 났던 것이다.
“내가 부두목이구나.”
그때 강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말하자, 산채의 두목인 황랑은 물론이고 자신이 부르려고 했던 부두목까지 살기 어린 시선을 왕면박에게 보냈다. 그러자 왕면박은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맞습니다. 당신은 우리 산채의 부두목입니다.”
“허걱! 저… 저…….”
이어지는 왕면박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사실 당신은 오래전에 저기 계신 두목님의 명령을 받고 무공을 연구하기 위해 산을 내려갔었습니다. 그 뒤로 행방불명되었었는데 이제야 이렇게 돌아오신 겁니다. 흑…….”
왕면박이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말하자 모두들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바보 같은 놈! 여태까지 그렇게 칼질을 해놓고 그런 말을 하면 누가 믿냐?’
그러나 모두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 어벙해 보이는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구나. 내가 부두목이었구나.”
“허걱!”
“흑……. 부두목님!”
그때 왕면박이 그 어벙해 보이는 사내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 두목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에서 벗어난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어벙한 사내는 정말 오랜만에 자신을 보니 반가워서 그런다고 착각을 했다.
“응. 그래. 그렇구나. 네가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넌 내 부하였을 거야.”
“맞습니다. 전 부두목님의 오른팔로 항상 부두목님을 옆에서 모셨습니다.”
“그런데 왜 아까는 사람들이 나한테 칼을 휘둘렀지? 너처럼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
‘아뿔싸!’
어벙해 보이는 사내의 물음에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으면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황랑은 자신도 모르게 움켜쥐고 있는 주먹에 땀이 베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곳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가 이제는 왕면박의 입술을 보며 잘 얼버무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그것은……. 그렇습죠. 두목님이 부두목님에게 무공을 연구해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걸 한번 시험해 보느라 그런 겁니다. 하하하.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바보 같은 놈! 그런 말을 누가 믿냐?’
그러나 이번에도 모두의 생각과는 다르게 어벙해 보이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랬던 거였군.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내가 부두목이었던 건 맞는 것 같아. 그럼 저기 있는 분이 두목님이구나.”
“네? 아, 네…….”
어벙해 보이는 사내가 황랑을 가리키며 말하더니 곧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예를 취하면서 말했다.
“이제 돌아왔습니다, 두목.”
“응? 으응……. 그래…….”
황랑이 어색하게 대답하면서 왕면박을 확 노려보자 왕면박이 그런 황랑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렸다.
그때부터 그 어벙한 사내는 팔공채의 부두목이 되었다. 원래는 있을 수도 없는 인사 조치였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동안 황랑을 비롯한 모든 산적들은 혹시나 이 어벙한 사내가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내고 자신들이 그를 속였다는 것을 알까 봐 불안해했으나 다행히 어벙한 사내는 과거의 일을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다.
단 하나!
자신의 이름이 강무진이라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조장! 마차 한 대가 옵니다. 어떻게 할까요?”
나무 위에서 망을 보고 있던 산적 하나가 그 아래에서 봄날 햇빛을 받으며 뒹굴고 있던 우락부락한 산적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 허리춤의 도끼를 뽑아 들었다.
“어떡하기는 뭘 어떻게 해? 요즘 위에서 밥상이 시원찮다고 난리다. 준비들 해.”
사내의 명령에 산적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잠시 후, 마차가 서서히 다가오자 산적들 중 여섯 명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네 명은 마차의 뒤를 막았다.
“푸하하하! 가진 것 다 내놔라!”
우락부락한 산적이 괜히 크게 웃으면서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마차를 몰고 있던 젊은 사내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에 호쾌하게 웃으며 큰소리를 쳤던 산적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보통 이렇게 마차를 가로막고 큰소리를 치면 상대가 겁을 먹든지 불안한 기색을 보이든지 해야 하건만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고수들이 보이는 여유로운 반응조차도 없었다.
이에 산적은 이대로 물러나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산적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치면서 들고 있던 도를 뽑아 어깨에 척하니 걸쳤다.
“가진 것을 다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제야 마차를 몰고 있던 젊은 사내가 반응을 보였다. 마차에서 가만히 내리더니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하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마차에 올라타고 있을 때는 마차의 앞뒤를 막고 있던 열 명의 사내들이 피를 뿜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있었다.
젊은 사내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마차의 앞을 막고 있던, 무려 3장이나 떨어져 있는 사내 여섯 명을 단번에 베어버리고는 뒤로 이동해 뒤쪽을 막아서고 있던 네 명까지 모두 베어버렸던 것이다.
마차에 올라 다시 말고삐를 쥔 젊은 사내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흐아아암!”
나무에 기대서 크게 하품을 한 강무진이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부터 밑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귀찮은 녀석들.’
“끙.”
강무진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느릿한 걸음으로 싸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까까까깡!
“크아아악!”
“허어억!”
“뒤를 막아!”
“그쪽으로 움직… 으악!”
강무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에 할 말을 잃었다. 팔공채에서 나온 100여 명 가까이 되는 산적들이 마차 한 대를 둘러싸고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마차에 손 하나 대지 못하고 있었다. 마차를 보호하고 있는 젊은 사내 때문이었다.
그는 혼자의 몸으로 동분서주하면서 마차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워낙에 무공이 뛰어나 산적들이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까지 산적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유는 사내가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산적들을 공격하기 위해 마차에서 잠시라도 떨어지면 다른 산적들이 그 틈에 마차를 공격했기 때문에 사내는 곧 다시 돌아와서 마차를 지켰다. 그래서 단번에 산적들을 모두 베어버릴 실력이 있으면서도 계속 산적들과 대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 여자인가?’
강무진은 젊은 사내가 남장을 하고는 있지만 단번에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산적들은 한쪽에서 느긋이 걸어오는 강무진을 보고는 흠칫 놀라며 서로 눈짓을 했다. 그러면서 강무진이 마차로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마차를 보호하고 있던 남장 여인은 갑자기 산적들이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그들 틈에서 한 사내가 마치 산보하듯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그 이유를 짐작했다.
“여어! 솜씨가 제법이군.”
“…….”
“이놈들이 좀 귀찮게 했나 보군. 훠이훠이. 좀 뒤로 물러서 있어. 날씨도 더운데 그렇게 모여 있으면 더 더워 보여.”
강무진이 주위의 산적들한테 휘휘 손을 저으며 말하자 산적들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응? 근데 내 시중들던 놈들은 왜 안 보이냐?”
강무진이 산적들을 훑어보며 묻자 산적들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강무진이 말한 시중들던 놈들이란 강무진을 이 팔공채에 끌어들인 왕면박을 비롯한 그의 부하 네 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최근 그들은 강무진을 등에 업고 팔공채에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다녔었다. 그 눈꼴 시려운 모습에 말들이 많았지만 모두들 강무진을 두려워해 쉬쉬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모르는 산적은 없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강무진의 눈에 곧 그 시중들던 놈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남장 여인의 검에 당해 참혹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강무진의 얼굴이 순간 꿈틀했다.
“죽…었나?”
그렇게 말하는 강무진의 몸에서 갑자기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살기를 느낀 산적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을 했다.
“네가 한 짓이냐?”
강무진이 남장 여인을 노려보며 말했으나 남장 여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강무진을 경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강단 있는 산적 하나가 나서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자에게 모두 당했습니다.”
“그렇다는군. 그놈들이 너한테 모두 당했으니 이제부터 네가 내 시중을 들어라.”
“…….”
“물론 마차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이제부터는 두 사람 다 내 부하다.”
강무진이 마차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잡아내고 그렇게 말하자 여태까지 반응이 없던 남장 여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