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전설 1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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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5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왕전설 150화
150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일단 그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그만큼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들과 안 좋게 연관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약 저 아이가 패왕성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아이라면 호남성 지부뿐만이 아니라 패왕성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네 개의 성에 자리 잡고 있는 지부들이 모두 박살이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화화는 망설였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패왕성을 상대로 한번 길을 뚫어보고 싶었다. 늘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것이 패왕성에 대한 것이었다. 남쪽에서는 최고라는 그 패왕성을 상대로 이번 일을 성공한다면 자신의 이름은 이 업계에서 전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강한 호승심과 명예욕이 화화로 하여금 자꾸 길을 재촉하게 하고 있었다.
밤이 되자 강가의 갈대숲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화화가 사내들을 보며 말했다.
“패왕성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화화의 말에 사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을 했다. 화화는 그 눈짓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빠진다고 하면 그들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다.
“흥! 패왕성이 움직였다는 말은 호남성의 모든 군소문파들도 움직였다는 이야기나 같아요. 내가 없었다면 당신들은 벌써 붙잡혔을 거예요.”
화화의 말에 사내들이 다시 서로 눈짓을 했다. 화화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사실 오늘 패왕성의 무인들이 수없이 거리로 나와 흉흉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니자 사내들은 크게 당황했었다. 그러나 화화의 지시와 안내로 인해 무사히 지금 이곳까지 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혹여라도 나한테 손을 쓸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아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니까.”
화화의 말에 사내들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업고 있는 사내였는데 화화의 느낌으로는 그가 이 사내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지금부터는 더욱 제 지시에 잘 따라줘야 해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반드시 호남성을 벗어나 호북성까지 데려다 주겠어요. 그것이 제 일이니까요.”
화화가 자신감 있게 말하자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은 화화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머릿속에서 빠르게 그려가기 시작했다.
장사(長沙)에서 동정호(洞庭湖)까지 단숨에 이동하자는 죽의 말에 따라 지금 일행들은 모두 배 위에 올라 있었다. 배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인근 일대에서는 가장 빠른 쾌속선이었고, 배를 모는 사람도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강무진이 뱃머리에 서서 앞에 펼쳐진 강물을 보고 있는데 죽이 뒤에서 살며시 다가왔다.
“흐응. 몇 살이죠?”
죽의 물음에 강무진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리 많지는 않아요. 매보다 한 살이 많을 뿐이에요.”
“나도 그리 많지는 않아. 하지만 당신보다는 많을 것 같군.”
강무진은 사실 죽의 나이가 자신보다 많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죽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훗! 그럼 제가 오라버니라 부르면 되겠군요.”
감히 패왕성 최고의 직분에 있는 강무진에게 일개 하오문의 문도가 저리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강무진은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직도 자신이 패왕이라는 것보다는 팔공채의 부두목이라는 것이 더 친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난 뭐라고 부르지? 죽 매라고 불러야 하나?”
“좋아요. 조금은 솔직해지죠. 제 이름은 하은연이에요.”
“그럼 하 누이라고 불러야겠군.”
“에? 어째서 누이죠?”
“당신이 조금 솔직해자고 하지 않았나? 사실은 왠지 느낌에 당신이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을 것 같거든.”
“호호. 그건 너무 솔직하군요. 하지만 어찌 감히 패왕이라는 분을 동생으로 두겠어요. 그러니 그냥 편하게 절 동생으로 여겨주세요. 누가 봐도 제가 동생으로 보일 테니까요.”
“그러지, 그럼.”
“듣자하니 기억을 잃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그래.”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으세요?”
“흐음…….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어. 지금도 그렇게 크게 불편한 것은 없거든. 무공도 어느 정도 쓸 수 있고, 내가 기억을 못 해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아주니 굳이 찾고 싶은 생각은 없어. 때가 되면 기억이 돌아오겠지 뭐.”
“하지만 기억 속에 뭔가 중요한 것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뭐 그런 것들이요. 예를 들면 연인이라든가…….”
“연인이라…….”
그렇게 말하는 강무진의 얼굴에 쓸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스스로 짓고자 해서 그런 표정이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랜 기억 속의 뭔가가 그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한 것이다.
“표정을 보니 있나 보군요.”
“그럴지도.”
“하지만 지금은 없죠?”
“응?”
“됐어요. 그럼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이야기니까.”
그렇게 말하던 하은연이 갑자기 강무진에게 바짝 다가가 까치발을 하며 강무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금 있다 밤에 찾아갈게요, 오라버니.”
“뭐?”
하은연의 말에 강무진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뒷짐을 지고 깡총거리며 가버렸다. 그런 하은연의 뒷모습을 어이없단 표정으로 가만히 보고 있던 강무진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배가 그리 크지 않아 강무진은 제갈무용, 그리고 왕이후와 한방에서 자야 했다. 이미 제갈무용과 왕이후는 잠든 상태였고, 강무진도 이제 스르륵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살짝 잠이 들었었으나 뭔가가 자꾸 품으로 파고들자 살짝 잠이 깨었다.
“……!”
“쉿! 기다렸죠, 오라버니.”
하은연이었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낮에 약속한 대로 남자들만 자고 있는 방으로 강무진을 찾아왔던 것이다.
“뭐, 뭐 하는 거야?”
강무진이 당황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자 하은연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강무진의 귀에 입을 바짝 가져다 대고 말했다.
“아까 찾아온다고 했잖아요. 훗! 속으로는 좋으면서…….”
하은연이 말할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강무진의 귀를 간질였다. 이에 강무진이 하은연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하은연이 다시 강무진의 귀에 대고 하는 말에 멈칫했다.
“반항하면 지금 소리를 지를 거예요.”
하은연은 강무진이 그렇게 가만히 있자 다시 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그만 해.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강무진이 몸을 틀면서 제갈무용과 왕이후를 슬쩍 바라봤다. 다행히 깊이 잠이 든 듯, 그들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때 하은연이 다시 품을 파고들며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강무진이 당황하면서 말했다.
“아, 안 돼. 거긴, 그만…….”
“가만히 있어요. 좋으면서 왜 자꾸 그러실까…….”
“이러다 들켜. 녀석들이 깨면 어쩌려고 그래. 그만 하라고.”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라고요.”
강무진이 하은연에게 그렇게 당하면서 계속 속삭이고 있을 때 제갈무용과 왕이후는 그들에게 등을 보인 채로 누워서 속으로 똑같이 투덜대고 있었다.
‘다 들린다. 다 들려. 니미……. 차라리 나가서 하든가. 잠 좀 자자, 잠 좀!’
“아앗! 여기가 어디냐?”
유소호는 정신이 들자 처음 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날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냐? 당장 내려놔라!”
유소호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업고 가고 있는 사람을 향해 극음빙장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새 옆에 있던 사내가 그런 유소호의 손을 잡았다.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아가씨를 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내의 말에 유소호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닥쳐랏! 빨리 나를 내려놔라!”
유소호가 그렇게 발버둥을 치자 사내도 더 이상 유소호를 업고 갈 수가 없었다. 이에 멈춰 서서 유소호를 내려놓자 유소호가 잠시 주위에 있는 사내들을 쓱 훑어봤다. 네 명의 사내들이었는데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풍기는 기세가 날카로운 것으로 봐서 모두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 같았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죄송합니다. 저희들 신분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에게 절대로 해를 가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내 중에 얼굴이 네모진 강인한 인상의 사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소호가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흥! 나를 납치해 놓고 어떻게 안심을 하라는 것이냐?”
“납치가 아니라 중원인들로부터 아가씨를 구해낸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궁주님을 뵐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십시오.”
“뭐? 아버님이 중원으로 오셨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사내의 말에 유소호가 놀란 눈을 했다. 평소 아무리 큰일이 있어도 궁 밖으로 절대로 나오지 않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인 북해신궁의 궁주 유양천은 항상 밑에 사람들을 시켜 일처리를 해왔기 때문에 나올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해에서는 유양천이 직접 궁 밖으로 나와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유양천이 궁 밖으로 나와 이곳 중원에 와 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이…….’
유소호는 유양천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무화는? 무화는 어디 있느냐?”
“다른 조에서 모시고 있습니다. 아마 무사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유소호가 안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말했다.
“좀 씻고 싶다. 씻은 후에는 그대들과 함께 아버님을 뵈러 갈 것이다.”
사내들은 유소호가 고분고분하자 서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의 객잔에서 씻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다. 그럼 그렇게 하자.”
유소호가 그렇게 대답하자 여태까지 유소호를 업고 있던 사내가 유소호의 앞에 와서 쭈그리고 앉으며 등을 보였다. 거기에 유소호가 업히자 사내들이 다시 경공을 펼쳐 전속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자 사내 말대로 정말 마을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그 마을 근처까지 다다르자 사내는 경공을 멈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깔끔해 보이는 객잔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가 그들을 반기며 인사를 하자 사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에 말했다.
“방을 하나 잡아주고 씻을 준비를 해놓아라. 간단히 요기할 것도 가져오고.”
“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점소이가 안으로 손짓을 하며 방으로 안내하자 일행이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한 명은 잘생긴 귀공자였고 다른 한 명은 키가 작고 왜소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바로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종상과 천하제일의 고수 중 한 명인 괴성 나악태였다.
이에 점소이가 재빨리 뛰어가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묵어 가실 겁니까?”
“아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점소이가 그들을 안내하려고 하자 잘생긴 귀공자가 손을 저으며 객잔 안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됐다. 저쪽 구석에 앉으마.”
“네.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그렇게 대답하며 재빨리 그들이 앉으려는 곳으로 가서 먼지가 없는데도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의자와 탁자를 탁탁 몇 번 털었다. 거기에 두 사람이 와서 앉자 점소이가 물었다.